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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이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이 할머니.
ⓒ 정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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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모 김순이 할머니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이모는 19살에 강제로 끌려가 25살에 군함을 타고 나왔다. 이모는 1994년 위안부임을 고백하고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았다. 공식 인정 받은 지 6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정인후 경남 진주시의원이 털어놓은 이모(김순이, 1921~1995) 이야기다. 정 의원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일'(8월 14일)을 맞아 이모의 아픈 사연을 세상에 털어 놓았다.

이모 김순이 할머니 고향은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였다. 이모의 위안부 납치경위에 대해 정 의원은 "19살에 도로가에 볏단 널고 있는데 누런 제복을 입은 군인들한테 양팔이 잡혀 트럭에 실려 갔다"고 했다.

정 의원은 "잡혀갈 당시 이모가 소리를 쳤지만 트럭 엔진소리에 무슨 말인지 못 들었던 저의 어머니는 언니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소리쳤으나 막무가내였다"고 했다.

정 의원의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외할머니에게 그 같은 사실을 알리니 그 자리에서 외할머니는 기절하셨다는 것이다. 김순이 할머니가 잡혀갈 때 정인후 의원의 어머니(김차순) 나이는 11살로 어려서 위기를 모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순이 할머니는 귀향 후 28세에 인근 나이 많은 사람에게 재처로 시집을 갔지만, 남편이 돌아가신 뒤 식모살이를 하기도 했다.

김순이 할머니는 1994년 '위안부'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정부로부터 정식 인정을 받았다. 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최초로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공개한 지 3년만이다.

말년에 진주에 사셨던 고인은 '위안부' 인정을 받은 지 6개월여만에 세상을 떴다. 김순이 할머니는 진주 첫 '위안부' 인정 등록자였다.

정인후 의원은 "이모는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제대시켜 군함을 태워 귀향시킨 위안부였다"며 "그런데도 이토록 참혹한 인권범죄를 자행한 일본 정부는 아직도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면서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고 했다.

정 의원은 12일 저녁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추모문화제"에 이모의 영정 사진을 들고 참석해 분향‧헌화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중,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과 일본군 성노예로서 전쟁 용품처럼 쓰이다 죽임을 당한 수많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도 이제 편히 쉬시라고 염원했다"고 밝혔다.

정 의원은 "일본의 공식사죄를 위해 피해 생존자들이 앞장서 온 지난 30년의 길이 인권과 정의의 역사로 갈무리 될 때까지, 그리고 피해자가 다 돌아가시더라도 의식이 깨어 있는 시민이 증인이 되어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그날까지 우리가 증인이 되어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정인후 진주시의원이 12일 저녁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추모제에 이모 고 김순이 할머니의 영정을 들고 참석했다.
 정인후 진주시의원이 12일 저녁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추모제에 이모 고 김순이 할머니의 영정을 들고 참석했다.
ⓒ 정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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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이 할머니의 증언록 발췌

정인후 의원은 이모로부터 생전에 들었던 '증언'을 기록해 놓기도 했다. 다음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이 할머니의 증언록 내용이다.

"나이 19살이 되던, 음력 10월 어느 날 오후 5시 무렵. 어둠이 내려 주위 사물 분간이 분명하지 않을 때, 하동 고전면 국도 가장자리에 볏단을 널고 있던 중, 트럭을 타고 온 낯선 남자들에게 양팔을 잡힌 채, 이미 다른 지역에 잡혀 온 여자애들이 '엄마' 부르는 울음소리 가득 찬 트럭 짐칸에 실렸다.

다음 날 부산에 도착했다. 전국에서 끌려온 수많은 여자 애들을 산 같은 큰 배에 싣고, 밖이 보이지 않는 큰 교실 같은 곳에 모이게 하더니, 부산을 등지게 앉혔다. 체조를 시키고, 난생 처음 보는 '쇼'를 보여주었으며, 음악도 들려주며 관심을 끌었다.

쇼가 끝나고 부산항을 보니 개미처럼 보였고, 모두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7~8명씩 배치된 선실은 바로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낮았으며, 2명씩 교대로 불려 나가 큰 그릇에 밥을 받아오면 머리와 허리를 구부리고 먹었다.

배는 대만,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에 닿았고, 거기서 부대로 가는 기차를 타고 인적 없는 산속의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강제 성노예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층과 2층의 좁은 나무 칸막이 안에는 긴 나무의자 하나 있고, 설탕이나 밀가루 포대 같은 누런 종이를 깔았고, 모포 하나씩 있었다. 불이 없이 낮에도 컴컴하고, 밤에도 미군에게 들킬까 봐 불빛이 있어도 점같이 작았다.

아프면 부대 병원에 가서 약을 타고 주사도 맞았다. 종을 쳐서 끼니 때를 알리면 밥 먹을 때만 밖에 나왔고 다시 나무 칸막이로 잡아넣었다. 매일 미군 폭격을 대비하는 대피훈련을 받았고 밥 먹다가도 대피 사이렌이 울리면 숟가락, 밥그릇을 든 채 굴 안에 숨었다.

부대 이동 따라 버마 랑군으로 끌려가서 성노예 생활하며 피 묻는 붕대도 씻었다. 모두 일본 군인이고 여자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한번은 일본군이 '조센징'이라고 놀려 위안소 출입구 앞에 있는 소독 세수대야를 2층에서 1층으로 던졌더니, 헌병대에 신고가 되어 돼지우리 같은 곳에 하루 종일 가두고, 밥도 굶겨 결국 시말서 써내고 풀려났는데 제대해 줄 때 붉은 글씨로 전과 기록되어 있었다.

다시 부대 이동 따라 필리핀의 어느 섬으로 가서 성노예 생활을 했다.섬이라 독 안에 든 쥐 신세여서 도망칠 엄두도 못 내었다.

7년 성노예 생활하여 25살 되어 만기 제대시켜주어 싱가포르로 나오니 새로운 여자아이들을 가득 실은 배가 막 들어오는 걸 목격했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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