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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민들이 심심치 않게 출판사에 방문했다.
 난민들이 심심치 않게 출판사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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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 나는 작은 출판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의 국장님은 개인적인 소신에 따라 난민을 도와주었다. 이를테면 컴퓨터를 쓸 수 있게 해준다든지, 빵을 나눠준다든지, 난민 숙소 등 당장 잠잘 곳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난민들이 심심치 않게 출판사에 방문했다. 국장님이 왜 난민에게 마음을 쓰셨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장면은 있다. 국장님은 이따금 새벽 시간 나를 유명 빵집에 데리고 가셨다. 함께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을 한아름 얻어왔다. 그리고 그 빵을 난민에게 나눠주셨다.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던 남자 

어느 저녁, 얼굴이 하얗고 왜소한 동양 남자가 찾아왔다. 예의 바르게 문 앞에 서 있던 그는 일본인이었다. 바바리를 입고 말쑥한 머리를 하고 맑게 웃는 그가 난민이라는 게 낯설었다. 당시 마흔이라는 나이도 낯설 만큼 젊어 보였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그에게서 긴장감이 돌았다. 야근을 마친 날 버스정류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창문에 희미하게 비친 그를 보았다. 흔들거리는 버스처럼 그는 불안정했다. 그가 가진 이름 말고는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늦은 밤 버스의 뒷자리는 우리를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맘 둘 데 없던 그는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신입사원으로 사회에 적응하던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그에게 동질감이 들었다. 우린 국경, 나이, 성별을 초월한 친구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평범한 직장이었다고 한다. 회사에 근무하면서 방사선 노출로 인한 몸의 이상을 느꼈다고 했다. 가정과 회사에 계속 이 사실을 알리자 그는 정신이상자 취급받았다. 회사를 상대로 개인이 맞서 싸우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반역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부모님과 오랜 갈등이 더해져 그는 한국으로 도망쳤다. 화가 난 거 같기도 하고, 체념한 거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깊은 사정을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하기 부족하겠지만 그렇다고 가족과 나라를 버릴 만큼 심각한 것인지 선뜻 이해하긴 어려웠다. 시간이 흐르면 그가 돌아갈 거라 믿었다.

그와 몇 번의 만남을 뒤로하고 난 이직했다.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가 3년 만에 우연히 메일로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는 한국에서 2년 반 정도 체류하다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불법체류자가 되어 교도소에 2년 반 갇혔다.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얼굴이 홀쭉해지고 주름이 깊어졌다. 빡빡 깎은 짧은 머리 때문에 더 왜소하게 느껴졌다. 내가 일본에 돌아갈 생각이 없냐고 재차 물었을 때 그는 한국에 살고 싶다고 했다.

"잘 지내냐"는 말에 늘 돌아오던 대답  

그는 관광비자로 머물렀기에 한국에서 일하면 불법이었다. 한국에 살고 싶은 그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그는 9년 동안 관광비자를 얻기 위해 3개월마다 해외출입국 도장을 여권에 찍어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가끔 친구처럼 저녁을 같이 먹는 일이었다.

미식가였던 그는 나를 고급스러운 식당에 데려갔다. 그가 평소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고, 힘들게 번 돈으로 식사 값을 냈다. 한사코 내가 사려고 해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잔돈을 불우이웃 저금통에 쏟아 넣는 그의 뒷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바빠지면 소원해지기도 했다. 간간이 연락을 이어가면 잘 지내냐고 묻는 말에 그는 "잘 지내요"가 아닌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괜찮다는 말은 힘든 상황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다는 뜻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허리를 삐끗해서 혼자 국립병원에 입원했을 때 입원비가 많이 나올까봐 중간에 퇴원했다고 한다. 고시원이 불이 났다는 기사를 보고, 그가 사는 곳과 비슷한 거 같아 연락했더니 통화가 되지 않는다. 그는 불타버린 고시원에서 나와 그곳과 비슷한 저렴한 고시원을 찾기 위해 헤맸다고 한참 후에야 소식을 전했다.

그는 기침이 멎지 않는다고 말하는 동안에도 기침이 터져 나올까 참 많이 참았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때, 그는 긴 침묵 끝에 '일하는 주방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좀 지친다'는 말조차 겨우 꺼냈다.

그는 되려 나의 안부를 걱정했다. 그때마다 난 잘 지낸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구지만 어떤 위로도 쉽게 할 수 없다. 사려 깊게 도와줄 방법을 찾기도 어려웠다. 허리가 아프다던 그에게 전기 찜질팩을 사다 주었는데 그는 고시원에 둘 자리가 없다며 사양했다.

최근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하자 오랫동안 비자를 발급받은 일본인은 강제추방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친구로서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모국으로 돌아가면 사는 게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움이 쌓인 가족에게 앙금이 풀렸을 거라 감히 짐작했다.
 
 우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식사를 했다.
 우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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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식사를 하면서 몇 년 전 그의 부모님이 한국대사관을 통해 자신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한국에 찾아온 부모님을 그는 일언지하 거절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는 일본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고 했다. 어떻게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마음이 닫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근근이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을, 나는 잘 짐작할 수 없었다.

당신이 부디 행복하기를 

식사하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그는 내 가방에 몰래 봉투를 넣었다. '감사합니다'라고 써진 봉투에는 오만 원이 들어 있었다. 물가가 비싼 일본으로 돌아가면 당장 숙소와 끼니가 걱정돼서 나 역시 봉투와 편지를 준비했다. 코로나19 대응이 취약한 일본에 가는 게 우려됐다. 

나는 깊은 우정의 마음으로 그에게 봉투를 전해주었다.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한밤중에 우리는 봉투를 주고, 되돌려주고, 뛰고 도망 다니며 추격전을 펼쳤다. 그는 결국 봉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사라졌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뜀박질하다 헤어졌다. 난 그와 앉아 있던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왠지 모를 눈물이 났다. 작게나마 그를 돕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왜 끝까지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일지 모르는 성의를 몰라주는 게 퍽 서운했다.

시간이 쌓인 우정으로서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돈을 보면서 울었다. 울다 보니 그가 원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주는 마음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 난민이다. 어설프게 한국어를 쓰는 외국인이다. 자존심이 세고 고집도 대단한 사람이다. 힘들거나 궁색한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은 남자다. 뭐가 웃기는지 크게 웃고는 늘 괜찮다고 말하는 아저씨다. 그런 웃음소리에 따라 웃을 수 없는 이상한 친구이다. 언젠가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던, 하지만 하루만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내 이웃이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중복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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