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1 11:49최종 업데이트 20.10.3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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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씨'란 용어는 1979년 10·26 사태 뒤에 전두환·노태우로 대표되는 신군부가 대권주자들인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한꺼번에 청산할 의도로 많이 사용했던 용어다. 신군부의 조직체인 민주정의당(민정당)도 1990년 3당 합당으로 김영삼·김종필과 함께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든 뒤에 김영삼의 대권 가도를 막을 목적으로 3김 청산론을 유포했다. 이는 상대 진영인 김대중을 견제하는 데도 동시에 활용됐다.

20세기 후반의 보수 세력은 '3김 시대가 한국 정치를 퇴행시켰다'라면서 이 시대가 1970년대에 개막된 것처럼 선전했다. 이들의 논리를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의 1997년 11월 1일 자 칼럼 '3김으로 보낸 33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칼럼 내용을 보면, '33년'은 김대중 주필이 기자생활을 시작한 1965년부터 1997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1960년대에 3김 시대가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제목을 달았다. 그런 뒤에 본문에서는 3김 시대의 출발점을 1971년으로 잡았다. 그가 제시한 논리는 다음과 같이 상당히 빈약하다.
 
65년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내가 처음으로 맞이한 본격적인 대통령 선거는 71년 선거였다. 그때 우리 언론은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야당 붐을 조성했다. 40대 기수의 대상 인물은 김영삼(당시 43세), 김대중(48세), 이철승(49세)씨였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해 선거유세에 나섰던 김종필(45세)씨도 거기에 포함됐다. 나의 기자 생활은 바로 이들 '3김'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게 아니라 대통령 선거 유세를 도운 김종필까지 포함해서 3김 시대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 시기 여야의 유력 정치인 중에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있었다는 이유로 3김 시대가 그때 시작된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사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여야 정치를 주도한 것은 이들이 각각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을 이끈 1987년 6월항쟁 이후였다. 그런데도 20세기 후반의 보수 정치인들은 '3김시대 30년 혹은 40년'을 운운했다. 1995년 9월 16일 자 <조선일보> 기사 '대권후보 예상자 내년 총선 때 윤곽'에 따르면, 김윤환 민자당 대표위원은 그 전날의 기자간담회 때 "3김 정치가 30~40년간 유지되는 것은 정치발전이나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도움 되지 않는다"라고 발언했다.


1970년대 정치를 주도한 인물은 3김이 아니라 박정희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 개헌을 통해 군주나 다름없는 지위를 차지했다. 박정희가 주도하고 박정희가 퇴행시킨 1970년대에 3김 시대가 개막했다고 말하고 3김 때문에 정치가 퇴행했다고 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논리는 3김을 견제하는 신군부와 민정계의 이익에 부합할 뿐이었다.

3김이란 왜곡된 논리에 가려진 인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1995.12.12 ⓒ 연합뉴스

 
그런데 그런 왜곡된 논리로 인해 역사적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인물이 있다. 바로 위의 김대중 칼럼에 언급된 이철승(1922~2016)이다. 1970년대 야당 정치권에서는 김대중·김영삼이 아니라 김대중·김영삼·이철승이 대표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양김이나 3김이라는 잣대로는 해석할 수 없는 구도가 야당 정치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철승은 이승만·박정희 때 열혈 투사로 활약했지만 어느 순간 빛이 바래지면서 희미해지다가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총선을 계기로 제도 정치권에서 멀어졌다. 그 뒤로는 극우논객으로 활동하다가 김대중 정권 때 햇볕정책을 열렬히 비난하면서 보수언론의 환영을 받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SNS 발언이 보수 언론에 의해 부각되고 있듯이, 김대중 정권 때는 이철승의 극우적 발언들이 보수 언론에 의해 활용됐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1999년에 <열린 전북> 통권 제2호에 기고한 '전북 인물탐구: 한국 야당의 거목 이철승'에서 "국가안보 상업주의를 실천하는 <조선일보>가 그 목적으로 순수한 이철승씨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보수 언론들이 햇볕정책을 비판하고자 이철승의 발언을 부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판에는 보수 언론에 이용되고 말았지만, 이철승의 인생 역정은 시선을 끌어당길 만한 강렬함으로 가득했다. 3·1운동 3년 뒤인 1922년 서울에서 출생한 뒤 전북 전주에서 성장한 그는 전주고등보통학교(중학교) 시절부터 항일 운동과 강제징병 반대 운동으로 식민당국의 주목을 받았고, 해방 뒤에는 4개국 신탁통치에 맞서는 반탁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한국전쟁 때는 학도의용군을 편성해 참전하기도 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싸우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반기를 든 그는 1954년 제3대 총선 때 전주에서 당선된 일을 계기로 이 지역에서 7선 국회의원이 됐다. 1960년 4·19 혁명 때는 거리로 뛰어나가 이승만 정권을 규탄했고, 1961년 5·16 쿠데타 뒤에는 박정희의 회유를 거부하고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이력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단순한 '거목'이 아니라 '강경하고 단단한 거목'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국주의에 맞서고, 해방 직후에는 미·영·중·소의 신탁통치에 맞서고, 그 뒤에는 독재 정권들에 맞섰던 그의 정치인생이 급격히 기울게 된 데는 김대중·김영삼과의 관계가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망명 생활을 끝내고 1960년대 후반에 야당 지도자군(群)으로 복귀한 이철승은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김과의 운명적인 대결에 뛰어들었다. 김영삼이 제기한 40대 기수론에 힘입어 김대중·이철승도 후보 경선에 뛰어들면서 생긴 일이다.

이철승은 김대중보다 김영삼을 더 의식했다. 이철승뿐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래서 이철승 역시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을 더 의식하면서 경선 구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진산 신민당 총재가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경선 판도가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전당대회 당일인 1970년 9월 29일에 일부 석간 신문이 발행한 '김영삼 후보 지명'이란 기사가 전당대회장에 살포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대세는 김영삼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이철승은 김영삼과의 대결을 포기하고 대회 개막 선언 뒤에 사퇴를 선언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 재석 885명 중에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라는 결과가 나왔다. 김영삼이 1위를 하기는 했지만, 당초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과반 이하 득표가 나온 것이다. 무효 82표는 이철승 지지표였다. 당 총재의 김영삼 지원에 대한 반발 성격의 표였다.

이런 결과가 나오자 "이제 대통령 후보는 접니다"라고 고함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김대중 후보였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이 외침으로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 외침은 2차 투표에서 그대로 현실화 됐다. 재석 884명 중에서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무효 16표로 집계됐다. 이철승 표가 김대중 쪽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철승이 김대중을 지지해준 것은 일차적으로 김영삼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또 김대중이 자신과 같은 민주당 신파 때문이기도 했다. 1955년 출범 당시 민주당은 구파로 분류되는 기존의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과 신파로 분류되는 자유당 탈당파 및 흥사단 출신들의 연합세력이었다.

이철승은 구파인 김영삼을 견제하고 같은 편인 김대중과 손잡으면서 '다음 총재 선거 때 이철승을 지지한다'는 각서를 2차 투표 직전에 받았다고 <김대중 자서전>은 말한다. 하지만 김대중은 이 각서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 1971년 4월 대선 3개월 뒤에 열린 7월 20일 신민당 총재 선출 전당대회 때 이철승이 출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YS와 DJ, 이철승의 착각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가 지난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찾아 조찬 회동에 앞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이철승은 김영삼을 견제하기 위해 김대중을 밀어주었지만 1971년 대선 이후의 상황은 이철승에게 다소 의외로 전개됐다. 김영삼을 견제하고자 밀어준 김대중이 김영삼보다 훨씬 더 거대한 인물로 급성장했던 것이다. 이철승이 김대중의 잠재력을 정확히 평가했다면 1970년 경선이 다른 결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철승의 정치인생은 1979년에도 두 김씨와 얽혔다. 1976년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총재)이 된 그는 방어전인 1979년 총재 선출 전당대회 때 김영삼과 격돌했다. 이때 김대중은 출마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중의 적극 개입이 총재 선거에 영향을 미쳤고, 이것이 김영삼 당선이라는 결과로 연결됐다. 선명 야당의 길을 걸으려면 김영삼을 지지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판단이 낳은 결과였다.

김대중 입장에서는 1970년 전당대회 때의 은혜를 갚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사정이 있었다. 1972년 이후의 유신체제 하에서 이철승이 중도통합론이라는 모호한 노선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이철승이 이상해졌다는 점은 그의 인터뷰 발언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1975년 3월 31일 자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 '이철승 국회 부의장' 편에서 이철승은 유신반대 투쟁을 겨냥해 "야당은 이제까지의 극한적이고 원시적인 투쟁을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한 뒤 "여야가 극한적 감정론이나 강경론을 지양, 대화와 토론을 통해 민주·민족·대동(大同)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라면서 "이것이 바로 중도통합론이다"라고 역설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을 완화하고 박 정권과 협력하자는 주장을 전개했던 것이다.

항일투쟁, 반탁투쟁, 한국전쟁 의용군 활동, 반독재 투쟁과 더불어 정계은퇴 뒤의 극우논객 활동에서 일관되게 표출되는 공통점은 이철승의 강렬함이다. 국회의원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일세를 풍미하는 극우 행동가가 됐을 수도 있는 인물이다.

그런 강직한 유형의 인물이 온건론자나 중도론자로 돌변하는 일은 흔치 않다. 사상이나 이념은 바뀔 수 있어도 강경한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신체제 하에서 이철승이 보여준 행보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박 정권의 회유를 거부하며 망명 생활까지 했던 이철승은 박 정권 후반기인 유신 시절에는 이처럼 시대에 역행하는 중도통합론을 외치며 독재정권과의 조화·상생을 부르짖었다. 이로 인해 그가 사쿠라라는 말을 듣게 됐으니, 김대중이 1970년 일에 신경 쓰지 않고 김영삼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보다 김영삼을 더 의식했던 이철승은 김대중이 이철승 자신과 김영삼보다 훨씬 더 거대한 정치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을 뿐 아니라 1979년 전당대회 때는 김대중의 김영삼 지원으로 인해 쓴맛을 보기까지 했다. 김대중으로 인한 이철승의 상처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1988년 총선을 계기로 정치권 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도 김대중과 관련이 있다.

이철승은 전주에서만 일곱 번 당선됐다. 이처럼 아성이라 할 수 있는 전주에서 그는 치욕적인 최후의 참패를 당했다. 13대 총선 때 전주시을 선구에서 평화민주당 손주항(77.5%)과 민정당 태기표(11.1%)에 이어 9.8%로 3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지역감정이 극심했던 제13대 총선 때 그는 자기 아성인 전북 전주에서 민정당 후보한테도 뒤졌다. 거기다가 득표율은 10%도 안 됐다. 제12대 총선 때 48.2%로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50~70%의 득표율로 6번이나 당선됐던 그가 너무 초라하게 꺾인 것이다. 재기의 의지를 꺾는 치명적인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와 관련해 위의 강준만 기고문은 "흔히 '황색 바람'으로 표현되던,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호남인들의 한으로 뭉쳐진 바람이 그의 아성이라 할 전북 지역마저 강타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호남과 영남 간의 영호남 지역감정에 기울어 있었던 전북 유권자들이 전남 출신 김대중을 중심으로 뭉침에 따라 전북 출신 이철승이 외면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뒤 이철승이 극우적인 반공을 주장함과 더불어 지역감정 타파를 크게 외친 데는 이 같은 사연도 작용했다고 위 기고문은 말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김 시대가 1970년대에 시작했다'는 20세기 후반의 인식은 1970년대 유신체제의 해악을 덜 드러내는 측면이 있는 동시에 야당 정치권이 김대중·김영삼·이철승의 3파전에 의해 전개됐다는 사실을 덮는 측면이 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철승이라는 정치인은 좀 더 적극적으로 조명돼야 할 인물이다. 그의 활약이 덜 부각되는 그동안의 현대사 서술로는 20세기 후반의 한국 정치를 충분히 조명할 수 없게 된다.

이철승은 김영삼을 더 의식했지만, 이철승의 발목을 잡은 것은 김영삼이 아니라 김대중이었다. 이철승은 유신체제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김대중의 공격을 자초하고 말았다. 훗날 그가 보수 언론에 이용을 당하면서까지 김대중 햇볕정책의 열렬한 비판자가 된 데는 이런 사연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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