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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진보의 선봉에 섰던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1933~2020) 대법관의 사망은 예견된 것이지만 진보세력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긴즈버그 스스로도 암과의 고통스러운 투쟁을 벌여가면서 생존하고자 애쓴 이유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긴즈버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동물적 정치 감각을 지닌 트럼프는 이미 긴즈버그의 후임으로 전형적인 가톨릭 보수주의자인 에이미 코니 배럿(Amy Coney Barrett) 판사를 거론하고 나섰다. 트럼프는 오는 26일(미국 현지시각) 대법관 지명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바이든과 민주당은 대선 이후에 대법관을 지명해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보수주의 아니라 원전주의'라는 배럿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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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럿은 스스로 '보수주의가 아니라 원전주의(originalism)를 신봉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전주의란, 미국의 헌법을 제정 당시의 정신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의미다. 배럿이 10년 넘게 '섬겼던' 보수주의자인 스칼리아(Antonin Gregory Scalia, 1986~2016) 대법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원전주의자였다. 그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배럿도 그 노선에서 크게 벗어날 리 없어 보인다.

원전주의는 법을 적용할 때에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원칙주의를 내세우는 것이니, 보수주의와 다른 말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완벽한 문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성경 안에 담긴 모든 내용을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축자주의를 내세우는 초강경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전주의자들은 근본주의에 이르게 된다. 

배럿은 전형적인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해 1999년 결혼, 남편인 제시 배럿(Jesse M. Barret) 변호사와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를 낳고 2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배럿은 워킹맘이면서도 전통 가톨릭 교리에 따라 가정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고전적 역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배럿은 장로교 재단의 로데스 대학교(Rhodes University)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가톨릭 재단의 노트르담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의 법률대학원에 진학해 탁월한 성적(summa cum laude)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배럿은 가톨릭교회의 성령쇄신운동(spiritual renewal)과 관련된 단체인 '찬미하는 사람들'(People of Praise)의 회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찬미하는 사람들'은 1971년 성령쇄신운동에 열성적이던 래너헌(Kevin Ranaghan)과 드첼스(Paul DeCelles)가 세운 단체로 현재 회원이 3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분상 초교파주의 단체이지만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들이다. 사실 미국에서 성령쇄신운동이 확산되는 데에 이들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단체에는 포트랜드 대교구의 스미스(Peter Leslie Smith) 보좌주교도 회원으로 있다.

문제는 이러한 원전주의와 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앙의 결합이라는 매우 독특한 관점을 지닌 배럿 순회법관이 연방대법관이 되고 나서 매우 까다로운 사회적 이슈인 사형제도나 낙태 문제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낼지에 대해 진보는 물론 일부 보수 측에서 조차도 우려스러운 의견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배럿과는 대척점... '진보 아이콘' 긴즈버그가 걸어온 길
 
 지난 18일 타계한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지난 18일 타계한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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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환갑의 나이로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관에 임명돼 27년간 그 자리를 지켰던 진보주의의 아이콘인 긴즈버그와 약관 48세에 연방대법관 자리에 유력한 보수주의자 배럿은 출생부터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인물이다. 사실 긴즈버그는 그 출생과 성장 과정부터 미국 사회에서 매우 특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긴즈버그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그리고 그의 외조부모는 폴란드의 크라코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들이다. 그래서 긴즈버그도 보수적인 유대교 교육을 받았고 18세까지 유대교의 여름학교에서 교사로도 일했다. 당초 집안에서는 긴즈버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의 대학 진학을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긴즈버그는 코넬대학교에 입학해 매우 우수한 성적(summa cum laude)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결혼해 아이를 낳고 몇 년 후에 하버드대학교 법과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하자마자 법대 대학원장이 여학생들만 모아 놓고 한 말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 "여러분은 왜 하버드법대에 들어와서 (원래) 남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나요?" 결국 긴스버그는 컬럼비아대학교 법과대학원으로 옮겨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그러나 1960년대에 여성 법률가 긴즈버그가 갈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뉴욕법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1963년부터는 루트거스대학교의 법과대학원 교수로도 일했다. 이곳에서도 같은 일을 하는 남성 교수들보다 급여가 적은 수모를 당했다. 사실 당시에만 해도 미국 전체에서 법과대학원의 여성 교수는 20명도 채 안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긴즈버그는 1972년부터 컬럼비아대학교 법과대학원 최초의 여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1972년은 긴즈버그가 본격적으로 여권운동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국 역사에서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여권 운동이 본격화해 여권신장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됐다. 이후 긴즈버그는 문자 그대로 진보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대척점에 있는 두 인물이 각각 자리를 떠나고 물려받는 것은 단순히 연방대법원의 세대교체가 아니라 미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전환이라는 의미도 지닐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치밀한 계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강제 해산한 뒤 워싱턴DC 백악관 밖으로 걸어나와 '대통령의 교회'로 불리는 인근의 세인트 존스 교회 앞에서 성경을 들고 서 있다. 2020.6.1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사진은 6월 1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강제 해산한 뒤 워싱턴D.C. 백악관 밖으로 걸어나와 "대통령의 교회"로 불리는 인근의 세인트 존스 교회 앞에서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모습.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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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거래의 달인인 그가 배럿을 대법관으로 지명할 경우 그에게 어떤 손익이 있을지 이미 다 계산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트럼프는 배럿을 미국연방제7순회상소법원의 최초의 여성 법관으로 임명할 때부터 강력한 차기 연방대법관 후보로 점찍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왜 하필 배럿일까. 물론 배럿이 보수적인 백인 엘리트인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트럼프 정부가 17년 만에 연방정부 차원의 사형 집행을 재개하기로 결정한 이후 올해 들어 벌써 연방정부 차원에서 6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 또한 흑인 사형수에 대한 사형 집행도 곧 이뤄질 예정이다. 2019년 12월 17일 기준으로 미국에는 2656명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주정부 차원에서는 1976년 이후 1500명 이상의 사형수가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2003년 이후 한 건의 사형 집행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올해부터 상황이 변한 것. 정치 전문가들은 대선을 앞둔 트럼프가 법과 질서를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변화를 이끈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배럿 판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주요한 사회 이슈인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명확한 교리적 가르침을 근거로 사형제도, 동성애, 낙태를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보면 이 교리가 명료한 것은 아니다. 가톨릭의 교회법에서는 전통적으로 사형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목적 조치의 차원에서 이제는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배려를 주문하면서도 동성애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엄격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물론 낙태를 살인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여성에 대한 배려도 주문하고 있다. 현재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민감한 이 세 주제 가운데 동성애와 낙태에 대해 배럿의 입장이 트럼프와 일치할 것은 비교적 쉽게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간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트럼프의 조치가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럿이 연방대법원 판사가 되면 연방대법원의 보수 대 진보의 비율이 종전의 5대 4에서 6대 3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사형제도에 관해 배럿의 애매한 입장이 부각되면 자연스럽게 이 문제에 관한 논란은 트럼프에서 배럿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이 경우 트럼프는 연방대법원을 확실히 보수화하는 성과를 얻으면서 동시에 진보 진영의 직접적 표적이 되는 일을 피하는 '덤'도 얻게 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을 연방대법원 판사로 임명하면서 방패를 얻은 셈이다. 게다가 가톨릭 신앙으로 중무장된 배럿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가톨릭 보수층의 표심도 끌어들이고, 또 여성을 연방대법관으로 임명해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여성의 표도 끌어들일 수 있다. 

수많은 언론과 비평가들이 트럼프에 대해 '즉흥적' '직설' 등의 평가를 내리지만, 행간을 살펴보면 심사숙고해 꾀하진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전략이 자주 드러난다. '거래의 달인'이란 별칭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야기다. 오는 29일(미국 현지시각) 트럼프와 바이든의 첫 대선 토론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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