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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유화>에 수록된 마지막 시는 1954년 6월 25일에 쓰여졌다. 사진 속 첫 아들이 1954년 5월에 태어났으니, 이 사진은 1954년 말이나 1955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진중유화>에 수록된 마지막 시는 1954년 6월 25일에 쓰여졌다. 사진 속 첫 아들이 1954년 5월에 태어났으니, 이 사진은 1954년 말이나 1955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 고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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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유화(陳中有花). 전장에 피는 꽃. '70년만에 되찾은 6·25 통역장교의 종군 시편'이라는 설명이 붙은 고(故) 고정기(高廷基) 시인의 유고시집 <진중유화>(해토)가 지난 6월에 출간됐다. 1930년생인 고 시인은 전후(戰後)에는 <여원>, <주부생활> 편집국장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중앙일보> 출판국과 을유문화사 주간을 지낸 1세대 편집자였다. 그는 암으로 지난 1995년 65세의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다. 이 시집에는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듬해인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미군의 통역을 맡았던 청년장교 고정기가 만 21세부터 24세 때까지 써내려간 시 40여 편이 수록돼 있다. 

"고정기씨는 시 묶음 첫 장에 <陳中有花(진중유화)>라고 써 놓았다. 전쟁터에 피는 꽃이라... 까치만 울어도 마음이 고향으로 달리던 그를 버티게 해준 건 무엇보다도 '시심(詩心)'이었던 듯 하다. 남쪽으로 피난하는 동족과는 반대로 미군을 따라 북진해야 했던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는 절규하듯 시를 토해냈다."

아버지처럼 언론계에 몸 담았던 고정기 시인의 셋째 자녀 고명희씨의 말이다. 그녀가 아버지의 시 묶음을 발견한 건 지난 2014년.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시간이 정지되는 하얀 순간, 누렇게 세월이 고인 바둑판 원고지, 그리고 낯익은 필체." 부모님 두 분의 오랜 병치레로 아버지의 시 묶음도 뒤늦게 발견했고, 임종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원고 정리도 늦어졌단다.

시(詩) 말미에 박혀 있는 날짜와 지명

"이 시집에서 가장 강력한 시어(詩語)는 명사나 동사가 아니다. 문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화자의 행위와 감정, 의미가 현재 시제로 살아있다. 하지만 내 눈길을 오래 붙잡은 것은 시 말미에 박혀 있는 날짜와 지명이다. '1951. 4. 30. 원주를 지나며'와 같은 표기가 본문 못지 않게 크고 무겁다." 

고명희씨의 언론계 동료이자 오랜 벗인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이 추천사에서 말한 것처럼 시 말미에 기록된 '숫자'에서 쉽사리 눈길을 떼지 못했다.

1951. 2. 5. → 1951. 2. 21. → 1951. 2. 23. → 1951. 3. 25. → 1951. 4. 30. → 1951. 5. 2. → 1951. 5. 23. → 1951. 5. 27. → 1951. 6. → 1951. 7. → 1951. 9. → 1951. 10. → 1952. 2. 18. → 1952. 2. 25. → 1952. 8. 30. → 1952. 9. → 1952. 10. → 1952. 12. → 1953. 2. → 1953. 3. → 1953. 5. → 1953. 12. 31. → 1954. 1. 6. → 1954. 3. 15. → 1954. 4. 12. → 1954. 4. 19. → 1954. 5. 10. → 1954. 5. 25. → 1954. 6. 25.

<진중유화>에 수록된 40여 편의 시에는 대개 날짜 또는 날짜·지명이 기록돼 있었다. 한 편의 시를 읽고 난 뒤 그 날짜와 지명을 보는 순간, 잠시 호흡을 멈출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상한다. 이 날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청년장교 고정기가 써내려간 시는 숨가쁜 전황(戰況) 속에서 끌어올린 시어(詩語)였기 때문이다.
 
진중유화(陳中有花). 전장에 피는 꽃. '70년만에 되찾은 6·25 통역장교의 종군 시편'이라는 설명이 붙은 고(故) 고정기(高廷基) 시인의 유고시집 <진중유화>(해토)가 지난 6월에 출간됐다.
 진중유화(陳中有花). 전장에 피는 꽃. "70년만에 되찾은 6·25 통역장교의 종군 시편"이라는 설명이 붙은 고(故) 고정기(高廷基) 시인의 유고시집 <진중유화>(해토)가 지난 6월에 출간됐다.
ⓒ 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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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등잔 하나 켜지지 않는
허물어진 마을

강도 얼고
산도 얼고

전선에 목 매달은
가로수는
추위에 떨어 우는데

탄약차의 쇠사슬 소리
멀리 달리는 하늘엔

오늘도 노을이 짙어
타고도 타는
노을이 짙어.

(1951. 2. 5.) 黃江里

이 시집의 첫 번째 시 '노을'이다. 날짜와 지명을 보고 다시 읽어보니 "강도 얼고 / 산도 얼고 // 전선에 목 매달은 / 가로수는 / 추위에 떨어 우는데"라는 시구(詩句)가 더욱 생생하다. 황강리(黃江里)는 황해북도 개풍군 용산리의 옛 이름이다. 연 이어 물음표가 찍힌다. "탄약차의 쇠사슬 소리 / 멀리 달리는 하늘엔"이라는 시구를 보면 1951년 2월 5일 당시 상황이 궁금해진다.

<6·25전쟁 1129일>(이중근 편저)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51년 2월 5일은 육군, 해군, 공군의 합동헌병대가 발족한 날이다. 

"1951년 2월 5일/월요일/(전쟁 발발) 226일차. 전쟁이 발발한 뒤 최대의 탱크부대가 서울 남쪽 8km까지 전진했다. 소해정 한 척이 강릉 해안가에서 기뢰 접촉으로 침몰해 전사 4명, 실종 4명, 부상 9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남한 제3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은 홍천 포위공격을 개시했다."

청년 고정기는 왜 더는 시를 쓰지 않았을까? 

<진중유화>에 실린 시들은 모두 한국전쟁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의 현장 속에 있으면서도 고정기의 시는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다. 놀랍도록 자기 중심을 잡으며 시를 써내려간 것이다.

<진중유화>를 펼쳐봤을 때 조건반사처럼 떠오른 책들이 있었다. '한 사학자의 6·25 일기'라는 부제가 달린 고(故) 김성칠 교수의 <역사 앞에서>, 한국전쟁 당시 고정기 시인처럼 통역장교 시절을 언급했던 고(故) 리영희 교수의 자전적 에세이 <역정 - 나의 청년시대>가 그렇다. 

그리고 또다른 결의 책 한 권이 있다. 고정기 시인보다 세 살 연상이었던 고(故) 류춘도 선생의 <벙어리 새>. 류춘도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의용군 군의관이 돼 종군했고, 전쟁 후에도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으며 한국에서 의사로 지냈다. 그녀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반 세기가 지난 뒤에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며, 억울한 영혼들의 아린 기억들을 모아 책을 펴냈다. 고정기는 시로, 류춘도는 논픽션에 가까운 소설로 한국전쟁의 상흔을 기록한 것이다.

청년장교 시절 썼던 고정기의 시를 다 읽고나면, 에필로그 격인 해설 글이 나온다. '시인을 잃고 편집자를 얻었다'는 제목의 도서평론가 이권우가 쓴 글이다. 그는 '전설적인 편집자'였던 고정기의 삶을 반추하고, 시를 해설하면서 이런 물음표를 던졌다.

"청년 고정기는 왜 더는 시를 쓰지 않았을까? 아마도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잡지 일이라는 게 상당히 바쁜지라 시심을 가다듬고 언어로 형상화할 짬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능보다 더 나은 사람을 세상에 내놓는, 그러니까 편집자적 삶을 선택해서 일 수도 있겠다... 시인을 한 명을 잃었으나, 전설적인 편집자를 한 분 얻었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질문은 당사자의 답변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생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편집자라고 규정했다는 고정기 선생의 '편집자론'을 통해 그의 생각의 엿볼 수는 있다.

"편집자는 바로 활자매체의 중매자이며 연출자다. 저자와 독자의 중간에 서서 저자의 사상이나 문화가 올바르게 활자화되어 독자가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흡수하도록 연출하기도 하고, 저자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를 창조하도록 자극하고 도와주는 촉매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자칫 언론인이자 편집자로만 기억될 뻔 했던 고정기라는 한 사람이, 가장 격동적이고 슬펐던 역사의 한복판에서 시로 시대를 기록했던 시인이라는 걸 발견했다는 건,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올해 또다른 '소확행'이 아닐 수 없다. 시집 <진중유화>는 전후(戰後) 세대에게 건네는 전전(戰前) 세대의 선물이다.

진중유화

고정기 (지은이), 해토(2020)


태그:#진중유화, #고정기, #유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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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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