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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고교학점제는 무슨…"

코로나가 고교학점제를 집어 삼켜버렸다. 정부의 공언대로라면, 2022학년도 일반고와 특성화고를 시작으로 2025학년도 전면 시행된다. 하지만, 코로나의 확산으로 현 정부의 대표적인 교육 공약이었던 고교학점제의 시행이 기약 없이 연기될 거라는 게 교사들 사이에선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교가 코로나 방역의 최전선이 된 마당에, 교육부도 일선 학교도 고교학점제를 논의할 겨를이 없는 건 맞다. 올 초 이미 관련 지침도 내려왔고 사전 준비를 위한 예산도 확보되었는데 정작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당장 도입이 내후년인데, 그러자면 교육과정의 대대적 개편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어야 한다.

고등학교 교육과정만의 문제도 아니다. 고교학점제는 수업과 평가 방식부터 교사와 강의실 확보, 대학 입시와 학벌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정착될 수 있는 제도다. 어느 것 하나라도 관행대로 멈춰 있으면, 온갖 편법이 난무해 결국엔 교육에 대한 불신을 더욱 심화시키게 될 것이다.

지금 일선 학교마다 코로나 와중에도 교육과정 개편 TF팀이 꾸려지는 등 움직임이 없는 건 아니다. 새 교육과정을 아이들과 공유해 선호도를 조사하고, 개설 가능한 교과와 교사 수급을 연동시켜 분석하면서 나름 대비는 하고 있다. 현재 중2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적용된다고 하면, 지금 고1도 고교학점제의 간접적 영향권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애먼 고등학교만 과제를 떠안아 애면글면하는 모양새다. 혼자 용쓴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추상같은 상급 기관의 지침이 내려왔으니 충실히 명령을 받들고 있는 것이다. '창의적 인재 육성'을 내걸곤 있지만, 학교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관료집단이 된 지 이미 오래다.

학생 대상 두 차례 선호도 조사와 교사의 고민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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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고교학점제를 대비한 새 교육과정에 따라 얼마 전 고1을 대상으로 2, 3학년 때 배울 선택 교과 선호도를 조사했다. 수능 필수 과목인 국어, 영어, 수학, 한국사와 교양 교과를 제외하고, 우선 사회와 과학의 일반 선택 교과와 진로 선택 교과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했다. 개설된 과목 수는 사회는 총 12개, 과학은 총 8개다.

과학 영역은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등 4개 교과가 1, 2로 나뉘어 수준별 위계가 분명한 까닭에 선택에 있어 비교적 혼선이 적다. 문제는 전공조차 애매모호한 사회 영역이다.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 사회문화, 법과 정치, 경제, 동아시아사, 세계사, 한국 지리, 세계 지리, 이렇게 9개의 일반 선택 교과에다, 여행 지리, 사회 문제 탐구, 고전과 윤리 등 3개의 진로 선택 교과가 마련되어 있다.

두 차례의 선호도 조사 결과, 동아시아사나 세계 지리 등 낯설거나 공부하기가 까다로울 것 같은 교과를 제외하고는 30~50명 내외로 골고루 나뉘었다. 더러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아이들도 있고, 수능 대비를 위해 전략적인 고민도 있었을 테지만, 아이들의 선택은 그들의 다양한 흥미와 적성을 반영하듯 다양하게 분포됐다. 기존의 획일적인 교육과정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문제는 학교가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아이들의 다양한 선택을 존중한다면 모든 교과가 1~2개 반씩 개설되어야 하지만, 교사별 전공과 시수를 고려할 때 실현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취지대로라면, 선택 교과별로 교사가 더 충원되어야 한다. 학교마다 '현실적 여건'을 이유로 소수의 선택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공이 아닌 과목을 가르치거나 강의실별 수강자 수가 현격하게 차이가 날 경우, 수업의 질이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 간 주당 수업시수에 큰 차이를 둘 수도 없다. 참고로, 현재 중학교에서는 허용되고 있으나, 고등학교에서 전공이 아닌 과목을 가르치는 이른바 '상치 교사'는 금지된다.

교육부에서는 한 교사가 여러 학교를 돌며 수업하는 '순회 교사제'를 대안으로 내놓곤 있지만, 이 또한 묘수가 되기는 힘들 전망이다. 우선, 교사의 순회로 인한 행정 업무에 지장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교사 중에 오로지 수업만 전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뿐더러 학교마다 행정 업무 보조를 위해 배치된 교무실무사 한두 명이 다 떠안을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립학교에서 신규 교사를 채용할 때 여러 교과를 넘나들며 가르칠 수 있는 '슈퍼맨'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임용되는 젊은 교사들은 부전공을 이수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고, 교원자격증에 표시 과목이 두 개인 건 기본에 속한다. 사회 교사가 국어를 가르치고, 수학을 함께 가르칠 수 있는 과학 교사가 학교마다 드물지 않다.

애초 고교학점제는커녕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사범대학의 예비 교사 양성 과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교육과정과 교사 양성의 '미스매치'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자율적인 교과 선택권이 주어지면서 더욱 큰 혼란을 빚게 됐다. 고교학점제의 시행을 앞두고 예비 교사들조차 '멘붕'을 호소하는 이유다.

곧, 행정 업무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아이들의 선택을 수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전공 교사가 확보되지 않는 한 고교학점제는 첫발을 내딛는 것조차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는 학교마다 더 많은 강의실을 확보하고, 기존의 9등급 상대평가를 성취평가제에 따른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것보다 앞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하는 법이다.

물론, 이게 끝은 아니다. 대학 입시와 학벌 구조가 온존한 상태에서는 백약이 무효라는 걸 모를 리 없지만, 아직 손도 못 댄 상태다. 여전히 학생부종합전형이냐, 수능이냐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수준에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서슬 퍼런 사립학교법의 개정 또한 고교학점제의 정착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지만, 백년하청이다.

당황스러운 교육부 발표,  초중등 교원 신규 채용 규모 대폭 감축

아이들의 선호도 조사 결과를 보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는데, 어처구니없는 뉴스 한 꼭지가 떴다. 초중등 교원 신규 채용 규모를 대폭 감축하겠다는 교육부의 발표가 그것이다.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이유로 들었지만, 돌봄 기능을 강화하고 교육 다양성을 확보하며 고교학점제를 전면 시행한다는 공약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 서울시교육청의 경우, 내년 2021년의 초중고등학교 교원 수를 1128명 감축하기로 결정했고, 광주시교육청은 내년 신규 초등학교 교사 선발 인원이 장애인 2명을 포함해 11명이라고 밝혔다. 예비 교사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으로, '임용 절벽'을 마주한 셈이다. 참고로, 2013년 선발 인원이 350명이었으니, 고작 8년 만에 32배나 줄어든 셈이다.

학생 수 변화가 교사 수급에 반영되는 건 맞다. 다만, 교사 수는 줄어도, 고교학점제처럼 아이들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을 반영한 다양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모순적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나아가, 도시의 과밀 학교와 농산어촌의 과소 학교가 적잖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교사 수의 감소는 도농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농산어촌의 학교 통폐합을 부추기게 될 것이다.

요컨대, 정작 고교학점제를 집어 삼킨 건, 코로나가 아니라 교원의 신규 채용을 대폭 감축한다는 정부의 조치다. 취지대로 학생의 선택권과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교사 수급 기준이 학생 수에서 점차 학급이나 개설 교과 수로 옮겨가는 것이 옳다. 고교학점제 논의가 시작된 게 2000년대 후반인데, 전면 시행 연도까지 명토 박은 마당에 그 정도 예측도 못했을까.

태그:#고교학점제, #교원 신규 채용 감축,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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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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