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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 잘 생긴 얼굴 보게 하려고... 돌려세운 피아노의 시초]

리스트가 카롤린을 처음 만난 나이는 36살, 카롤린은 28살이었다. 카롤린은 리스트를 만난 후, 일기장에 '아버지가 자신을 강제로 결혼시킨 것을 후회하시고 돌아가신 후 리스트를 선물로 보내주었다'라고 썼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처럼 카롤린은 리스트가 좋았다. 단지 몇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편지 수십 장을 보내는 건 예사였다.

"하늘이 준 선물 리스트"... 14년의 이혼 소송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흉상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흉상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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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는 카롤린의 권유로 그동안 달려온 순회공연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카펠마이스터 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둘은 바이마르에 정착했다. 리스트가 그동안 연주자로서 명성을 쌓았다면 바이마르의 악장이 되면서 창작 활동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게다가 전 유럽에서 몰려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교육자가 되었다. 소도시 바이마르는 리스트라는 존재 하나로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리스트는 자신의 명성이나 돈을 위해 무대에 서는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카롤린은 리스트와 동거 즉시 결혼 무효소송에 들어갔다. 혼인 무효가 되면 카롤린의 남편은 땅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니 악착같이 소송에 매달렸다. 또한, 카롤린이 리스트와 재혼하면 영지가 리스트의 소유가 될 수도 있으니, 러시아로선 영토를 잃는다는 생각으로까지 비약되었다.

카롤린은 막대한 부를 동원해 여기저기를 통해 교구에 로비를 벌였으나, 국가가 주도하여 가톨릭 교구에 압력을 행사했기에 이 소송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바그너는 혁명의 편에 섰다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쫓기는 몸이 되었다. 바그너의 목에 현상금까지 걸린 상황에 리스트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그너가 스위스로 도망가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바그너의 신작 오페라 '로엔그린'의 초연 작업을 도맡았다. 로엔그린은 규모가 큰 대작이라 관현악단, 가수, 합창단 등 많은 인적 자원이 필요했고, 규모가 작았던 바이마르의 음악적 인프라를 생각하면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에도 리스트는 공연을 성공리에 이끌었고, 덕분에 리스트는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얻게 된다. 
  
베를리오즈 또한 리스트 덕을 크게 본 음악가이다. 모두가 베를리오즈의 곡은 어렵고 난해하다며 연주를 꺼리는 상황에 리스트는 끊임없이 그의 곡을 무대에 올려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리스트는 교향시를 12편이나 썼으며 파우스트 교향곡, 단테 교향곡을 내놓았다. 리스트와 바그너를 필두로 음악에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진보 진영과 슈만과 브람스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음악 사이 갈등이 생겨났다.

슈만은 자신의 환상곡 C장조를 리스트에게 헌정할 만큼 그와 음악적 교류가 활발했으나, 점차 거리를 두었다. 지나치게 기교 중심의 리스트 연주가 진지한 슈만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가 멀어지고 1854년, 슈만은 정신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때 혼자서 8명의 아이를 키워야 했던 워킹맘 클라라 슈만은 리스트의 도움으로 바이마르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슈만과는 길이 갈렸지만, 리스트는 계속해서 슈만의 곡을 연주 프로그램에 올려놓았다.

많은 음악가가 그에게 배우기 위해 바이마르의 알텐부르크 저택으로 모여드는 가운데 그중에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한스 폰 뷜로'도 있었다. 리스트는 뷜로의 연주를 높게 평가했다.

리스트는 마리와 결별 후, 세 자녀의 양육을 어머니인 안나 리스트에게 맡겨두고 양육비만 지급하면서 십 년 동안 아이들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세 아이는 파리에서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할머니를 도와 아이들을 가르치던 가정교사가 병이 드는 바람에 리스트는 딸들의 양육을 맡아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1855년 딸, 블랑딘과 코지마를 한스 폰 뷜로의 어머니 집으로 보내게 되는데, 이곳에서 둘째 딸인 코지마와 한스 폰 뷜로가 사랑에 빠졌다. 1857년 8월, 코지마는 한스 폰 뷜로와 결혼한다. 큰딸인 블랑딘도 두 달 후에, 변호사와 피렌체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리스트는 두 딸의 혼인으로 한숨을 돌렸다. 아들 다니엘은 법대생이 되었다.

천하의 리스트에게도 시련의 바람이 불었다.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 단조가 한스 폰 뷜로에 의해 초연되고 비평계는 일제히 리스트를 조롱했다. 한스 폰 뷜로의 연주는 완벽했으나, 곡 자체에 대한 비난이었다.

지금은 명곡으로 연주되는 곡이지만, 당시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까지 받았다. 이 와중에 리스트는 페터 코르넬리우스의 희곡 바그다드의 이발사를 무대에 올렸는데, 관객의 반응은 차가웠다. 결국, 이런 이유로 리스트는 1859년 2월, 바이마르 악장직을 사임한다.

게다가 얼마 후, 막내아들 다니엘이 결핵으로 나이 겨우 스물에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말았다. 리스트는 갑작스레 숨을 거둔 아들을 기리며 바흐의 칸타타 BWV.12에서 주제를 가지고 와 '울음, 고통, 괴로움, 두려움에 의한 전주곡'을 만들었다.

한편 카롤린은 리스트를 얻기 위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카롤린이 재산을 포기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재판이었다. 이 소송은 엎치락뒤치락 거듭하며 1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1861년,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로마에서 둘의 결혼식이 준비되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다시 좌절되고 많다. 이번에는 카롤린의 딸이 제동을 건 것이다.

카롤린의 딸은 카롤린의 혼인이 무효가 되면 자신에게 상속된 모든 재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계속되는 방해에도 무쇠의 뿔처럼 돌진하던 카롤린도 딸의 제동에 모든 소송을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돌연 수녀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후 평생 가톨릭 신학과 교회법에 관한 책을 쓰며 여생을 보낸다. 이후 카롤린과 리스트는 가끔 얼굴을 보거나 서신을 교환하며 지냈다.

아이돌 스타에서 사제로 변신한 리스트
 
노년의 리스트
 노년의 리스트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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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카롤린의 마음도, 소송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리스트는 알았다. 설상가상 리스트의 큰딸 블랑딘이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몇 년 사이로 두 아이를 잃었고 14년을 함께 살아온 여인과 갑작스러운 이별을 해야 했으니 리스트의 고통은 헤아림을 넘어섰다. 리스트는 다시 한번 <울음, 고통, 괴로움, 두려움에 의한 변주곡>을 만들었는데, 이는 아들 다니엘이 사망했을 때도 만들었던 주제이다.

1863년, 리스트는 로마의 한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서품을 받고 카속을 입었다. 아이돌 스타가 사제로 변신하자 다시 한번 관심이 쏠렸다. 리스트는 그곳에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를 놓고 종교적인 작품들을 썼다. 이곳에 5년을 칩거하는 동안 전 유럽의 피아니스트들이 그에게 배우고자 몰려들었다. 그는 무료로 그들을 가르쳤으며 가끔은 교회 기금마련과 같은 자선행사 무대에 올라 여전한 기량을 선보였다.
  
이 무렵 딸 코지마의 남편 한스 폰 뷜로는 거장 지휘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1863년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을 상의하기 위해 바그너를 만났다. 운명의 장난인지 코지마는 자신보다 24살 연상인 바그너와 사랑에 빠졌다. 뷜로와 바그너, 코지마는 각자의 필요로 이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뷜로에게는 바그너 같은 천재 작곡가가, 바그너에겐 자신의 어려운 곡을 공연해줄 최상의 지휘자인 뷜로가 필요했다.

코지마는 뷜로와의 사이에 이미 자녀가 둘 있었지만, 이후 바그너와의 사이에서도 아이 셋을 낳았다. 이 소식을 들은 리스트는 아연실색했다. 이런 상황에도 리스트는 바그너와 음악적인 교류는 이어갔다. 바그너는 리스트보다 두 살 아래였다. 결국, 몇 년 후 코지마는 뷜로와 이혼하고 바그너와 재혼한다.

바이마르의 통치자인 카를 알렉산더가 리스트가 머물 집을 마련해 주면서 1869년 리스트는 바이마르로 돌아왔다. 근거지를 이곳에 두고 로마와 부다페스트를 오가는 생활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피아노 교습은 계속되었다.

1876년 마리 다구가 사망했다. 1883년에는 바그너가 사망하고 리스트의 건강도 나빠진 가운데, 1886년 손녀인 다니엘라 폰 뷜로의 결혼식 겸 바그너 축제 참석을 위해 바이로이트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쇠잔해진 리스트는 폐렴에 걸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화려했던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리스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롤린은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사후에 발견된 유언장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리스트에게 남긴다는 말과 함께 그 끝에는 '카롤린 리스트'라는 서명이 남겨져 있었다. 살아서는 끝내 카롤린 리스트가 되지 못했지만, 카롤린의 마음속에 리스트는 이미, 그리고 영원히 그녀의 남편이었다.

[참고서적]
- 리스트, 그 삶과 음악. (말콤 헤이스 지음/ 김형수 옮김. 포노)
-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헤럴드 C. 손버그 지음/ 김원일 옮김. 출판사 클)
- 피아노의 역사 (스튜어트 아이자코프 지음/ 임선근 옮김. 포노)
-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이채훈. 혜다)
-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이야기(금난새, 생각의 나무)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천투데이에도 실립니다.


태그:#예술가들, #음악가,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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