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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의 나무와 석조 건축물이 뒤엉켜 묘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타프롬 사원.
 열대의 나무와 석조 건축물이 뒤엉켜 묘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타프롬 사원.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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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개월 전, 이전엔 들어본 적 없는 생경한 이름의 바이러스 하나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코로나19'라고 했다. 이후의 상황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우리가 온전하고 완벽하며 변함없을 것이라 믿어왔던 '일상'이 파탄을 맞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만 바이러스 하나가 '지구의 지배자'라 스스로를 추켜세웠던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죽었고, 영국 총리 보리슨 존슨은 중환자실까지 실려 갔다가 한참 후에야 초췌한 모습으로 TV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는 국가 전체가 비상등이 켜진 폐차 직전의 자가용 형국이 됐다.

점잖던 프랑스의 장관이 "왜 우리나라로 와야 할 마스크가 미국으로 간 것인가"라며 목소리 높여 분노했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유럽연합이 역사상 가장 큰 혼란에 빠졌다"고 한탄했다.

유럽만이 아니다. '지구 위 경찰국가'를 자임하며 제 나라에 위협이 된다면 중동이건 아시아건 폭탄부터 쏟아붓고 보던 초강대국 미국의 자존심도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미 300만 명 넘는 미국인이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사망자도 갈수록 늘어난다. 얼마 전 디트로이트 한 병원 빈 방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을 촬영한 사진은 전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선진화된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던 유럽과 미국의 방역 체계는 생각보다 허술했고 형편없었다.

'코로나19'가 야기한 이번 사태 이후 세상을 움직여온 패러다임이 대폭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서양은 동양을 향해 더 이상 '의료기술의 우위'를 말하기가 어렵게 됐고, 비교적 간단했던 국가 간 이동에도 유무형의 장벽이 생기고 있다. 일상처럼 행해졌던 자유로운 세계여행이 앞으로는 쉽지 않을 듯하다.

더불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한 비대면 강의와 교육이 보편화 될 것이라 보는 학자들도 다수다. 일부 국가에서 야생동물을 함부로 먹던 습관도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사회·문화의 많은 측면들이 '코로나19 사태' 전과 달라질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다.
 
앙코르와트 석벽에 새겨진 부조. 불멸을 꿈꿨던 크메르 제국 왕의 형상이다.
 앙코르와트 석벽에 새겨진 부조. 불멸을 꿈꿨던 크메르 제국 왕의 형상이다.
ⓒ 구창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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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에 세워진 성 같았던 인간의 일상

서양과 동양이 매한가지다. 유럽과 미국,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중동과 아프리카가 다를 바 없다. 소소한 기쁨과 자그마한 웃음으로 행복감을 느끼곤 했던 인간의 일상은 철옹성이 아닌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0년 지구의 각성'이라 부를 만하다.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허방다리 위를 걷는 위태로움에 처한 이때, 우리들은 쉽고 허술하게 무너지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과 '불멸하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캄보디아의 작은 도시 시엠립. 도처에 흩어져있는 크메르(Khmer)의 고대 유적들은 여행자의 눈을 매혹한다. 앙코르와트, 앙코르톰, 타프롬…

크메르 제국은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생겨난 동남아시아의 고대 왕조. 현재의 캄보디아 지역에서 번성했다. 중국은 이곳을 '진랍(眞臘)'이라 불렀고,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세력이 커졌을 땐 캄보디아는 물론 주변 태국 동북부와 라오스·베트남 일부까지 통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왕조의 가장 유명한 유적이 한국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앙코르와트다. 힌두교와 불교 관련 건축물과 조각품을 원 없이 만날 수 있는 곳.

크메르 사람들은 왕이 죽으면 섬기던 신(神)과 하나로 합쳐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앙코르와트를 포함한 시엠립의 사원들은 각기 다른 왕이 자신과 합일하게 될 신을 위해 축조한 것이다,

이제까지 다섯 번에 걸쳐 앙코르와트를 찾았다. 부조(浮彫) 한 점, 한 점에서 크메르의 역사와 유구한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앙코르와트의 길고 긴 회랑에선 태양을 가려주는 차양막을 펼친 커다란 코끼리에 올라 정복 전쟁을 지휘하는 크메르의 왕들과 힌두교의 요정 압사라(Apsaras)의 돋을새김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이 적어도 800년 전에 새긴 것이라는 사실은 언제 봐도 잘 믿기지 않는다. 너무나 또렷한 형상으로 어제 만든 듯 존재하는 부조. 크메르 사원 석벽에 새겨진 조각들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부연 없이도 알게 해주는 증거물 중 하나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앙코르와트의 복도에선 자연스레 '불멸'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면 오탁번 시인의 절창 '너의 별에서'가 떠오르곤 했다.
 
너의 별에서

너는 어느 별에서 태어났기에
이토록 무서운 광속으로 다가와서
나도 모르는 나의 생애를 불 밝혀 놓고
눈물빛 핏빛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가

겨울 철새 모두 떠난 한강 물결
봄이 오는 소리 선연한 노을 아래
물속 깊이 숨은 누치 보이지 않고
하늘 멀리 떠난 나의 아기는
깃 하나 남기지 않고 나를 울린다

흰 수염 가득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지만
아아, 또는 오오
이러한 모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내 운명이 벼랑 끝에 홀로 서는 소리

무좀으로 썩어가는 새끼발톱까지도
너의 별에서 날아온 사랑의 빛 앞에
까뒤집어져서 탄로가 났다
나는 전생에서부터 은닉했던 증거 앞에
모두 모두 자백하였다

너의 별이 내뿜는 사랑의 빛은
1초에 우주를 일흔 바퀴씩 돌면서
너의 전생에서부터 오늘 한강 물결까지
완전하게 발가벗기고 있다

오오, 자백의 황홀과 나체의 쾌락으로
너의 별이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서
그곳에서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압사라를 돋을새김 한 앙코르와트의 조각.
 압사라를 돋을새김 한 앙코르와트의 조각.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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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겠지만

그것이 정신의 영역이건 육체적인 것이건 사람들은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덧없고 헛된 욕망일지라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무한히 존재하는 '불멸'을 지향해왔다. 사랑도 불멸의 영역이 되기를 기원했다.

시인 역시 '무서운 광속으로 다가와서/나도 모르는 나의 생애를 불 밝혀 놓는' 사랑에 놀라워한다. '흰 수염 가득한 턱을 고이고/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지만' 사랑의 실체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별이 내뿜는 사랑의 빛은/1초에 우주를 일흔 바퀴씩 돌면서/너의 전생에서부터 오늘 한강 물결까지/완전하게 발가벗기고 있다'는 걸. 그래서다. 인간은 영원히 사랑 안에서 살다가 죽고 싶다. 불멸과 포옹하고 싶은 욕망에 들뜬다.

캄보디아 시엠립엔 할리우드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 장소로 유명한 또 하나의 사원이 있다. 타프롬이다.

거기선 열대의 거대한 나무와 석조 건축물이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한 몸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백 년간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다가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은 형상.

모래성처럼 허술한 인간의 일상, 그걸 무너뜨린 바이러스, 천 년을 변치 않은 앙코르와트의 조각들, 오랜 대립 끝에 돌과 나무가 하나의 몸으로 사랑과 불멸을 꿈꾸게 된 사원…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에 불멸이란 게 존재하기는 할까?

연결고리가 분명치 않은 이것들을 떠올리는 2020년 오늘이 어지럽다. 곧 깨어날 꿈이었으면 좋겠다. 끝을 예상하기 힘든 코로나19의 난행(亂行)은 대체 언제 막을 내릴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코로나19, #앙코르 와트,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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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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