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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흔히 '매조도'라 부른다. 1813년 작.
▲ 정약용의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흔히 "매조도"라 부른다. 1813년 작. 정약용의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흔히 "매조도"라 부른다. 1813년 작.
ⓒ 곽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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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긴 유배기간에 실로 엄청나게 많은 글을 썼다.

수 백권의 학술적인 저술은 물론 시가 2,400여 수, 산문이 15권에 이른다. 그런데 외동딸과 참수당한 셋째 형에 관한 글을 찾기 어렵다. 천주쟁이로 몰려 죽은 형에 대해서는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로서 폐족이 되고 자신과 둘째 형이 유배중인 터에 자칫 또 무슨 화를 불러올 지 몰라서 자제했을 터이다.

그런데 외동딸에 대해선 무슨 까닭일까.

1794년 3월 5일 태어난 셋째 딸은 이름도 보이지 않는다. 생후 22개월 만에 천연두로 요절한 둘째딸은 이름이 '효순(孝順)'인데, 막상 살아남은 딸의 이름은 알려진 바 없다.

그 외동딸이 결혼을 한다. 신랑은 다산초당에서 글을 배운 제자였다. 이름은 윤창모, 정약용의 아버지가 가까이 지냈던, 그래서 두 집안간에 오랜 세교가 있었던 윤광택의 손자이다.

다산 초당에서 멀지 않는 마을에 살고 있어서 글공부하고자 자주 초당에 들렀고, 마침내 정약용의 눈에 찍혔다.

"뒷날 윤창모는 학업에 열중하여 진사과에 급제해 가문을 빛내기도 했다. 결혼 뒤인 1813년 윤씨 일가들은 다산의 고향 마을 마재의 강 건너편 마을인 귀어촌으로 이사 와서 살기도 했다." (주석 13)
  
실학사상의 산실이 된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 강진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사진은 초당 바로 옆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구강포 앞바다 풍경이다.
▲ 실학사상의 산실이 된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 강진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사진은 초당 바로 옆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구강포 앞바다 풍경이다. 실학사상의 산실이 된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 강진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사진은 초당 바로 옆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구강포 앞바다 풍경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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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성장기에 아비가 국문을 당하고 이곳 저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느라 집안이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제자 중에 바른 청년을 골라 짝을 맺어주고, 「매조도」를 그리고 화제(畵題)를 지어 시집가는 딸에게 '지참금' 대신 주었다.

1813년 7월 14일 강진 다산동암에서 그리고 썼다는 「매조도」에는 4언 율시가 씌어 있다. 이 「매조도」는 지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치마폭에 매화를 그리다

 가볍게 펄펄 새가 날아와
 우리 뜰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꽃 향내 짙게 풍기자
 꽃향기 사모하여 날아왔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
 그 열매도 주렁주렁 많으리. (주석 14)


외로움을 달래고자 날아든 새에게조차 함께 살자고 조르는 정약용의 심사를 알 만도 한데 그 옆에 씌어 있는 이 그림과 글씨의 사연이 더욱 쓸쓸하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수년 됐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는데,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가셨기에 가위로 잘라서 네 첩(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주석 15)

유홍준 교수는 「매조도」의 품격과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매화가지에 앉은 새의 그림 또한 그 애절한 분위기가 어느 전문화가도 흉내 못 낼 솜씨로 되어 있다. 붓의 쓰임새가 단조롭고 먹빛과 채색의 변화도 구사되지 못했건만 화면 전체에 감도는 눈물겨운 애잔함이란 누구도 흉내 못 낼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예술은 감동과 감정에 근거할 때 제 빛을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주석 16)

정약용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진정한 학자ㆍ선비는 문ㆍ사ㆍ철에 통하고 시ㆍ서ㆍ화에 식견을 갖췄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지만, 이 여섯가지 분야에 어느 정도라도 전문성과 조예가 없으면 축에 끼이지 못할만큼 수준이 높았다. 정약용이야말로 문ㆍ사ㆍ철ㆍ시ㆍ서ㆍ화에 두루 능하였다.

정약용이 다산동암에서 쓴 또 다른 작품은 일기체로 된 소폭 서첩이다. 그중 다음에 소개하는 글을 읽으면 그분의 서정어린 낭만이 너무도 고고하게 표현되어, 유배객의 심사처럼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9월 12일 밤, 나는 다산의 동암에 있었다. 우러러보니 하늘은 적막하고 드넓으며, 조각달이 외롭고 맑았다. 떠 있는 별은 여덟 아홉에 지나지 않고 앞뜰엔 나무 그림자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옷을 주워입고 일어나 걸으며 동자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니 그 음향이 구름 끝까지 뚫고 나갔다. 이때 더러운 세상에서 찌든 창자를 말끔히 씻어버리니 이것은 인간세상의 광경이 아니었다. (주석 17)


주석
13> 박석무, 앞의 책, 476쪽.
14> 『다산시정선(하)』, 643쪽.
15>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1)』, 50쪽, 창작과비평사, 1993.
16> 앞의 책, 50~52쪽.
17> 앞의 책, 5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다산 , #정약용평전, #정약용, # 다산정약용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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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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