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은 지리산에 들어온 지 열 하루째. 오늘은 실상사에서 남쪽으로 산길을 따라 2킬로미터쯤 가면 나오는 약수암을 찾아가는 코스다. 편도 2킬로, 왕복 4킬로미터의 걷기에 적당한 길이다. 이 코스는 대부분 산속에 길이 나 있어, 새소리를 들으면서 그늘 아래서 호젓하게 조용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걷는 동안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고, 차도 거의 다니지 않고, 길 끝에 이 절 밖에 없어서 걷기에는 최상의 길이다. 길도 아주 잘 다듬어져 있어서, 노약자들도 걷기에 좋다. 도중에 두세 군데 약간의 경사가 있으나, 그리 힘들지는 않다. 정말 도보여행자를 위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약수암 입구에 요즘 뜨고 있는 '지리산 7암자순례길'로 가는 작은 이정표가 있다. 요즘 등산객들에게 실상사-약수암-삼불사-문주암-상무주암-영원사-도솔암으로 이어지는 7암자순례길이 인기라고 한다. 나는 아직 답사해보지 않았는데, 이 코스를 다녀온 사람의 글을 읽어보니까, 편도 9시간이나 걸리고, 꽤나 경사가 심한 곳도 있어서, 초중급 도보여행자가 걷기에는 좀 무리가 아닌가 싶다. 
 
보광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
▲ 약수암 보광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
ⓒ 고태규

관련사진보기

 
약수암 가는 길에는 도중에 이정표가 없다. 그래서 길을 헷갈리기 쉽다. 나도 무조건 직진 했다가 지리산 반달곰 사과농원까지 1킬로미터쯤 엉뚱한 곳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실상사 입구에서 남쪽으로 5백여 미터 쯤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길가에 나무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왼쪽(동쪽)으로 가파르게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승용차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다. 그 산길로 1.5킬로미터쯤 올라가면 된다. 삼거리에는 옛날에 약수암 안내판이 있었던 듯이 보이는 녹슨 광고철탑 하나가 휑하니 서 있다.

절에 이정표가 없다는 것은 스님이 외부인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작은 암자에 갈 때는 스님의 사생활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들어갔다가 조용히 나와야 한다. 작은 암자에서 혼자 사시는 스님들은 외부인들이 시끌벅적하게 암자에 드나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진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법정 스님도 말년 한 때, 오대산에 들어가서 숨어 살지 않았던가.

발이 쳐진 선방 안을 살짝 들여다보니까, 책장에 많은 책이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학삐리라 그런지 돈이 많은 사람보다 책을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 반갑고 얘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더구나 방바닥에는 내가 옛날에 많이 읽었던 계간지 <역사비평>이 잔뜩 쌓여 있어서, 스님이 더 만나고 싶어졌다. 스님을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안 계셨는지, 아니면 불청객이 귀찮아서 대답을 안하신건지는 모르겠다. 미리 약속을 안 하고 간 내 잘못이지.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고태규

관련사진보기

 
약수암은 실상사의 말사로 몸에 좋은 약수로 이름난 절이다. 그래서 이름이 약수암(藥水庵)이다. 약수암에는 내가 처음 본 아주 특이한 목판 탱화가 하나 있다.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제421호)이 그것이다. 목판 탱화는 흔치 않아서 한번 볼만하다. 암자 앞에 서있는 문화재청(?)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탱화는 가운데 자리한 아미타불과 그를 둘러싼 열 분의 보살 및 제자를 나무판에 조각한 작품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목조탱화가 유행하였다. 이 탱화는 조선 정조 6년(1782년)에 만든 것으로, 원래는 법당에 모신 불상의 뒤쪽 벽면에 모셔져 있었다. 높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는 아미타불은 세 겹의 연꽃무늬 테두리를 두르고 있고, 그 양 옆으로 다시 네 보살을 배치하였다. 탱화 가장자리와 불상 사이사이에 섬세한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각진 얼굴과 네모진 신체, 두텁게 표현된 옷 등에서 조선 후기 불상 양식을 엿볼 수 있다.

 
  
▲ 약수암 샘물
ⓒ 고태규

관련영상보기

 
약수암의 보석은 다른 데 있다. 자연식 옛날 샘물이다. 바위틈에서 졸졸 흐르는 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물은 두 군데서 나오고 있다. 하나는 돌확으로 떨어지고, 하나는 스텐리스 세숫대야로 떨어지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얼마나 반가운지. 이제 절집에서도 이렇게 자연 그대로 생긴 샘물은 다 사라지고, 주로 수돗물을 사용하고 있다. 동네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던 우리집 옛날 샘물을 그리워하며, 약수암 샘물 앞에서 한참이나 맴돌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보광전에서 바라보는 앞산의 풍경이다. 하늘과 먼 산을 바라보는 눈 맛이 시원하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절 마당 앞이 툭 트여 있어서, 멀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산봉우리 몇 개가 보이고, 파란 쪽빛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느릿느릿 피어오르고 있다. 마치 스즈키 츠네치키가 텁텁한 목소리로 부른, 일본 영화 <심야식당>의 오프닝곡 <추억>의 가사처럼.

네가 뿜어낸 하얀 입김이
지금 천천히 바람을 타고
하늘에 떠있는 구름 속으로
조금 씩 조금 씩 사라져가네.
---- (이하 생략)

태그:#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실상사, #샘물, #도보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실크로드 여행을 좋아합니다. 앞으로 제가 다녀왔던 지역을 중심으로 여행기를 싣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성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국내 도보여행기도 함께 연재합니다. 현재 한림대학교 경영학과 교수(관광레저학박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