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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군산 내항 모습
 1930년대 군산 내항 모습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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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뭐하면서 지내나?"
"하시키 하나(한 척) 가지고 그냥저냥 밥은 먹고 지냅니다."


어렸을 때(1960년대 초) 집에 찾아온 손님과 어머니가 주고받던 대화다. 손님은 어머니가 운영하는 째보 선창(죽성 포구) 쌀가게 단골이었다. 안강망(중선) 선주였던 그가 배를 팔아치웠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근황을 물었던 거다. 그 대화를 들었을 때, '하시키'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혔다. 그 후 '하시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성인이 돼서 여러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 

위는 일제강점기 군산 '백정상점'에서 발행한 우편엽서 사진이다. 항만 기반시설이 잘 갖춰진 내항 모습으로, 상옥창고와 부잔교(뜬다리)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1933년 이후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3차 축항공사 기간(1926~1933)에 쌀 25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는 상옥창고 3동과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부잔교 3기를 설치했다.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했다. 이후 4차(1905~1938)에 걸쳐 축항공사가 진행된다. 1차 축항공사는 세관 용지로 사용할 해안 매립공사와 고정잔교 1기가 설치되고 육상설비와 내항 석축 등 접안시설을 갖춘다. 2차 축항공사 때는 부두에 자동전화소가 설치되고 고정 잔교 3기가 건설된다. 내항선(군산역-부두) 선로도 부두까지 연장된다.

3차 축항공사 기간은 7년. 이때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근처까지 닿았던 물줄기가 매립되고, 수덕산 해안가 봉우리도 토석 채취 작업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상옥창고, 미곡창고 등을 지으면서 호안(護岸)이 금강 쪽으로 100m 이상 밀려 나가고 야적장도 수만 평 확장된다. 내항 인입 철도도 증설해 하루 150량의 화물차가 운행하기 시작한다.

산처럼 쌓인 쌀가마는 일제 수탈의 증거물들
 
 쌀이 산더미처럼 쌓인 1920년대 중반 군산 내항
 쌀이 산더미처럼 쌓인 1920년대 중반 군산 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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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20년대) 군산 부청이 발행한 관제엽서 사진이다. 쌀 선적 작업이 한창인 내항 모습으로 군산세관 감시탑 망루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1923년 제작된 군산부 지도와 관련 서적에 따르면 당시 군산세관 본청 앞에 미곡검사소가 있었다. 기차 화물칸 옆 맞배지붕 건물은 화물창고이고, 그 너머에 철도 화물 취급소가 있었다.

조선 농민들의 한숨과 땀으로 얼룩진 쌀가마가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일제가 얼마나 많은 양의 쌀을 본토로 빼돌렸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군산역에서 내항까지 거리는 약 1.6km 철도 주변에는 가등, 조일, 조선 등 5만 석 이상 생산하는 대형 정미소들이 즐비하였다. 내항 부근엔 정미소 거리도 조성되어 있었다.

수면매립 공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쌀가마를 짊어진 짐꾼들이 분주히 오가는 고정 잔교만 보이고, 철도가 내항(지금의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주차장 부근)에서 멈춰 있어 3차 축항공사 기공식(1926년 6월) 이전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내항 호안시설(석축 구조물: 국가등록문화재 제719-2호)이 보이지 않는 것도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 시기 군산항은 반출품 중 쌀이 90% 이상 차지했다. 조선총독부 자료('군산항 수출공사 설명서')에 따르면 3차 축항공사 전 군산항 무역액은 5600만 원이었고, 화물량은 39만 1000톤에 이르러 대규모 축항이 불가피했다. 신문들도 군산항으로 유입되는 쌀이 150~200만 석에 달한다며 계선함(부잔교) 설치가 시급하다고 보도하였다.

선장은 있으되 혼자 움직일 수 없는 배 '하시키'
 
 금강 하구에서 쌀을 선적하는 일본 화물선과 하시키들
 금강 하구에서 쌀을 선적하는 일본 화물선과 하시키들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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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당시 군산에 거주했던 일본인 야수다카 세이키(保高正記)가 군산 지역 항만·철도 현황 등을 서술한 책 <군산개항사>는 '군산항에는 해변에도, 도로에도 눈길이 가는 도처에 300가마, 500가마, 1000가마씩 산적되어 20만에 달하는 쌀가마가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당시 내항 모습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루에 수만 가마의 쌀이 일본으로 반출됐던 군산항. 일제는 밤에도 내항 곳곳에 전등을 대낮처럼 밝히고 밤낮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간만의 차가 커 썰물일 때는 작은 기선도 접안에 어려웠다. 만조일 때도 한꺼번에 4, 5척 입항하면 금강 하구에 배를 띄워놓은 채로 쌀을 선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꼭 필요한 운송 수단이 '하시키'였다.

하시키는 함지박처럼 생긴 목선(木船)으로 밑바닥이 넓고 편평한데다 뱃전이 높아 쌀을 수백 가마씩 실을 수 있었다. 군산항은 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은 관계로 부두에는 수십 척의 하시키가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부두 노동자들은 새벽부터 쌀을 날랐고, 쌀가마가 올챙이배처럼 수북하게 쌓이면 예인선(끌배)이 다가와 대기 중인 기선을 향해 끌어갔다.

부두노동자 애환 서린 하시키... 1980년대 이후 사라져
 
 바지선을 끌고 가는 예인선.(2012년 군산 내항에서)
 바지선을 끌고 가는 예인선.(2012년 군산 내항에서)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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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뒤쪽에 키는 달려 있으나 동력장치가 없어 예인선이나 사람들이 앞에서 끌어줘야 한다. 자체적으로는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는 게 하시키다. 이 배는 일종의 부선(艀船)으로 군산 지역에서는 하시끼, 바지선(부선), 짐배, 범선 등 다양하게 불렸다. 움직일 때 키 잡는 선장은 있어도 기관장은 없다고 해서 '멍텅구리 배'라는 별칭도 얻었다.

'하시키'는 일본식 이름으로 사람들은 하시케(はしけ)로 표기했으며, 선착장 시설이 열악했던 시절, 수심이 얕은 서해안 항구나 포구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섬이나 갯마을 등은 뻘(토사) 때문에 여객선이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포구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른다고 해 '거룻배'란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부잔교 설치 후 하시키는 작업 범위가 더욱 확대된다. 군산항은 수심이 얕은 관계로 1만 톤급 이상 대형 선박은 만선일 경우 입출항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부잔교 설치 후에도 대형 선박은 외항 부근에서 짐을 일부 하역한 뒤 입항했다. 이때 필요한 게 예인선과 하시키였다. 바다에 떠 있는 무역선과 내항을 오가며 짐을 실어 날랐던 것.

한국전쟁 때는 북에서 내려오는 피난민 수송에 동원됐고, 50~60년대에는 미국에서 원조로 들여오는 잉여농산물(강냉이, 밀가루 등)을 실어 날랐던 하시키. 한때는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 포토존 공간으로 이용되는 등 부두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린 하시키는 선박을 합성수지 섬유(FRP)로 건조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이후 항구에서 구경할 수 없게 된다.
 
 군산고등학교 앨범 사진..하시키 선미에서(1960년대 후반)
 군산고등학교 앨범 사진..하시키 선미에서(1960년대 후반)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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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하시키가 군산항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항만 기반시설이 전무했던 개항(1899) 전후로 알려진다. 기록에 따르면 하시키를 여러 척 보유하고 해상 운송에 종사하는 직업을 회조업(回漕業)이라 했으며, 항구와 선박 사이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짐꾼을 나카시(仲仕: 중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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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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