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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8년 11월 19일 한국전쟁 전후 경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위령탑  제막식과  합동 추모제가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렸다.
 지난 2018년 11월 19일 한국전쟁 전후 경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위령탑 제막식과 합동 추모제가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렸다. 김하종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한국전쟁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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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직원이 모시고 온 손님을 본 김하종은 "아이고 형님들, 오랜만입니다"라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래, 잘 지냈는가?"라고 안부 인사를 하는 이는 사촌 형님 김하정이다. "형님요, 부산서 사업하는 일은 잘 되십니꺼?" "사업은 무슨... 쬐그만 장사 갖고서리. 남사시롭고." 김하정은 부산 초량시장에서 옹기장사를 하고 있는 터였다. 이어서 뒤에 서 있던 육촌형 김하원과 인사했다. 그와는 딱 11년 만의 만남이었다.

경주민간인 학살 이후

김하원은 1949년 8월 1일 이협우의 민보단이 경북 경주군(현재의 경주시) 내남면 명계리 바탕골에서 김씨 일가족 22명을 학살한 '피의 제전' 때 간신히 살아남았다. 학살 현장에서 탈출한 그는 경주 영안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며 두문불출했다. 그런 김하원이 서울까지 발걸음을 했다.

"니는 집안 일가가 모두 학살되고, 심지어 자네 춘부장도 돌아가셨는디, 이 문제는 해결할 생각은 안 하꼬 뭐하는 놈이가!" 김하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이어서 김하원은 "니는 출세했다고,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으면 다고!"라고 다그쳤다. 두 집안 형님의 꾸중은 추상 같았다.

두 형의 꾸중을 들은 김하종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민보단은 경주군 내남면 바탕골에서 김씨 일가를 멸족시킨 후 4km 떨어진 홈실마을로 갔다. 그리고는 그 마을 민보단장 정규준에게 "어제 밤 바탕골에서 빨갱이에게 협조하는 자를 죽였으니 시체를 매장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상급 단체의 명을 받은 정규준은 홈실마을 주민들과 함께 현장으로 갔다.

같은 일가가 몰살 당한 사실을 모르고 이 대열에 합류한 김봉수는 현장에 도착하자 기겁했다. 사촌형과 형수를 포함한 집안 가족들이 마당과 부엌에서 피칠갑을 한 채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봉수는 시신들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이 새끼! 뭐 하는 짓이야" 감시자로 남아있던 민보단원이 눈을 부라렸다.

"장례를 치르려면 새 옷으로 갈아입혀야 할 거 아닙니까?"라는 김봉수의 말에 돌아온 것은 매질이었다. '빨갱이 시신 수습하는 데 무슨 격식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민보단원에게 매질을 당한 김봉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이웃의 지게에 실려 집에 온 그는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아내 최일순은 남편을 살리려고 민간요법을 썼다. 그 요법이란 사람 똥을 구워서 먹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노력은 무용지물이었다. 김봉수는 집에 돌아온 지 9일 만인 1949년 8월 10일 세상을 하직했다. 김봉수는 서울에서 출세한 김하종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 김봉수가 민보단원의 매질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인 1949년 8월 8일 밤 10시경 불청객이 바탕골에 왔다. 그는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에 누워있던 김하종에게 다가왔다. "네가 김하종이냐?" "네." "이리 와." 불청객은 김하종의 얼굴에 머리를 갖다 댔다.

"앞산에 우리 동지들인 산사람 80명이 3일째 굶고 있는데, 네 집 소를 갖고 가야겠다." "우리 소는 암새 나서 안됩니더."

그러자 불청객은 품안에서 권총을 꺼내며 "이 새끼 죽인다"고 협박했다. 17세 소년 김하종은 자신의 소가 발정나서 다른 사람이 소를 다룰 수 없다고 한 것인데, 불청객은 대뜸 총을 들이댄 것이다. 그때 바탕골 민보단장 정규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단장님, 그 아는 바봅니다. 이 집 여자가 딸만 셋 놓고 아들 하나 낳은 것이 바봅니다. 내려가시쇼." 정규준의 변명에 불청객은 권총을 집어 넣고 마을을 내려갔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내남면 민보단장 이협우였다.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김봉수의 아들 김하종이 똑똑하다는 소문을 듣고, 화근을 없애기 위해 들이닥쳤다. 즉, 소를 순순히 내주면 빨갱이 협조자로 누명을 씌워 죽이려 했다. 아니, 응하지 않아도 죽이려 했다. 그때 정규준이 와 만류를 했기에 김하종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정규준이 돌아와 조금 전의 인물이 이협우임을 알려 주었다. 이틀 후 김봉수는 생을 달리했다. 김하종은 피눈물을 흘리며 언젠가 아버지와 집안 일가의 원수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럴 때 내남초등학교 류영태 선생이 김하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니는 신사적 복수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요, 신사적 복수가 뭡니까?" "이협우가 면장이 되면 너는 군수가 되는 거다."

김하종은 류영태 선생의 말을 가슴에 간직하고 공부에 전념했다. 하루 세끼 연명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는 내남중학교를 거쳐 경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전교 2등으로 입학해 당시 입학금 6050원 중 4000원을 면제받아 2050원만 내면 되는데, 그 돈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어찌어찌해서 경주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김하종은 법무부 형정국(지금의 교정국) 시험을 치렀다. 전국에서 합격한 24명 중에 2명만이 광화문에 있던 형정국에 배치되고, 나머지는 전국의 형무소나 지방검찰청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김하종은 광화문 형정국에 배치된 2인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다.

그의 앞길은 출세가도였다. 1년여 근무하고 난 1960년 4.19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 직후 집안 형님인 김하정·김하원이 찾아와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김하종은 자신의 장밋빛 청사진을 내팽개쳐 버렸다. 17개월을 근무한 법무부 교정국에 사표를 내던졌다. 다음 날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4.19 혁명 이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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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한 일은 이협우를 고소하는 일이었다. 김하종은 경주시 내남면 유족 75명과 함께 이협우를 살인·방화·강도 혐의로 대구지검에 고소했다. 1960년 6월 16일의 일이었다. 이 고소는 그해 5월 11일 있었던 거창군 신원면 전 박영보 면장 사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거창 유가족들은 사건 발생 당시 '주민 성분 검사'에 참관해 생사 갈림길에 섰던 주민들에게 방관적인 행동을 취한 박영보 면장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보고서』)

거창사건은 11사단이 빨치산을 토벌한다며 1951년 2월 9일 신원면 주민 719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4.19혁명이 터지자 거창 유족들이 박영보 면장을 대상으로 보복을 했고, 이는 전국적인 사회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대한민국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대한민국 국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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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 분주해졌다. 4월 혁명 이후 전국에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국회는 1960년 5월 23일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아래 특위)'를 구성했다. 특위는 11일간 경북·경남·전라지역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조사를 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경주 내남면 유족들도 이협우를 고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협우는 그해 9월 15일에 전격적으로 구속되었다(대구매일신문 9월 16일자). '경주왕국'의 황태자 이협우가 구속되자 유족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 다음 김하종은 유족들을 조직, 1960년 9월 5일 '경주유족회'를 결성했다. 유족회 사무실은 경주경찰서 중앙파출소 2층에 얻었다. 유족회는 '피해신고서' 접수를 받았는데, 860명이 이에 응했다. 또 경주 감포에서 드러난 유해를 수습하기도 했는데 매장지에서 '우양현'이라는 도장이 나와 유가족이 시신을 수습해 갔다.
 
 경주 감포 유해매장지에서 발굴된 우양현 도장
 경주 감포 유해매장지에서 발굴된 우양현 도장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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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유족회는 그해 11월 13일 오전 10시 계림국민학교에서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를 개최했다. 위령제는 경주시교육장과 계림국민학교장의 승인과 경주경찰서장의 집회허가를 받아 치렀는데, 참석자가 4000여 명이나 되었다.

위령제에 걸린 현수막에는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살인마 이협우 일당들아 이 땅 위에서 물러가라'는 문구가 내걸렸다. 운동장에는 흰 소복을 입은 여성과 양복과 한복을 입은 남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김하종 유족회장의 개회사와 추도사, 유족회 회가 낭독, 헌화가 이루어지는 내내 식장은 울음바다였다.

"사형."

1961년 2월 24일 대구지방법원은 오전부터 이협우 재판을 보려는 경주 유족들로 북적였다. 나호진 검사가 30분간 진행한 논고는 추상같았다. 피학살자(피해자)에는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27명이나 포함되었다는 점,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총살했다는 점, 피해자들의 재산을 약탈한 점 등을 열거했다. 그런 후에 이협우, 이한우, 이홍렬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 진행 과정 중에 유족들은 아우성을 치고 흐느꼈다. (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

이어진 3월 6일 결심공판에서 이협우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부터 이협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박두일을 포함한 내남면 민보단원 3명이 김하종의 어머니 최일순을 찾아왔다.

"대일댁(최일순을 지칭)요. 아들 (유족)회장 하지 마라 하소."
"뭣 때문에 그러는교?"
"아들 회장 안 하면 단장님한테 6천만 원 받아 줄께요. 그걸 갖고 외국 가든지 서울 가서 사세요."
"시끄럽다 마."


최일순의 지청구에 박두일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협우가 부하를 내세워 김하종을 돈으로 매수하려 한 것이다. 1961년 당시 6천만 원은 2020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2억 원 가량 된다.

1차 매수에 실패했지만 이협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김하종의 내남초등학교 은사 류영태를 동원했다. 류영태 선생이 경주유족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협우가 사형선고 받았응께, 6천만 원 받고 니 편하게 살면 안 되노?"
"무슨 말씀입니까? 선생님께서 예전에 저한테 신사적 보복을 하라고 안했습니까? 이제 와서 제가 돈에 넘어가면 피해자 860명의 유가족들은 우짜란 말입니까?"


얼굴이 벌게진 류영태 선생은 뒷머리를 긁으며 사무실 계단을 내려갔다. 류영태 선생은 염치도 없는지 며칠 후 다시 사무실에 왔다. "이협우가 6천만 원에다 포항 방향 인왕동에 있는 과수원도 주겠다카더라."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실패한 이협우는 다른 증언자를 매수하려 했다. 그 결과는 법정에서 드러났다. 이협우 측 변호사가 최해준을 대상으로 심문했다.

"증인은 피고가 당신의 처와 자식을 죽인 것을 직접 목격했나?"
"아니오."


재판정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판사와 검사의 눈이 둥그레졌고, 이협우는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판사가 "증인은 지난 번 1심에서 '처와 자식이 이협우에게 학살 당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허허."

최해준은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 다른 증인도 비슷했다. 이협우는 2심 재판을 앞두고 고소인들과 증언자들에게 전방위적으로 매수공작을 펼쳤다. 결국 1962년 3월 7일 2심에서 이협우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에서도 고등법원 원심을 확정, 이협우는 무죄 석방되었다.

아무리 일부 증언자가 돈에 매수되었다 하더라도, 약 200명이 학살되고 증언자가 숱한데 어떻게 무죄 판결이 났을까? 이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변화된 정세를 반영한 것이다.

5.16 쿠데타 이후
 
 5.16 군사정변.
 5.16 쿠데타가 경주유족회에 미친 영향은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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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이협우가 최종적으로 무죄석방 되었는데 피해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주유족회 임원들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된서리를 맞았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은'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민주 인사를 탄압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영남 지역에 조직된 '피학살자유족회'도 탄압을 받았는데 경주유족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족회의 김하종 회장, 김하택 총무, 최영우 부회장, 신경수 상무가 '반국가행위' 혐의로 구속되었다.

김하종은 경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부산중구경찰서에 이첩되어 40일 구금되었다. 그 후 서울 중구에 있던 혁명재판소에서 박창암 특검부장에게 심문을 받아 서울형무소로 송치되었고 곧 재판을 받았다.

1961년 11월 13일 혁명검찰부 검찰관 윤홍렬은 피고들이 "6.25 동란 시 사망한 좌익분자를 애국자로 가장시키고 우리 국군과 경찰이 선량한 국민을 살해한 것처럼 왜곡선전한다면 일반국민들이 국군과 경찰을 원망하게 되어... 북한공산괴뢰집단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특별법 6조를 위반했다고 공소장을 작성했다. (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

1962년 1월 29일 진행된 결심공판에서 윤홍렬은 김하종에게 "극형을 처할 것이로되 청춘이 아까워 무기징역을 구형한다"고 했다. 이어 유족회 총무 김하택에게도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부회장 최형우는 징역 10년을, 상무이사 신경시는 징역 8년을 구형했다.

1962년 1월 31일 있었던 선고공판에서 김하종은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김하종은 박정희 정권의 민양 이양 조치 때 정치범 특별석방조치로 1963년 12월 26일 사면되었다. 가해자 이협우가 무죄로 석방되는 와중에 피해자인 경주유족회 주요 임원은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김하종 회장은 최종 7년 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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