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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영 학생과 박용수 대표
 최가영 학생과 박용수 대표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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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술에, 더군다나 맥주도 와인도 아닌 전통주에 꽂힌 이유는 무엇일까?

지루한 장마가 잠시 멈춘 지난 8월 18일 '농업회사법인 연천양조주식회사(https://ksool88.modoo.at/)'가 있는 경기도 연천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과 산, 마을과 마을 사이로 난 좁은 도로를 30여 분 달리자 양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양은솥과 항아리, 측정기가 달린 정체모를 장비 몇 대. 술을 빚는 시설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양조장보다는 연구소 같은 분위기가 더 강했다. 술이 익어가는 시큼한 냄새가 없다면, 이곳이 양조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 같았다.

"단맛이 하나도 없어 묵직한 느낌이고, 신맛이 나요."
"신맛이 나는 술이 식욕을 돌게 하는 식전주야, 마시면 입에 침이 확 고이지."


최가영씨와 그의 스승 박용수 연천양조 대표(57)가 막걸리를 거르면서 나눈 대화다. 술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자 친절한 박 대표, 술 강의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가영씨는 스승의 가르침에 추임새를 넣듯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의 설명이 계속됐다.

"식전주는 시고 떫어야 해. 그래야 음식이 맛있거든. 와인이 그런 술이야. 시고 떫잖아. 좋은 음식을 맛있게 먹게 해 주는 역할을 하지. 노란 색이 도는 게 좋은 막걸리야, 오리가 갓 태어나 솜털이 보송보송할 때 나오는 그런 노란색이."
 

이들을 사제지간으로 묶어준 것은 지난 2018년 운영된 '아슬아술 18% 꿈의학교'다. 이 학교를 설립해 운영한 것은 박 대표가 아닌 가영씨였다. 당시 고3이었다. 학생 리더인 꿈짱이 되어 학교를 만들고 박 대표에게 가르침을 부탁했다. 박 대표가 이에 기꺼이 응해 가르침을 주는 것은 물론 양조장 전체를 실습장으로 내주는 통 큰 호의를 베풀었다.

'아슬아술 18%'라는 이름 역시 학생들이 직접 지었다. 어른과 청소년의 경계선에 서 있는 나이라 술을 다루기에 아슬아슬하다는 의미와 함께 빨리 어른이 되어 술을 마셔보고 싶다는 학생들 욕구가 담겼다. 특히 '18%'에는 아직 미성년자인 18세라는 의미와 함께 효모가 알코올을 만드는 최고 도수가 18%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가영씨는 이제 요리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됐다. 전통주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 전통주 과목이 있는 '호텔외식조리과 호텔외식 경영전공'을 선택해 진학했다.

그런데 입학하자마자 그 과목이 사라져버리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이 일은 가영씨의 뇌리에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돼 있다.
 
"꿈의학교는 청소년기의 바리케이트 같은 존재"

 
최가영 학생
 최가영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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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를 배우러 갔는데 갑자기 과목이 사라져서 충격 받았어요. 황당했지만, 이것 말고도 배울 수 있는 게 많아서 공부하고 있어요. 전통주는 졸업하고 나서 더 배울 생각입니다. 대학에서 전통주 관련 학과를 만들고, 또 국가에서 인증하는 교육기관을 설립돼야 전통주가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꿈의학교를 하기 전 가영씨의 꿈은 요리사였다. 요리사 이전에는 사진작가였다. '소질 있어 보이는데'라는 방과 후 조리 선생님의 한마디에 힘을 얻어, 막연했던 사진작가의 꿈을 놓고 요리사라는 꿈을 향해 가기로 했다. 또한 꿈의학교를 하면서 그 꿈이 확고해 졌다. '전통주 홍보대사'라는 큰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최종적인 꿈은 전통주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을 하는 거예요. 전통주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어요. 단순히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게 아니거든요. 조상들은 집안에 내려오는 유전병을 치료하기 위한 독특한 술도 만들었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술 종류가 달랐다고 해요. 정말 유익했고, 술 자체가 문화였던 거죠. 이런 것들을 제대로 알리면 전통주에 대한 인식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술을 입에 대지 않던 가영씨가 술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술에 관심을 둔 배경에는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더욱 화기애애한' 그의 가족들이 있었다. 그 모습이 좋아 보여 술에 남다른 관심을 두게 됐다. 또한 요리사가 되려는 꿈을 키우면서 요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술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관심은 크지만, 고등학생이 술에 대해 배울 기회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 길을 열어 준 게 경기도교육청이 운영하는 경기 꿈의학교다.

"꿈의학교는 제 청소년기의 바리케이트 같은 존재였어요. 꿈의학교라는 게 있어서 안전하게 제도권 안에서 술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술이라는 게 어린 학생이, 더군다나 여자가 배우기는 쉽지 않거든요. 어린 여자가 술 배운다고 하면, '나중에 술 파는 여자 될거냐'하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어요."

그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꿈의학교에서 함께 꿈을 키운 친구들과 처음으로 자신만의 술을 빚은 순간이다. 술을 빚는데 꼭 필요한 누룩도, 찹쌀 멥쌀 등의 곡물 종류도 학생들이 직접 선택했다. 하지만 그 술에 혀만 대 봤을 뿐 마시지는 못했다. 청소년 보호법의 보호(?)를 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창작 술 맛을 대신 봐 준 것은 경로당 어르신들이다. 꿈의학교를 시작할 때 계획대고 학생들은 직접 만든 전통주을 주민들과 나누고 그들의 솔직한 반응을 들었다. 이것이 졸업식이었다.

양조장 사장님이 학생들에게 퇴주잔 준 이유
 
연천 양조 박용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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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업을 할 때 학생들한테 서약서를 받았어요. 술을 만든 다음 처음에는 눈으로 그 다음은 코로, 다음은 혀로, 그 다음 목으로 맛을 보는 것인데, 혀까지만 맛을 보고 목으로 맛을 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는 서약이었어요. 그래서 퇴주잔을 만들어 줬어요. 혀만 대본 뒤 퇴주잔에 뱉게 한 것이죠."

박용수 대표 말이다. 청소년에게 술 제공 등을 금지시킨 '청소년 보호법'을 지키면서 안전하게 술을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나름의 비법이었다.

가영씨가 찾아와 술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이 문제로 인한 부담도 있었다는 게 박 대표 고백이다. 가영씨가 스스로 하려는 의지가 강해 용기를 냈다고 한다. 그 용기 덕에 박 대표 또한 청소년 시절 꿈을 이뤘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박 대표가 젊음을 바친 일은 소프트웨어 개발이다. 술 만드는 방법이 궁금해 우연한 기회에 허시명 술 평론가가 운영하는 '막걸리학교'(https://soolschool.modoo.at/)에 발을 들였다가, 지난 2017년 아예 직업을 바꿔 양조장 사장님이 됐다.

"제 꿈이 원래 선생님이었어요. 20대 때에는 시골에 가서 생태학교를 해 보겠다는 꿈도 꾸었고요. 그 꿈을 가영이가 이루어 준 것이죠."

이 말이 귀에 꽂혀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귓가를 맴돌았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꿈을 이루는 학교, 정말 멋지지 않은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고,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아 혼란스러운 청소년기. 가영씨는 장하게도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스스로 꿈의학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꿈을 찾았다. 청소년기의 필연적인 혼란함은 그의 꿈이 확고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더불어 그의 스승 꿈까지 이루게 해 주었다. 
 
연천 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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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꿈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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