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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지만"(<님의 침묵>), 우리는 이별을 막을 수 없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별리(別離)를 경험한다.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 한다. 사랑도 인연도 관계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회피할 수 있는 사람과 영원한 인연은 세상에 없다.

스물일곱 살 청춘이 쓴 서책 <시간이 멈춘 방>은 뜨악하다. 삶이 무엇인지, 인생의 비의(秘義)와 환희와 슬픔이 어디 있는지 아직은 모를 여성이 써 내려간 책. 읽다가 잠시 '흐음' 하고 호흡을 골라야 하는 서책. 아주 오래 살아온 사람들마저 외면하려고 하는 죽음, 그것도 고독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따사로운 마음으로 집필한 책.

고독사 원인과 유형
 
<시간이 멈춘 방>, 고지마 미유 지음, 정문주 옮김.
 <시간이 멈춘 방>, 고지마 미유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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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미유는 고독사를 "아무도 모르게 자택에서 사망한 이가 죽은 다음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발견되는 상황"(6쪽)이라 정의한다. 일본에는 해마다 3만 이상의 고독사 사례가 있다고 한다. 지은이는 고독사를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죽음은 불가피하며, 자신이 살던 집에서 최후를 맞고 싶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고독사가 사회적으로 문제 되는 까닭은 시신이 발견되는 소요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사후 2년 만에 발견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웃과 단절된 채 고립무원 상태에서 죽어간, 그리고 오랜 세월 방치된 죽음. 죽어서도 고독한 사람들! 고독사 원인으로 지은이는 핵가족화, 노후의 독립생활 고집, 요양 시설비용 부족 또는 시설 부족 등을 제시한다.
 
"50-60대 남성, 발견 시점은 사후 3-6개월, 발견자는 갑자기 늘어난 해충과 고약한 냄새로 변고를 눈치챈 집주인 또는 수도 검침원이나 신문 배달부."(19쪽)

고지마 미유가 말한 가장 많은 고독사 유형이다. 빈 도시락과 술병이 대량으로 쌓인 방에서 발견되는 중장년 남성들의 고독사 현장. 쓰레기로 둘러쳐진 이불 위에서 죽어간 사람들.

쓰레기와 고독사

고독사를 맞은 사람들 상당수가 쓰레기와 함께 발견된다고 한다. 8톤, 그러니까 8천 킬로그램의 쓰레기를 배출한 현장도 있다고 지은이는 기록한다.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깔끔한 여성들 가운데도 쓰레기 더미에서 죽은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접객업이나 격무(激務)에 시달리는 사람, 예컨대 변호사, 간호사, 술집 종업원 등이 많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치매나 발달장애로 정리정돈이나 분류가 어려운 사람, 수집벽이 있는 사람, 애초부터 정리방법을 모른 채 혼자 살기 시작한 20대"(41쪽) 등도 쓰레기 더미와 함께 지내는 대표적인 사례다. 쓰레기는 대개 창가나 벽부터 쌓이기 시작해서 점차 방 가운데로 영역을 확장하여, 이불 주위까지 점령하게 된다고 한다.

쓰레기가 주인이 되어버린 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남모르는 애틋한 사연이 있다. 고지마 유지는 "소중한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으로써 생겨난 우울증, 가족의 사고사, 아끼던 반려동물의 죽음"(44쪽) 따위를 거명한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실로 완전히 무기력해진 사람들의 고달픈 일상이 눈에 밟힌다.

유품정리와 친구들

지은이는 스물두 살 때부터 유품정리인으로 살고 있다. 아버지의 돌연사와 '그저 청소만 하는 회사가 아니다!' 하는 구인광고를 통해 유품정리와 특수청소의 길에 접어든 독특한 청춘. 그녀는 유품정리인의 기본적인 자세를 지적한다.
 
"유품을 정성껏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고인이 꼼꼼하게 챙겨둔 귀중품(통장이나 부동산 매매 계약서)을 산더미 같은 처분 물품 사이에서 찾아내 유족에게 건네는 것도 중요한 임무다. 이런 일을 해내지 못하면 제대로 된 유품정리인이라 할 수 없다." (69쪽)
 
유품을 정리하다 보면 열에 여덟 번은 고인의 친구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이나 평소 노리고 있던 물건을 챙기려고 등장하는 옆집 사람이나 이웃 주민이 친구랍시고 나타난다는 얘기다. 보석이나 가구를 노리고 중년 여성들이 단체로 몰려든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오르탕스 부인의 사후 풍경이 떠오른다.
 
"이 일을 하면서 괴로운 점은 오물도 극심한 악취도 벌레도 아니다. 인간의 이면(裏面)이 드러나는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저 물건이 되고, 돈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83쪽)
 
자살과 반려동물

고독사의 사인(死因) 가운데 자살비율이 11%로 상당히 높다. 자살로 인한 고독사는 심장마비나 심근경색 혹은 뇌경색 등으로 인한 돌연사나 병사로 인한 고독사와 의미가 다르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그녀는 자살을 선택하는 순간,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죽이게 된다면서,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살자들이 접착테이프로 벽에 남긴 구절이 아프게 다가온다. "먼저 죽어서 미안해, 슬프게 해서 미안해, 폐 끼쳐서 미안해." 그들의 책장에는 종교 서적이나, 사후세계에 관한 서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삶을 생각한 사람들.

고독사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과 함께 발견되는 반려동물에 대한 지은이의 애틋한 배려도 우리를 따사롭게 감싼다. 주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방치돼버린 개나 고양이들. 고지마 유지는 이렇게 말한다.
 
"주인과 반려동물의 시간은 동시에 끝나지 않는다. 아끼는 반려동물의 행복을 바란다면, 자신이 죽은 뒤까지도 생각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120)
 
기특한 청춘, 고지마 유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후 고지마 유지는 죽음이 누구에게나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유품정리 관련 인터넷검색을 하다가 의뢰인의 불쾌한 경험담을 접한 그녀는 그 일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혈육을 잃어본 내가 유족의 감정을 헤아리고,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그녀.

지극 정성으로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고, 사체가 남긴 흔적을 특수청소로 철저히 치우는 고지마 유지. 그녀는 자신의 업무를 간명하게 정리한다.
 
"누군가의 심경을 정리해서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해주는 귀한 일!" (137)
 
연간 370건 정도의 고독사 관련 유품정리와 특수청소를 하면서 고독사가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다는 고지마 유지. 고인을 가족처럼 여기고, 그들이 안심하고 저세상으로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특한 청춘. 고독하게 죽은 사람들이 남긴 방과 유품을 미니어처로 제작해 고독사의 현황과 문제점을 일깨운 젊은이.

거대 자본가도, 절대 권력자도 끝내 피하지 못한 죽음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시간이 멈춘 방>. 두껍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20대 청춘이 신중년인 나를 가르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뿌듯하다.

덧붙이는 글 | <시간이 멈춘 방>, 고지마 미유 지음, 정문주 옮김, 더숲, 2020.


시간이 멈춘 방 - 유품정리인이 미니어처로 전하는 삶의 마지막 이야기들

고지마 미유 (지은이), 정문주 (옮긴이), 가토 하지메 (사진), 더숲(2020)


태그:#고독사, #고지마 유지, #시간이 멈춘 방, #유품정리, #특수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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