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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0월 28일, 신경영 20주년 만찬 당시 이건희 회장의 모습.
 2013년 10월 28일, 신경영 20주년 만찬 당시 이건희 회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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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이건희를 알고 있는 걸까?'

25일 낮 스마트폰 화면에 뜬 '이건희 회장 별세'라는 속보를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부랴부랴 책장 뒤쪽에 쌓여있던 자료와 책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이 회장을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때는 지난 2013년 10월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였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 20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수백여명의 삼성 임원들이 모여 들었고, 호텔 안과 밖은 지난 20년 이건희 시대를 찬양하는 그림과 글로 가득차 있었다. (관련기사: 위기와 책임 강조 이건희 "지역사회와 상생해야"

기자들도 많았다. 이 회장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때문이다. 이 회장 역시 언론 앞에선 자신의 생각을 꺼리김 없이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날 삼성쪽에선 기자들의 이 회장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수행원과 홍라희 여사와 함께 천천히 호텔에 들어선 그는 아무런 말 없이 행사장으로 향했다.

이날 행사를 마치고 그는 외국으로 나간 후, 그해 12월 말께 귀국했다. 이듬해 1월 2일 신년하례회와 삼성인상 시상식(9일) 참석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4개월 후 그는 심근 경색으로 쓰러졌고, 6년이 넘는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왕따와 이지메… "나는 유치원때부터 혼자였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년시절 사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년시절 사진.
ⓒ 삼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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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회장의 어린 시절은 한마디로 '고독'이었다. 초등학교 때 여섯 번이나 학교를 옮겼고, 5학년 때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1년까지 3년을 다녔다. 그곳에서 '조센징'이라며 이지메를 당하기도 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그는 민족차별과 분노, 외로움 등을 느꼈고, 결국 아버지를 졸라 서울 사대부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고독은 계속됐다. 오히려 그의 서툰 한국 발음과 무의식적인 일본식 태도를 두고 '일본놈'이라는 놀림을 받아야 했다. 한국 학교에서도 '왕따' 신세였다. 그는 "친구가 거의 없다. 성격도 그렇고, 사회에 나와서는 그럴 시간도 없었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혼자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훗날 이건희의 경영 스타일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스스로 밝혔듯이,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로 영화를 봤다. 초등학교 3년동안 무려 1300편의 영화를 보고, 지하 공간에 1만 개가 넘는 비디오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 회장을 소개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야기다.

또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이 취미였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에 다닐 때도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는데, 그 이유가 차를 분해하고 조립해 연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훗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이끌어 낸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 강한 집중력과 집착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1993년 신경영 회의에서 보통 8시간 이상씩 꿈쩍하지 않고 회의를 진행하자, 참석 임원들은 회의 전날부터 식사량을 조절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그의 엽기스러운(?) 발언들도 회자됐었다. 1993년 7월 오사카 회의에서 "한 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극복해 봐라.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고 재미를 느낄 것이다.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책 <이건희 시대>에서 "이건희는 어려서부터 특수한 환경에서 특수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데다, 그렇게 자란 극소수 사람들 중에서 워낙 특수한 성격을 가졌다"고 적었다. 이어 "이 때문에 인간에 대한 기존 지식으로는 파악이 잘 안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회장 취임 후 불면증과 절박함... 프랑크푸르트 선언 나오던 날
 
 1987년 삼성그룹 회장 취임 당시 이건희 회장의 모습.
 1987년 삼성그룹 회장 취임 당시 이건희 회장의 모습.
ⓒ 삼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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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선대회장의 사망으로 그룹 회장자리에 오른 그는 곧장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이 회장은 이듬해인 1988년 '제2 창업'을 선언하고,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50년에 걸친 '이병철의 삼성'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이 회장도 자신의 책에서 "92년 여름부터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불고기 3인분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식가인 자신이 식욕이 떨어져 하루 한 끼를 간신히 먹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몸무게도 10킬로그램 이상 줄었다고 했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비행기 안. 이 회장은 삼성 제품의 품질과 디자인, 소통 문제 등을 다룬 한편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임원 회의를 지시했다. 이른바 그 유명한 '신경영' 선언의 출발이었다. 

그룹 핵심 경영진 200여명이 6월 7일 캠핀스키 호텔에 모였다. "나부터 변해야 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 회장의 말과 함께 시작된 간담회는 이후 68일동안 독일·영국·일본 등을 돌며 진행됐다. 이 기간동안 이 회장은 1800여명의 임직원을 만나고, 350시간의 대화를 이어갔다. 사장단과는 800시간에 걸쳐 토론을 벌였다.

이 회장은 자신의 책에서 "비싼 돈을 들여가며 해외에서 간담회를 한 것은 국내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보자는 뜻"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세계 시장에서 삼성제품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했다. 또 회의 자리에서 삼성의 상황을 변명하는 임원을 두고, 그 자리에서 퇴장시키면서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그 임원은 물론 회사를 떠났다. 

은둔의 제왕, 마니아형 파괴적 혁신가
 
 2010년 1월 8일 CES 2010 행사에 참관한 이건희 회장.
 2010년 1월 8일 CES 2010 행사에 참관한 이건희 회장.
ⓒ 삼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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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식 신경영은 바로 현장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세탁기 생산라인을 시작으로 불량품이 나오면 해당 생산라인을 모두 정지하고, 불량원인을 해결한 뒤에 재가동하게 했다. 일명 '라인 스톱제'였다. 이를 통해 1993년 삼성전자 불량률은 제품별로 전년에 비해 50퍼센트까지 줄었다. 1995년 3월 구미공장의 '무선전화기 화형식'은 품질 경영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내부 조직문화도 변화를 꾀했다. 대표적인 것이 7-4제였다. 오전 7시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것이었다. 당시만해도 파격적인 노동시간 변화였다. 오전에 업무에 집중하고 오후에 자기계발에 신경쓰라는 취지였지만, 현실은 오히려 '7시 출근, 10시 퇴근'이라는 비아냥 속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의 내부혁신과 품질경영은 이후 글로벌 경쟁시장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미국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지는 이 회장을 두고 '은둔의 제왕'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그의 독특한 경영철학과 리더십이 삼성전자의 성공신화를 이끌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실제 이 회장의 업적은 삼성전자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1990년 4조5000억원 수준이던 삼성전자 매출액은 1995년에 16조원, 2000년에 34조원, 2005년에 80조원을 거쳐 2019년에 230조원으로 뛰었다. 30여 년 만에 50배 이상 늘었다. 영업이익도 마찬가지였다. 90년대 초 고만고만한 아시아 전자 기업은 30년이 채 안돼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거대 기업과 견주는 유일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같은 성장은 반대로 일본 전자업체들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90년대 말부터 미쓰비시 전기를 비롯해, 히타치, 후지쓰, 엔이씨(NEC) 등 내로라는 기업들이 반도체와 전자 사업에서 철수했다. 일본 가전기업의 대표격인 샤프, 파나소닉, 소니까지 앞질렀다. 야나기마치 이사오 게이오대학 교수는 2015년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에서 "(이건희 회장은) 오너 경영자로서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이면서 카리스마를 갖춘 세계적인 기업인"이라고 평가했다.

재계에선 이건희식 경영을 두고 '마니아형 파괴적 혁신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회장 스스로 제품이나 전자기기 등에 마니아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파괴적 혁신'은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크리스 텐슨 교수가 '혁신기업의 딜레마'에서 쓴 말이다. 후발 사업자가 아무리 저가 시장이라도 지금까지 소비하지 않던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렇게 성공한 사례가 바로 삼성전자의 휴대폰과 텔레비전이었다. 

황제경영 그리고 정경유착과 삼성공화국

하지만 이건희식 경영의 그늘도 분명했다. 7-4제의 실험은 결국 10여 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회장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밀어붙인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다. 삼성자동차 사업의 실패는 그룹의 존폐 위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자동차 마니아로 잘 알려진 이 회장의 관심으로 당시 자동차가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변했고, 그룹 차원의 인적·물적 자원이 총망라됐다. 

자동차 사업은 1년 만에 장부상으로 3조70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봤다. 삼성 자동차와 상용차 등은 파산의 길로 접어 들었고,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또 삼성은 내부적으로 손실 상당부분을 그룹 계열사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으로 메웠다. 당시 삼성에서만 6만여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결국 결정은 이 회장이 내리고, 책임은 계열사 직원들이 떠 안고, 손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자동차 사업 이외 미국의 컴퓨터 회사인 에이에스티(AST)를 인수했다가 1년 만에 1조3000억원을 날리고, 얼마 못가 회사를 청산하기도 했다. 이밖에 일본의 유니온 광학, 럭스맨 등을 인수해 헐값 매각하거나 청산했다. 또 명품 시계사업에 진출하겠다면서 유럽의 롤라이·피케레 등을 인수했지만, 이 역시 제대로 운영해보지도 못하고 철수했다.

전직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내부적으로 여러 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당시에는 그런 문제를 제기할 형편도,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이 회장의 삼성시대는 정치·사회적으로도 큰 논쟁을 불러왔다. 전방위적인 뇌물과 정치자금 제공은 정경유착의 폐해를 불러왔고, 세금 없는 부의 세습과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 노조 설립 방해와 무노조 경영 등으로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 회장은 과거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인정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지난 2005년 이른바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석 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삼성 2인자였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나눈 대화를 국가안전기획부(당시 안기부)가 도청하고, 그 내용이 언론에 공개된 것. 삼성이 '떡값'과 '정치자금'으로 정치권 뿐 아니라 검찰 등 정관계 인사들을 '삼성맨'으로 포섭하는 정황이 담겨 있었다. 

편법과 탈법적인 세습 경영 논란은 여전… 삼성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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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는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이 불법 비자금을 조성해 정관계에 광범위한 로비를 벌여왔다고 폭로했다. 이 회장은 다음해 삼성특검을 통해 조세포탈 등으로 실형을 선고 받았고, 대국민 사과와 함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때 단독 특별사면을 받고, 2010년에 다시 화려하게 경영에 복귀했다.

김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 책에서 "삼성 비리를 수사하겠다던 조준웅 특검은 차명으로 관리돼온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을 모두 이 회장의 몫으로 인정해 줬다"면서 "도둑에게 장물을 준 셈"이라고 비판했다.

삼성공화국으로 일컬어지는 삼성의 초법적인 행위의 바탕에는 이씨 총수일가의 경영권 세습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적은 지분으로 수많은 그룹 계열사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편법과 탈법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회장 역시 아버지인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을 때 공익법인을 이용한 편법적인 방법이 동원됐다. 이 회장이 당시 11조5000억원에 달하는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냈던 세금은 181억원이었다.

이 회장도 아들 이재용 부회장 등 세 자녀에게 '세금 없는 부의 세습'을 이어갔다. 이 부회장은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60억8000만원을 받고, 증여세 16억원 낸 것이 전부다. 나머지 45여억원을 바탕으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과 삼성 에스디에스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배정 등의 방식으로 수백조원의 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후 이 부회장은 에버랜드의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삼성물산 등과의 합병을 통해 사실상 승계작업을 마무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수사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 사건으로 이 부회장은 다시 법정에 서게 됐다. 그는 뒤늦게 4세 세습경영과 무노조 경영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2008년 이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약속한 순환출자 해소와 지주회사 전환 등의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삼성은 올해로 창사 82년째를 맞는다. 이건희 시대를 지내면서 삼성은 사실상 글로벌 톱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와 함께 우리 안의 삼성은 욕망의 또 다른 상징이 됐다. 일반 공산품은 말할 것도 없고, 주택과 교육, 의료 등에 이르기까지 삼성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일부에선 '삼성이 하면 다르다'는 삼성 근본주의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건희 시대가 저문 지금, 삼성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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