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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경남 창원진해에 있는 '시월유신탑', 마산합포구 현동 동전고개에 있는 '유신동산' 표지석, 마산합포구 회원2동 회원천 옆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
 왼쪽부터 경남 창원진해에 있는 "시월유신탑", 마산합포구 현동 동전고개에 있는 "유신동산" 표지석, 마산합포구 회원2동 회원천 옆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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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48년 전 박정희 유신독재 시작된 오늘, 그 '기념탑'이 아직도 있어" http://omn.kr/1pqvu

41년 전 10월 26일은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사망한 날이다. 1979년 10월 16~20일 부산과 마산(창원)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고 보름 정도 지나서 박정희는 죽었다.

<오마이뉴스>는 박정희가 10월 유신(1972년 10월 17일)을 선포했던 날에 맞춰, 지난 17일 창원진해에 '시월유신탑'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이후 기자는 한 독자로부터 "창원에 또 있다"라는 제보를 받았다. 여전히 지역에 '유신동산'과 '5․16군사혁명 기념비'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수소문 끝에 두 곳을 찾아냈다. 유신동산 표지석과 5․16군사혁명 기념비가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유신동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출 기념해 세워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동전고개에 있는 '유신동산' 표지석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동전고개에 있는 "유신동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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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동전고개에 있는 '유신동산' 표지석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동전고개에 있는 "유신동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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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동산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동전고개에 있다. 표지석 앞면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글자가 많이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지만 누가 언제 세운다는 내용이 남겨졌다.

유신동산은 1977년 12월 만들어졌다. 열린사회희망연대가 오래 전 작업해둔 표지석 뒷면 탁본을 보면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유신동산 표지석은 '국민회의 마산지역 대의원'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국의 무궁한 번영과 평화의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우리들은 삼가 여기에 동산을 세우노라. 서기 1977년 12월 ⃝일. 국민회의 마산지역 대의원. 백찬기, 윤영준, 이성훈, 조수옥, 최위승, 고진규, 김영관, 김인택, 김종옥, 이창호, 안광호, 김형배 김종락."
 
국민회의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말한다. 유신헌법에 의해 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총선거가 치러졌고, 전국 2359명의 대의원이 대통령(박정희)과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뽑았다. 대의원 임기는 1978년 12월까지였다. 이를 기념해 마산지역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유신동산을 조성한 뒤 표지석을 세워 놓았던 것이다.
      
[5․16군사혁명 기념비]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찬양"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회원2동 회원천 옆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회원2동 회원천 옆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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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혁명기념비는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회원2동에 있다. 도심 하천인 회원천 바로 옆 느티나무 아래에 있다. 이 기념비는 1961년(단기 4294년) 8월 15일 회원동 난정회가 세운 것으로 기록됐다.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겨져 있고, 그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세상의 잘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늘 있어 왔고, 시대를 구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가 있어 왔다. 간교하게 무리를 짓고, 방자한 세력이 재앙을 부르는 것을 우리 군대가 나서서 위무도 당당하게 깃발을 들어서 사악함을 덮어 버리고, 강한 기세로 가시덤불을 뽑아 버리고, 넘어지고 쓰러진 자들을 일으켜서 혁명을 성공 시켰다. 이에 위대한 공적과 명성에 대한 큰 여론이 넘쳤고, 여러 (사람이?) 나에게 문장을 의뢰했다. 그리하여 비석에 글을 새기어 후대가 잊지 않도록 증표를 남긴다. 교하 노재수 지음."
 
한때 지역에서는 이 비석을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열린사회희망연대가 1999년 10월 17일, 비석을 넘어뜨리고 일부 글자를 정으로 쪼아 뭉개버리기도 했다.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일 때였다.

이 단체는 당시 보도자료를 통해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다"며 "5․16군사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찬양하고 기리는 기념비가 아직도 건재해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단체는 "유신독재 권력에 맞서 마산시민들이 분연히 일어선 부마항쟁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제 더 이상 반역과 독재의 잔재가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뒤 기념비는 다시 세워졌고, 마산시 회원2동민(대표 보존회장 하문식)는 그 옆에 안내판을 세웠고, 이는 글자가 뭉개진 채 아직도 있다.

이 안내판은 "영광의 역사든 오욕의 역사든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기 때문에 길이 보존해 반면교사로 나라 발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동민이 이 자리에 다시 세웁니다"라고 말한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회원2동 회원천 옆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의 안내판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회원2동 회원천 옆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의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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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회원2동 회원천 옆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회원2동 회원천 옆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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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00년 5월 16일 '민주시민 516인 일동' 명의로 그 옆에 "5․16 기념비의 안내문"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 이 안내문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516인의 이름이 새겨진 이 안내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5.16군사쿠데타는 마산의 3.15의거가 촉발시킨 4.19혁명 이후 막 피어나는 민주주의의 싹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3.15마산의거와 10.18부마민주항쟁 등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우리 고장 마산에서 3.15와 4.19를 뒤엎은 5.16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찬양하는 기념비가 많은 주민이 왕래하는 길가에 38년 동안 버젓이 서 있었다는 것은 마산시민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열린사회희망연대 회원들은 이 비를 쓰러뜨려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했다.

물론 오욕의 역사도 역사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할 때는 지난 오욕의 역사가 지금은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후대 사람들이 그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비는 5.16 당시 모 부대 사단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노씨 성을 가진 장군의 집안에서 군사 쿠데타 세력에게 더할 나위 없는 찬사를 바치는 글을 지어 이 비에 새겼다. 이 비를 세운 '난정희'는 그 집안 화수회의 명칭이었고 이후 그 장군은 승승장구 출세의 길을 달려 온갖 영화를 한 몸에 누렸다. 따라서 이 비는 그 당시 회원동 주민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세워진 것이었고 비문 어디에도 회원동 주민들이 세운 것이라는 글귀는 없다.

이런 사실을 기록해 후세에 알리고자 이 안내문을 세운다. 2000년 5월 16일. 민주시민 516인 일동."
      
[시월유신탑] 진해 아이세상장난감도서관 뜰에 잔존

'시월유신'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념탑은 현재 창원진해 아이세상장난감도서관 뜰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탑은 1973년 옛 진해시가 육군대학 앞 삼거리에 높이 9m로 세웠는데, 교통체증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있어 1976년 높이 3m로 축소해 진해시립도서관 뜰로 이전했던 것이다.

도서관은 이후 이전했고, 건물은 장난감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형물은 학생과 남성 회사원, 여성, 해군 모습을 한 4명이 유신헌법을 떠받들고 있는 형상이다. 10월유신 기념탑도 한때 철거 여론이 높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안내판 하나 없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경남 창원진헤 '창원시 아이세상 장난감도서관' 뜰에 있는 10월유신 기념탑.
 경남 창원진헤 "창원시 아이세상 장난감도서관" 뜰에 있는 10월유신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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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로든 역사적 표시가 있어야"

이런 가운데 지역 안팎에서는 창원에 있는 '10월유신 기녑탑'과 '유신동산' 표지석, '5․16군사혁명 기념비'를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원오 경남진보연합 대표는 "놀랍다. 창원에 박정희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조형물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3개나 있다는 사실에 아연 실색할 따름"이라며 "더군다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찬양 위주의 조형물이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시민운동단체도 많고, 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도 있는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만간 여러 단체와 논의를 거쳐 박정희 찬양 조형물의 철거에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5.16군사혁명 기념비' 문제는 1999년 당시 한바탕 논란을 빚다가 이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은 23일 전화통화에서 '기념비 철거 운동'이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를 밝혔다. 다음은 김 고문과 나눈 대화다.

- 유신 잔재 청산운동을 왜 계속하지 않았는지?
"열린사회희망연대가 유신잔재 청산운동을 할 때(1999년 5.16군사혁명기념비 철거 투쟁)가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시민단체로서 민주항쟁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했던 일들이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은 기념사업회가 없었다. 이후 관련 단체가 생겨 우리가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실무자 한명을 쓰기도 힘든 작은 단체라서 자체 사업만해도 늘 버거운 형편이다."

- 오욕의 역사도 역사인데 그냥 두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때도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걸 그냥 둔다고 교훈이 되느냐. 오욕의 역사가 만든 산물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무슨 표시가 있어야 한다. 가만히 손도 안대고 그냥 두는데 무슨 교훈이 되느냐. 그래 그 기념물들이 지금까지 시민들에게 교훈이 됐다면 우리 지역의 정치적 분위기가 지금과 같을 리가 없을 것이다."

-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지?
"많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바로 잡아나가야 할 게 있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안가인 궁정동에서 심복인 김재규의 총격에 사망한 것을 모두 '시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해'라는 단어는 왕조시대 임금이 살해 당했을 때 쓰는 용어다.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단어다. 객관적인 단어는 '사망'이다. '총격에 의한 사망'이다.

지금 우리가 대통령이 식사하는 것을 '수라를 든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수구세력의 저항을 두려워 피하지 말고 우리가 제대로 된 단어부터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단어 하나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할 때가 많은 것이다. 나중에 후대들이 이걸 제대로 고치려면 엄청 힘이 든다. 지금 '친일청산'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회원2동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로, 1999년 10월 열린사회희망연대가 비석을 넘어뜨린 뒤 글자를 정으로 쪼아 뭉개는 모습이다. 이 비석이 이후 다시 세워져 지금까지 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회원2동에 있는 "5.16군사혁명 기념비"로, 1999년 10월 열린사회희망연대가 비석을 넘어뜨린 뒤 글자를 정으로 쪼아 뭉개는 모습이다. 이 비석이 이후 다시 세워져 지금까지 있다.
ⓒ 열린사회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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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5.16쿠데타, #유신독재, #박정희, #유신동산, #5.15군사혁명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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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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