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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갑의 자취생활. 1932.6.4 (홍성표 제공)
 강성갑의 자취생활. 1932.6.4 (홍성표 제공)
 
낙동강변 수산교 아래에는 십여 개의 달그림자가 도열해 있었다. 지휘 장교의 "앉아 쏴" 구호에 군인과 경찰 무리가 앉은 자세로 총구를 강성갑과 최갑시를 향해 겨누었다. 총구에 불이 붙으려는 순간 "마지막으로 기도하게 해주시오"라는 강성갑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휘 장교의 턱이 끄덕이자 강성갑은 기도를 시작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때 로마병정들을 위해 한 기도이다.

교육자이자 목사인 강성갑의 죽음

기도는 이어졌다. "주여! 이 겨레, 이 나라를 가난과 재앙에서 건져 주시옵시고, 한얼(중학교)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기도가 끝나자 달그림자에서 100여 발의 총알이 쏟아졌다. 마지막 기도를 한 강성갑과 같이 끌려온 최갑시는 강물에 쓰러졌고, 강물에 수백 발의 총알이 떨어졌다.

그날 38세의 교육자 강성갑은 현장에서 죽었고, 최갑시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강에서 헤엄을 쳐 사지에서 탈출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1일 밤 12시경 경남 김해군 대산면 수산리 낙동강변에서 있었던 일이다.(홍성표,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2020, 선인)

적군을 향해야 할 총구가 왜 강성갑과 최갑시라는 민간인을 향했을까? 그 두 사람을 학살하라는 결정은 4일 전인 1950년 7월 27일에 있었다. 진영읍사무소 2층에서 열린 소위 '시국대책위원회' 회의에서였다. 한얼중학교장 강성갑과 과수업자 최갑시의 생사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공산주의자 강성갑과 최갑시를 살려 둘 수는 없습니다"라는 이석흠 시국대책위원장의 말에 참석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강성갑이 왜, 무엇 때문에 공산주의자인지는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한얼중학교 교장이자 목사인 강성갑과 지역 유지인 최갑시는 시국대책위원들에게 눈엣가시였다.

진영지역의 중심인물인 강성갑을 전쟁 와중에 제거하자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논란이 없다 보니 회의는 짧게 끝났다. 회의 참가자는 위원장 이석흠을 비롯해, 읍장 김윤석, 부읍장 강백수, 지서주임(지서장) 김병희, 청년방위대장 하계백이었다.(<민주신보> 1950년 10월 1일자. 김기진 『국민보도연맹』, 2002에서 재인용)

이후 8월 1일 김병희 진영지서장은 경찰 2명을 대동하고 강성갑과 최갑시를 연행했다. 낙동강변 수산교 아래로 간 이들은 '공산주의'와는 아무 연관 없는 강성갑을 처형했다. 수산교를 비추던 달에게 부끄러운 새벽이었다.

무덤에 삐져나온 발목을 톱으로 잘라

그믐이라 달이 뜨지 않은 진영 뒷산은 캄캄했다. 김병희 진영지서장의 지시를 받은 의용경찰 강치순과 김태선, 정창현은 철사 줄에 묶인 김영명을 지서 뒷산으로 끌고 갔다.

진영지서에서 7월 말부터 15일간이나 김병희 지서장에게 취조와 고문을 당한 그녀는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오빠 김영봉이 있는 곳을 대라"는 지서장의 취조는 정상이 아니었다. 결혼한 지 여섯 달밖에 되지 않은 김영명은 진영중학교 교사로 진영 읍내에서 소문난 미인이었다.

지서장 김병희는 그녀를 취조한다는 구실 아래, 김영명 옷을 전부 벗기고 성고문을 가했다. 그녀는 지서장에게 저항하다 팔이 부러졌다. 결국 성욕을 채우지 못한 지서장은 의용경찰들에게 뒷산으로 끌고가 죽이라고 지시했다.

의용경찰들은 땅을 파고는 혼절한 김영명을 흙에 묻었는데, 김영명의 발이 꿈틀했다. "이 년이 아직도 살아 있네"라며 의용경찰 강치순은 그녀의 발목을 톱으로 잘랐다. 잘린 발도 흙 속에 같이 묻었다.(<부산일보> 1960년 5월 25일자)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나 영화 '부산행'에도 나오지 않을 장면이다. 김영명이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지서장과 의용경찰들은 악마 같은 짓을 벌였다.

그렇다면 김영명의 오빠 김영봉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26세에 일본의 대학교(메이지대학교) 정경과를 졸업한 김영봉은 밀양군에서 초동광산을 경영하다가 낙향해 진영에서 과수업에 종사했다. 1948년 9월경 남로당에 가입해 진영읍 세포로 활동했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21일 예비검속돼 당시 진영에 주둔하고 있던 해군 G-2(파견대장 김식)에 끌려갔다. 수차례 고문을 당한 그는 반죽음 상태에서 7월 26일 진영지서에 인계되었다.

김영봉은 다른 민간인 11명과 함께 트럭에 실려 진해 방향으로 이송되었다. '진해경찰서에서 조사할 게 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트럭이 덕산고개에서 멈췄다. 운전수가 "차가 고장 났다"고 하자, 군·경은 산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며 예비검속된 이들을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다.

2인 1조로 묶인 이들이 불편한 몸으로 언덕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으로 목덜미를 식힐 때, '탕'하는 소리가 났다. 빗발치는 총탄에 끌려온 이들이 짚단 쓰러지듯 했다. 그런데 이 아수라장에서 김영봉은 가슴과 다리에 3발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났다. 그러자 진영지서장 김병희는 후환을 없애려 김영봉을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 와중에 여동생 김영명은 '악마'들의 먹잇감이 됐다.

사형당한 진영지서장, 하지만... 

강성갑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경찰에게 처형된 사건은 진영지역은 물론 국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한국전쟁 초기에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수십만 명이 학살됐지만 누구 하나 문제제기하지 못한 것과는 판이했다.

강성갑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남지구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은 "가해자들은 해방 후 우익진영의 세력다툼과 물질에 눈이 멀어 한얼중학교장 강성갑과 최갑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총살했다. 철저한 조사와 군법회의 재판을 통해 처벌할 것이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어서 경남계엄사령부는 '사설 불법단체'를 1950년 10월 1일부로 해산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0월 3일 소위 '진영살인사건'에 대한 군법회의가 열였다. 강성갑과 김영명 사건은 병합심리됐으며 진영지서장 김병희 외 11명이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10월 6일까지 4일간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 김병희 지서장을 비롯한 가해자들의 범죄행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김병희 사형!"이라는 김태청(중령) 재판장의 선고에 김병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이어진 선고는 빵빵한 풍선에서 순식간에 바람이 빠진 격이었다.

시국대책위원장 이석흠, 진영읍장 김윤석, 부읍장 강백수, 청년방위대장 하계백은 징역 10년에 그쳤다. 더군다나 김영명을 직접 살해한 강치순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강성갑과 김영명을 학살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한 군인들은 법의 심판대에 오르지도 않았다. 즉, CIC와 해군 G-2의 진영 책임자와 학살 현장의 군 책임자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용두사미 재판이긴 했지만, 현직 지서장의 사형선고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김병희 지서장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국전쟁 중에 민간인학살사건의 가해자로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경남 김해군 진영지서장 김병희가 유일하다.

왜 이런 재판결과가 나온 걸까? 단적으로 말하면 강성갑과 그의 스승 원한경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이었다. 강성갑은 당시 한얼중학교 교장이자 목사였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된 일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엄청난 파장을 끼쳤다.

강성갑의 연희대학교 스승인 원한경이 팔을 걷어붙였다. 원한경은 강성갑이 죽자 "연희(연세)대가 낳은 가장 훌륭한 졸업생이 죽었다"며 탄식했다. 1942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추방당한 원한경은 일제강점기에 강성갑과 끈끈한 사제의 연을 맺었다.

원한경은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당시 '미국심리전 G-2'의 민간고문자격으로 부산에서 활동했다. 그는 강성갑 사건이 일어나자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위해 애썼다. 재판 당시 연희대 신과대학 학장 한영교가 검찰측(강성갑) 증인으로 나선 것도 원한경의 노력 덕분이었다.(홍성표.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또 미국선교단체와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RK)의 문제제기와 현장에서 살아난 최갑시의 폭로, 진영사회의 경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작용했다.(홍성표,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2020, 선인)

가해자는 한 달 만에 석방되고

계엄령 상황에서 민간인학살 가해자인 현직 지서장이 사형 당하는 초유의 상황은 한 달 만에 끝났다. 강성갑과 진영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들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한 이석흠, 김윤석, 강백수, 하계백이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여기에는 계엄사령관 김종원이 이들로부터 각각 3천 만환씩의 뇌물을 받았다는 유족 측의 주장과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강성갑을 죽인 것은 무죄여서 석방된 것이라는 가해자 측의 주장이 있다. 또 연구자들은 1950년 12월 23일 이승만이 단행한 특별사면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이승만은 '6.25 사변 이후의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 조문으로 기소된 자 중 10년 이하의 형을 받은 자에게 형을 면제'하도록 했다.
 
 강성갑 추모동상 제막식 1954.5.27 (출처:홍성표)
 강성갑 추모동상 제막식 1954.5.27 (출처:홍성표)
 
1954년 5월 27일 한얼중학교에서 거행된 '강성갑 추모 동상 제막식'에는 함태영 부통령과 이상룡 경남도지사가 참석했다. 이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강성갑이 '불법적인 희생자'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진영지역에서는 '강성갑'이라는 이름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가해자들이 이후에도 버젓이 진영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기에 '강성갑은 빨갱이'라는 논리가 반 백 년 넘게 지역사회를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명의 오빠 김영봉의 처지는 더욱 안타까웠다. 그는 1960년 4.19 혁명 후 '금창(김해·창원)장의위원회' 상담역과 '경남유족회' 부회장을 맡아 동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해 12월에는 진영읍장에 당선되어 지역민들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반국가행위'로 기소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병희를 제외한 가해자가 사면 받고, 무죄 석방되는 사이 피해자는 '빨갱이'로 규정되었고, 유가족들은 법의 심판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라도 강성갑이 왜 '빨갱이'로 치부되었는지를 진지하게 자문해보아야 할 때다.

 
 진영여중에 세워져 있는 강성갑 동상
 진영여중에 세워져 있는 강성갑 동상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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