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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가 시작되었어도 여전히 '고등3.5'(고3과 대학교 1학년 사이) 신세인 딸이 서울에 있는 자취집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코로나로 묶인 몸은 집에 있는데 매달 나가는 월세도 아깝고, 바람 쐴 겸 갔다 오고 싶다고 했다.

마스크 잘 쓰고 다닐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때마침 아들도 동기들과 논의 할 것도 있고, 추석 전에 다녀오겠다고 해서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서울 상경에 나섰다. 다람쥐 쳇바퀴같은 매일에 지쳐 있었다.

사실, 주말을 앞두고 학부모들께 '꼭 집콕 해주세요, 손발 잘 씻기, 마스크 쓰기' 등을 부탁한 내가 멀리 움직이는 것이 맘에 걸렸다. 그런데, 다 큰 애들을 무작정 호통 치며 집에만 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하는 것은 더욱더 불안했다.

"엄마, 운전 제가 할께여. 엄마는 편하게, 음악 들으세요."

아들이 운전대를 잡았다. 아들의 운전은 마음의 걱정 거리를 줄일 만큼 자연스러워졌다.

"역시, 너는 엄마 집안 유전자야. 운전도 잘하네."

별걸 다 유전자에 갖다붙인다고 뒤에 있던 남편과 딸이 동시 다발로 한 마디씩 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탈 때마다, 늘 고 김대중 대통령이 생각난다. 당신 생전에 완공식을 본 이 고속도로는 호남인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새겨 넣었다.

서울에서 전라도 무안까지 직접 연결된 그 다리는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경부고속도로만 이용하던 운전자들에게 큰 복지제반시설이 되었다. 물론 막히는 상하경 길로 인해 고속도로의 편리함을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번에도 세 시간 정도를 예상했던 길이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인천에서 또 서울까지, 여정마다 막히지 없는 곳이 없었다.

다행히 이런 여정에 비타민이 되어 준 것은 푸른 가을하늘이었다. 가히 보정이 필요 없는 청명한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누우면 금방이라도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은 보슬보슬한 하얀 구름. 여름 장마 비에 우울해진 얼굴을 비춰도 맑은 정기를 가득 부어 줄 것만 같은 푸른 공간. 이 산 저 산 경계마다 굵은 고딕체 윤곽선을 대어 풍경의 원근법을 가르쳐주는 공기 입자들. 오랜만에 싱싱한 산소를 마시니 참 좋았다.

딸 집에서 1박을 하고 아침 7시에 출발했다. 서울 사람들의 출근길, 교통 지옥을 염려하는 딸을 뒤로 한 채 네비게이션의 친절한 목소리에 의지하며,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중랑천을 느리게 느리게 스쳤다. 말 그대로 출근길 교통 정체의 현장 속에 있었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결혼 전 이 꽉 막힌 서울살이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한남대교를 들어서니 도로 위와 이정표에 '부산'이라고 써 있었다. 여기부터 만남의 광장까지 또 다시 30여분.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머니,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남편이 운전을 못하니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지난해 추석 연휴를 앞두고 궁내동 서울톨게이트 인근 경부고속도로 모습. 2019.9.11 [항공촬영 협조 : 서울지방경찰청 항공대 이용길 경감, 경기북부지방경찰청 경위 박형식]
 지난해 추석 연휴를 앞두고 궁내동 서울톨게이트 인근 경부고속도로 모습. 2019.9.11 [항공촬영 협조 : 서울지방경찰청 항공대 이용길 경감, 경기북부지방경찰청 경위 박형식]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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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운전을 즐기고 고속도로 휴게소를 좋아하는 내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싶었다.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기 전 휴게소에 들렀는데 갑자기 남편이 말했다. 우리도 '하이패스'길로 한번 가보자고. 처음으로 하이패스 단말기를 달자고 얘기했다.

"당신 눈도 잘 안 보이는데 톨게이트에서 일일이 현금 받는 레인을 찾아야 하고, 요즘은 하이패스길이 더 많아서 현금 받는 출입구 찾기도 헷갈리네. 이 참에 단말기 사서 달고 가세."
"단말기 달자고요? 당신이 그랬잖아. 하이패스 단말기를 다는 차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의 손길이 사라지고, 그러면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게 되고, 우리라도 그냥 다닙시다라고."


그 말을 한 지 어느덧 십 수년이 되었다.

"그랬지. 그런데 이젠 힘이 없네. 코로나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온라인교육을 받고 그것을 모르면 컴맹이 문맹이 되는 세상에 나 혼자 대처할 힘이 없어. 그냥 옛날사람, 웃기는 사람으로만 보이고. 나도 이제 기계랑 친해지려고 마음을 바꾸는 중이야. 몸은 파이브G시대에 살면서, 정신은 계속 아날로그만 원하니 요즘 애들이 꼰대라고 할 만하지. 우리도 이참에 바꿉시다."
"그래요. 이제는 답시다. 남들처럼은 하고 살아야지. 가는 곳마다 속도위반, 과적차량 단속카메라가 지천이고, 우리가 어디를 오고가는지 다 포획되는 세상에 살고 있어. 단말기 어떻게 다는지, 얼마인지 당신이 다 물어보고 달고 와요."


남편은 가져온 단말기를 설명하고, 얼마를 주었다고 말하고, 나는 설명하지 말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운전이나 하겠다고 했다. 이어진 우리들의 대화는 마치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유치원생들 같았다.

"가볼까? 근데 이거 작동 되는 거 맞나? 안 되서 사인렌 소리 나면 어떡하지?"
"나도 모르니, 일단 가보세. 지나가 봐야 알지."
"정상 작동 되었습니다."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니 '이대로 가서 군산 톨케이트 지날 때 요금이 자동 정산 되는 거구나. 아니, 이렇게 쉽게 지나가면 되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 얼굴 한번 보고 '수고하십니다' 말 한 마디 하고 싶어서 그 긴 세월 동안 느리게도 살아왔네' 싶었다. 

내려오는 동안 하이패스 단말기가 주는 이 가벼운 즐거움을 만끽했다. 시대에 맞춰 살아야 한다느니, 몸이 느릴수록 정신만이라도 빠르게 대처하며 사는 방법은 기계에 익숙해지는 것 밖에 없다느니, 기계야말로 인간의 최고 발명품인 것 같다느니 하면서. 도착지인 군산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또 다시 들려온 말

'정상 작동 되었습니다. 요금은 OOO이며, 잔금은 OOO입니다.'

불편함을 감수하던 부부가 시대에 뒤처지는 모습이 두려워서 시도했던 하이패스를 달리기는 성공했다. 그런데 마음 한쪽이 덜컹거리며 서운하다고 했다. 스치며 지나온 그 길에 항상 나누던 인사. 그 인사를 주고 받을 사람이 없었다.

태그:#하이패스단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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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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