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팅하는 손흥민.

슈팅하는 손흥민. ⓒ 로이터/연합뉴스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에 이어 이강인(발렌시아)까지 최근 유럽무대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들이 클럽을 대표하는 '주장 완장'을 달고 잇달아 공식 경기에 나서면서 주목받고 있다.

손흥민은 6일(한국시간) 비커리지 로드에서 열린 왓포드(2부)와 프리시즌 최종 평가전에 주장 겸 최전방 공격수로 선발 출격하며 풀타임 활약했다. 토트넘은 1-2로 패하면서 프리시즌 평가전 4경기를 3승1패로 마감했다. 토트넘은 오는 14일 안방에서 에버턴과 2020~2021시즌 개막전을 앞두고 있다.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주장 완장을 달고 경기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이미 국가대표팀에서는 2018년부터 주장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클럽에서는 함부르크-레버쿠젠을 거치는 동안 주장 완장을 차본 적이 없었다. 이날 손흥민이 주장을 맡게 된 것은 기존 주장단인 휴고 요리스와 해리 케인이 모두 A대표팀에 차출돼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완장의 책임감이 더해진 덕분인지 손흥민은 이날 프리시즌 평가전임에도 더욱 집중력 있는 모습을 선보였다. 후반 34분 에릭 라멜라가 얻어낸 페널티킥 만회골을 키커로 나서서 성공시키기도 했다. 1-2로 팀이 추격하던 후반 막판에는 골키퍼 가자니가까지 골문을 비우고 공격에 가담한 사이에, 왓포드의 역습 상황이 발생하자 손흥민은 하프라인 뒤에서부터 전력질주해 골라인 앞에서 공을 간신히 걷어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조제 모리뉴 감독은 경기후 인터뷰에서 비록 경기는 졌지만 손흥민의 열정적인 모습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흥민도 토트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빅클럽을 위해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서 큰 영광이었다"면서 "슬프게도 오늘 관중은 없었지만 자랑스럽고, 언젠가 다시 주장 완장을 차게되는 순간이 오기를 고대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손흥민에 앞서 이강인도 발렌시아에서 깜짝 캡틴의 역할을 맡았다. 이강인은 지난달 30일 레반테 UD와의 프리시즌 평가전서 주장 완장을 차고 선발로 그라운드를 누비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올시즌 이강인의 팀내 입지가 지난 시즌보다 크게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만 19세에 불과한 이강인은 역대 한국인 유럽파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주장 완장을 차게된 선수라는 기록도 세웠다. 프리시즌 내내 꾸준히 선발로 중용받으며 동기부여가 높아진 덕분인지 이강인은 지난 6일 카르타헤나와의 마지막 평가전에서는 2골을 폭발시키며 팀의 3-1 승리를 견인하는 등 절정의 컨디션을 뽐내기도 했다.

비록 프리시즌 평가전이고 임시 주장이라고는 하지만 유럽 빅리그, 그것도 상위권의 클럽에서 아무에게나 완장을 달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유럽에서의 주장은 한국이나 동양권과는 또 다르게, 선수 입장에서 상당한 명예나 자존심처럼 여겨지는 문화가 강하다. 스타급 선수들이 주장직에 욕심을 내기도 하고, 주장 완장을 빼앗기거나 밀려나기라도 했을 때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례도 종종 나올 정도다.
 
 이강인(발렌시아·오른쪽)이 25일(현지시간) 스페인 발렌시아의 메스타야 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리메라리가 헤타페와의 홈경기에서 상대 수비를 뚫고 돌진하고 있다.

이강인 ⓒ AFP/연합뉴스

 
전세계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유럽 리그에서 주장은 보통 자국리그 선수, 특히나 백인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주장을 맡기 위해서는 리더십은 당연하고 주전으로서의 팀내 비중이나 스타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축구계에서는 아직 변방 취급을 받는 동양의 선수가 유럽무대에서 주장 완장을 차는 모습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유럽무대에서 한국인 선수로 이 '보이지 않는 벽'을 깬 최초의 사례는 역시 박지성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시절에 박지성은 이미 2012년 아약스와의 유로파리그 32강전 등 몇몇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선 바 있다. 박지성이 뛰던 당시의 맨유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하던 전성기의 빅클럽이었고, 한국인 박지성이 임시 주장으로나마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온 모습은 국내 팬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줬다.

이후 퀸즈파크레인저스로 이적한 2012년에는 아예 정식 주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한국인 선수가 유럽 빅리그에서 주장을 맡은 것은 초유의 사건이었다. 박지성은 A대표팀에서 이미 주장 역할을 맡아 2010 남아공월드컵 원정 16강을 이끄는 등 '조용하고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럽 클럽무대에서 정식 주장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해 QPR은 타팀에서 건너온 이적생들과 팀의 1부리그 승격을 이끌었던 기존 주전들 사이에서 '파벌'이 형성되며 선수단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른바 굴러온 돌이자 외국인 선수였던 박지성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박지성을 주장으로 신임했던 마크 휴즈 감독이 초반에 경질되고, 해리 래드냅 감독이 부임하면서 박지성은 시즌 중반에 주장 직을 내려놓아야했다. 박지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던 래드냅은 부임 이후 얼마되지 않아 뉴질랜드 출신의 백인 수비수 라이언 넬슨에게 주장직을 넘겼다. 래드냅과 박지성 모두 이후로 명확한 해명은 없었지만 사실상의 주장직 박탈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그해 QPR은 결국 2부리그 강등의 수모를 피하지 못했다.

그래도 박지성이 QPR 주장으로서 존재감을 보여준 순간도 있었다. 박지성은 2012년 9월, 첼시와의 경기에서 상대 주장 존 테리와 팀동료 안톤 퍼디난드를 둘러싼 '인종차별 논란'이 이슈가 되자 팀의 주장으로서 테리와의 경기전 악수를 거부해 현지에서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안톤 퍼디난드는 박지성과 맨유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리오 퍼디난드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인종차별에 대하여 소신 있는 모습을 보여준 박지성의 행동은 팬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오늘날 손흥민과 이강인이 주장 완장을 달 수 있는 것도 한국인 선수들의 팀내 위상과 평가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손흥민은 EPL에서 4년 연속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는 등 토트넘을 넘어 EPL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정상급 선수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이강인은 비록 유망주이지만 유럽에서도 인정받는 최고의 유망주이자, 다음 시즌 발렌시아 전력을 좌우할 핵심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 선수들의 유럽무대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언젠가는 임시 주장만이 아니라 유럽 빅클럽에서도 한국인 선수들이 정식 주장으로 등극하여 실력과 리더십까지 인정받는 모습을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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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박지성 이강인 축구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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