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조선 최초의 영어는 이런 모습이었다]

우리는 1882년 6월 13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시베리아 원정에 돌입하였습니다. 전체 여정은 아래 이미지를 확인해 주세요.  
  
조지 포크 일행 여정 조지 포크 일행 여정
▲ 조지 포크 일행 여정 조지 포크 일행 여정
ⓒ 미의회도서관

관련사진보기

 
보다시피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9월 9일 도착)를 경유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것이 9월 12일이었으므로 총 3개월이 걸린 원정이었습니다. 미국인 최초의 시베리아 여행이었므로 당연히 우리는 극세밀화와 같은 보고서를 썼고 이듬해 출판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 책자는 미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아마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되는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조선인에 대해 직간접으로 관련되는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재구성해 볼까 합니다. 서양인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3개월에 걸친 미국인 최초의 시베리아 여행

먼저 시베리아 여행의 전반에 대하여 스케치해 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8년 전의 상황입니다. 전체적으로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지는 통행량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았어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쇠고랑을 찬 유형자流刑者들(exiled convicts in chains)의 행렬이었습니다. 긴 도로 위를 지나가는 유형자의 카트 행렬을 날마다 볼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이동하는 유형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역참의 통나무집에서 숙박을 하고 강으로 이동할 때에는 증기선이 끄는 바지선(barge)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일군의 코삭(Cossack 경비대)과 이주자들도 만날 수 있고 물품을 실은 수레를 만나기도 합니다. 시베리아의 여름철 여행은 그 속도가 겨울에 비해 오히려 느립니다. 겨울철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썰매를 이용하여 50일 정도 걸리는데 여름에는 통상 60일 내지 80일이 걸립니다.

이처럼 여름 여행이 시간은 더 걸리지만 비용이 훨씬 적게 들고 유람하기에도 좋으므로 여름철에 사람들이 몰립니다. 봄과 가을은 여행 속도가 더 느립니다.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얼음이 얼었다 녹았다 하여 육로든 수로든 애로가 많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연해주를 포함한 동시베리아에는 러시아인 외에 만주족, 퉁그스족(Tunguse), 조선의 이산자들( straggling Koreans) 그리고 현지의 야인으로 골디족(Goldi), 길야크족(Gilyaks), 오로콘족(Orochons) 및 아이노족(Ainos) 등이 혼거하고 있습니다. 다민족 혼혈사회죠. 

이제 우리의 여정을 지도(부분도)로 보겠습니다. 
  
조지 포크 일행 여정 지 포크 일행 여정
▲ 조지 포크 일행 여정 지 포크 일행 여정
ⓒ 미의회도서관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굵고 붉은 선을 따라 여행했습니다. 우측 하단 부분(푸른 원)을 주목해 봅니다. 두만강(R. Tuman)을 건너면 바로 중국 혹은 러시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일대가 오래 전부터 조선인들의 왕래가 이루어져 온 곳입니다.

지도를 조금 세밀히 보겠습니다. 두만강 바로 위 러시아 지역에 포시에트(Possiette), 그 바로 위가 블라디보스토크. 불라디보스토크에서 좌상 방향으로 붉은 선이 작은 곡선(수로)을 그리고 있고 그 끝에서 수이푼강(Suifun R.)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도에 표신된 수로를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수로는 보다시피 북서쪽에 위치한 수이푼 강구로 이어집니다.
 
 19세기 연해주의 조선 배
 19세기 연해주의 조선 배

관련사진보기

 
뜻밖에도 조선인들과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우리를 태운 배는 아무르(Amur)호라는 증기선이었습니다. 매주 2회 러시아 정부에서 운영하는 선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수이푼 강구 사이에서 우편물과 승객 등을 운반합니다.

자그마한 철제 측륜이 달린 배로서 러시아 함대의 시베리아 분대에서 파견된 사관이 지휘했습니다. 주로 해군기지에 대한 물품조달과 운송용으로 사용되는 배입니다. 깨끗한 선실과 뷔페 식당을 구비하고 있기는 했지만 용량이 작아 우편물 이외의 화물은 실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두 척의 허술한 배를 끌어매고 갑니다. 거기에 화물을 싣는 거지요.

그 두 척의 배를 조선인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 배는 무거운 목재로 만들어져 있는데 돛대와 돛 폭이 하나씩 달려 있었습니다. 그 배에 우리의 화물이 실렸습니다. 대여섯 명가량의 조선인이 그 배에 타고 있었구요.

러시아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조선인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광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영세하지만 조선인들이 운수 분야에서 틈새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 만난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로 인사했더니

이내 우리는 수이푼 강이 시작되는 강구에 다다랐습니다. 강구는 레츠노이(Rechnoi)라고 불렸습니다. 인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레츠노이'는 마을 이름이 아니라 단지 환승지의 표식였던 거죠. 그곳에서 우리는 하선하였으며 조선인들의 도움으로 수화물을 챙겼습니다.  

나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로 인사를 건네 보았습니다. 그들은 뜻밖에도 환히 웃으며 일본어로 대답했습니다. 조선에서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밝고 활기차 보였습니다.

그들은 일을 다 끝내자 뱃머리를 돌려 아무르호와 함께 떠났습니다. 바람에 부푼 돛아래에서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강물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수이푼 강을 따라 올라갈 참입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가 한국인들에게, 단지 미국인 조지 포크의 관찰기로 읽히기보다는 조상들의 삶과 한, 그리고 꿈이 서린 땅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으면 합니다. 

강 입구에 증기선 두 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수이푼호(Suifun)와 파이오니어호(Pioneer)였습니다. 서로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파이오니어호 선주 페더호프(Fetherhof)씨의 권유로 우리는 그 배에 올랐는데 곧 후회하였습니다. 음식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허접한 음식에 독일인 선장이 터무니없는 값을 청구하더군요.

아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면서 아무르호에 같이 탔던 러시아 젊은 사관(士官) 한 명이 우리 배에 동승했습니다. 껀정한 키에 깡말랐습니다. 꾀죄죄한 유니폼은 열악한 군 복무를 엿보게 해 주었습니다. 그의 짐 가방에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 있었고 가방에 달린 주머니에는 담배와 작은 화장수 병(tiny little bottle of cologne)이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얼마 후부터 우리 배는 강의 좌안에 바짝 붙어 이동하였습니다. 풍차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풍차 주위엔 통나무 집들이 여러 채 서 있었습니다. 그런 풍차들이 일대에 여럿 보였습니다. 강폭은 좁고 굴곡이 많아서 배 두 대가 지나가기도 어려웠습니다. 다음 역참인 라즈돌노예(아래 현대 지도 참조)까지 강은 구릉과 평원을 가르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라즈돌노예 붉은 화살표
▲ 라즈돌노예 붉은 화살표
ⓒ 구글 어쓰

관련사진보기

 
강안은 봄과 가을철에 홍수와 범람이 잦아서 거주와 경작에 적합치 않습니다. 강안 너머의 녹색 구릉지대에는 초목이 무성하여 비옥한 땅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수목은 단풍나무, 히말라야삼나무, 참나무, 밤나무, 낙엽송 등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온대 지역의 자연림보다는 키가 작았습니다.

많은 곳에서 강이 허물어지고 여러 지류로 갈라졌으며 강 양쪽 언덕으로부터는 세류(細流)가 흘러 들어왔습니다. 수심이 낮아 증기선 하나가 지나가기에도 어려웠습니다. 막대기, 그루터기가 널려 있고 유로의 꺾임이 심했습니다. 수이푼 강구에서 라즈돌노예까지의 거리는 30킬로미터에 못 미쳤으나 증기선으로 굽이굽이 가다보니 50킬로미터가 넘었습니다.

라즈돌노예를 앞두고 있을 때 주변의 경관이 일변하여  경탄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구릉지대에 서정적인 아름다움(soft beauty)이 흘렀고 대지는 무척 기름져 보였습니다. 곳곳에 숲이 조성되어 있었고 사이사이에 둥그런 형태의 경작지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인공적으로 개간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가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였습니다. 개간한 주인공은 누구이며 왜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약간의 조선인과 중국인이 거주한다고 합니다. 허나, 약탈을 일삼는 마적떼가 횡행하여 숨어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라즈돌노예 마을은 강 좌안의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데 약 40호의 통나무 집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집 주변엔 작은 목장들이 있었고 멋진 가축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타고온 파이오니어호는 거기까지였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세 필의 말이 끄는 역마차에 올라 육로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2시간이나 왔고 저녁이 되었지만 강행군을 이어갔습니다. 마차는 채찍 소리, 이랴아! 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초원을 질주하였습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니 꽃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야생 백합이 지천에 만발해 있엇고 다른 야생화들도 다투어 피어 있었습니다.

16키로미터 남짓 달려 저녁 8시에 바란노브스캬(Baranovskya)라는 역참에 들렸습니다. 차를 한 잔 마시고 휴식을 취한 뒤 말을 바꾸어 내리 달렸습니다. 탁 트인 시원한 경관이 무척 아름다웠고 땅은 역시 기름져 보였습니다.

마을이나 농가가 있을 법 한데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집 한 채, 사람 한 명, 동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0여 킬로미터를 달리니 마침내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더군요.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니콜스카야(Nikolskaya 또는 니콜스키Nikolski)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일대의 땅은 비옥하고 농업용으로 쉽게 개간할 수 있어 보였습니다. 주민들은 거개가 농부들이었습니다. 호밀을 비롯한 곡식을 굉장이 많이 재배하고 채소 농사도 대대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여름철에 두 차례 수확을 할 수 있고 야생 채소도 식탁에 올랐습니다.

조선인뿐 아니라 러시아인, 중국인이 혼거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외국인 이주자들은 러시아에 귀화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동시베리아 포병 연대의 본영(本營)이기도 했습니다. 이 지역에도 때로 마적떼가 출몰한다더군요. 그 이후로는 조선인이 대한 기록이 우리의 여행기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어떤 삶을 영위했을까요? 낯선 이국 땅, 마적떼가 횡행하는 곳에서 과연 제대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1894년 8월, 그러니까 우리가 지나간 지 12년 후에 이 지역을 방문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긴 영국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사벨라 비숍 여사로 그녀는 1897년에 출판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 한 장을 할애하여 연해주 조선인들의 실상을 자세히 적었습니다. 그녀는 1894년 8월 하순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에서 여러 조선인 마을를 방문하고 조선인들을 만났습니다. 체험기의 일부입니다. 
 
"러시아 경찰 서장이 나를 조선인 마을에 안내해 주었다. 그곳 조선인 농부들은 생활이 부유한 편이었다. 일부는 러시아 군대에 말과 곡식을 납품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을 능가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야윈 소를 사들여 살찌게 키워 팔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조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을 것이다. "

"어느 여행자도 내가 (연해주) 조선 사람의 가정에서 받은 것 보다 더욱 좋은 환경에서 더욱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이 곳 남자들은 국내와는 달리 남성다움과 독립심이 강하다. 양반의 거드름과 농부의 어슬렁대는 태도가 여기에선 민첩한 행동으로 바뀌었다. 여기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많지만, 번 돈을 짜내는 양반과 관리는 없다.

예전에 나는 조선인들이 열등 민족으로서 삶의 희망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나, 연해주에서 생각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근면하고 품성이 우수하다. 국내의 조선인들도 정직한 정부가 있고 수탈만 없다면 발전할 것이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