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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 표지
ⓒ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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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에서 서른 살로 넘어가던 그해 마지막 날에 나는 서울에 있는 아차산으로 해돋이를 보러 갔었다. 그깟 한 살 더 먹는 게 뭐라고 친구들이 죄다 똥 씹은 얼굴로 우울해 있던 그 무렵, 나는 내가 드디어 '서른'이 된다는 사실에 한껏 들떠 있었다. '30'이라는 숫자가 이십 대의 끝자락에 엉덩이 반쪽만 겨우 아슬아슬 붙이고 있던 내게 어쩐지 묘한 해방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 나는 사는 게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 외 다른 진로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전공했고, 스무 살부터 꼬박 십 년간 공모전에 매달렸다. 팔십 매짜리 단편 소설을 기계처럼 찍어내던 시절이었다.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출근했다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손바닥만 한 원룸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또 고치고, 그게 일상이었다.

신춘문예 결과가 나오는 12월에서 1월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시골집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내려가지 않았다. 낙방 소식을 들은 날엔 혼자 울면서 술을 마셨다. 나는 정말 재능이 없는 걸까, 혼자 수십 번 수백 번 곱씹는 동안 점점 더 사는 게 시시해졌다. 그 무렵 잘 나가는 대학 동기들 이야기가 하나둘 들려왔다. 말 그대로 기가 죽어서,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나도 그런 내가 참 싫었다.

그래서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모자란 재능을 부여잡고 낑낑대느라 공연히 세월을 낭비하지 말자고, 더는 미련을 갖지 말고 깨끗하게 포기하자고, 그렇게 아차산 꼭대기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굳게 다짐했었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서야 알게 된 것

그리고 이제 나는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다. 아차산에서의 다짐 이후 근 십 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이십 년 묵은 '작가 지망생'이다. 꿈은 마치 눈덩이 같아서 세월과 함께 구르고 굴러서 더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물론 절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꿈을 여태 그렇게 굴리고 또 굴려온 것 또한 지난 세월의 나 자신이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반성은 좀 한다. 악착같이 성공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글쓰기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면 좀 더 행복했을 것을.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 이제 겨우 두 권의 책을 냈을 뿐이지만 문단의 호평 속에서 여전히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절치부심 중이라는 늦깎이 작가 문하연의 스토리는 이십 년 묵은 작가 지망생인 내게는 꽤 큰 위안이 된다. 그리고 이번에 그녀의 신작 에세이집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 가 새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책 표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명랑한 중년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기이한 조합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중년'이란 말은 '청년'이나 '노년'보다 확실히 임팩트가 좀 약하지 않나?

생각해보자. 일단 청년이라는 말은 듣기에도 부르기에도 좋다. 머릿속에 절로 푸릇푸릇한 풀싹, 드높은 하늘의 청량한 빛이 떠오르며 기분마저 상쾌해진다. 또 노년이라는 말도 어쩐지 근사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깊은 눈, 그 안을 촘촘하게 채우고 있는 연륜의 무게를 떠올리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절로 경외심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중년'이란 말은 듣기에도 부르기에도 괜히 사람을 쓸쓸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거기다 '명랑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고 보니, 뭐지? 이건 역설법인 건가? 싶었다. 물론,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의 생각은 백팔십도 바뀌었다. 명랑한 중년 작가의 더 명랑한 '글빨'앞에서 나는 내 편협한 생각을 반성했다.
 
모두가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살고 있다. 드라마는 갈등이다. 그러니까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갈등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것만 해결되면 금세라도 올 것 같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이란 애초에 없었다. 그 순간은 비 온 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때때로 찰나로 왔다가 사라졌다. 가슴속에 이고 지고 오느라 무거웠을 이야기들이 기어이 입 밖으로 나오고, 돌아가는 길에 흐른 미소가 지어지는 그 순간처럼 짧게. 그리고 다시 드라마 속으로.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 166쪽)
 
이것만 해결되면 금세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눈부신 시절에 목을 매던 때가 내게는 나의 이십 대였다. 돌이켜보면, 내게 조금만 더 느긋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그 시절 나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받으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늘 눈부셨음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 중이다. 

어떤 한 사람의 생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문하연 작가의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작가가 살아온 날들이 책 제목 그대로 찡하고, 또 때때로 웃기게, 그렇게 생생하게 와닿아서 어느 순간 마음이 폭신폭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늦은 나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는데

'명랑한 중년, 찡한데 왜 웃기지?'에서 작가는 응급실 간호사로 일했던 젊은 시절, 두 아이의 엄마와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했던 세월, 또 독학으로 문학과 미술과 음악을 공부하며 꿈을 키워나갔던 명랑한 중년의 하루하루를 작가 특유의 생기발랄 하고도 따뜻한 문체로 유머러스하게 담고 있다.
 
어느덧 사십 대 후반, 청춘은 지나가고 그 끝자락에서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붙잡고 있다. 백세 시대임을 감안하면, 아직 오십 세 안쪽이니 전반전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요양원에서 보낼 걸 생각하면 아무리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짖어 보아도 찬란한 청춘이라는 게 아득해지곤 한다. (명랑한 청춘, 웃긴데 왜 찡하지? 141쪽)
 
나는 나이를 먹으면 절로 철이 드는 건 줄 알았다. 그리고 철이 들면, 또 저절로 꿈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것들과 타협할 수 있는 판단력이 생기리라 믿었다. 그러나 사실 아름다운 것들은 죄다 비현실적이다. 아름다운 꽃잎의 색, 별의 눈부심, 바다의 푸르름, 그런 것들은 비현실적이라 감동을 준다. 나는 그래서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을 툭 건드려서 울리고, 또 웃게 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이제 나 역시 작가처럼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짖지 않아도, 찬란한 청춘이 아득하지만 말이다.

늦은 나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 우리의 매 순간이 눈부신 것처럼. 그래서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바라고, 꿈꾸고, 기대하고, 도전하기에 거리낌이 없는 이 시대 모든 '명랑한 중년'을 위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분명 찡하고, 또 웃길 것이다.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 - 흔들리고 아픈 중년을 위한 위로와 처방

문하연 (지은이), 평단(평단문화사)(2020)


태그:#문하연 에세이, #명랑한 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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