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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 개혁을 두고 여러 시민기자들의 글이 들어와 싣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한국 교육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환영합니다.[편집자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가 시행된 18일 오전 서울 상암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가 시행된 6월 18일 오전 서울 상암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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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월드컵이 치러지던 2002년, 나는 대한민국의 고3이었다. 원하는 것이 확고하고, 목표가 뚜렷하며, 성향상 남과의 경쟁보다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 더 의미를 두던 나였지만, 대학 입시를 위해 버티던 고등학교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스파르타 기숙 학원'에서 방학을 보내고 온 누군가의 성적이 갑자기 오르면 어쩐지 불안해져 집에 와서 펑펑 울었고, 자타공인 '수포자'이면서도 대입을 위해선 포기하면 안 되었던 수학 과목의 성적은 도무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괴로웠다. 

대학만 가면...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겐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 전공, 들어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외우고 다닌다는, 서성한중경외시 중 한 군데의 영어통번역전공. 한창 영어에 빠져 있던 나를 계속해서 지원해주고 싶었던 부모님은 집에 전화세가 밀려 전화가 끊기는 한이 있어도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영어학원비는 끊기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셨다. 평생 돈 안되는 숟가락 공장을 돌리는 아빠와 떡집, 빵집, 화장품 외판원 일을 번갈아 하던 엄마였다.

언어영역, 외국어 영역 점수는 좋은데 그놈의 수리영역이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 나는 염치 불구하고 '딱 막판 3, 4개월만 수학 과외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엄마 아빠는 그 요구를 말없이 들어주었다.  당시 내가 원하던 그 대학 그 전공은 언어, 수리, 외국어 3개 영역의 합산 점수+논술로 당락을 가르던 때였기에 수포자이면서도 수학을 포기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부모의 '등골브레이커'를 자임하던 나는 운 좋게도 원하는 '인(in)서울' 대학, 원하는 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됐다. 집안 형편상 지방 국립대를 지원하기를 원했던 아빠의 부탁을 어기고 꾸역꾸역 넣은,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대학 그 과였다. 이미 꿈이 아니라 점수에 맞춰 지원 대학을 가늠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이던 때, 나는 내가 원하던 곳에 정확히, 그것도 4년 장학금을 받고 갈 수 있게 됐다.

염치없이 없는 형편에 돈 퍼붓게 만든 그 미친 입시 터널을 지나왔으니 뭐가 되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의 기숙사로 올라가던 날, 고속버스에선 새 대통령의 취임식 장면이 흘러나왔고, 차창 밖에는 첫 아이를 드디어 세상으로 내보내며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가 있었다. 

착각 

원하던 대학, 원하던 전공에 들어갔으니 이젠 내가 원하는 길로 거침없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입시라는 경쟁의 터널을 지나고 나니 눈앞에 놓인 대학 생활, 취업 준비, 모두가 다시 경쟁, 또 경쟁의 연속이었다. 새벽 라디오 방송으로 익힌 영어와 지방 소도시 학원에서 배운 영어로는 뚫을 수 없는 장벽이 겹겹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전공 수업에 들어가면 시작하는 말마다 "(외국) 살다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하고 운을 떼는 학생들이 나를 주눅들게 했고, 전공 교수는 지방 소도시 출신의 나를 비웃었다. 전공 심화를 위해 같은 분야 특수 대학원엘 가자면 다시 '대학원 입시를 위한 전문 학원'엘 다니는 게 대세였다.

많은 경우 결국 '돈' 문제로 귀결되었고, 4년 장학금을 받고도 알바를 여러개 뛰며 네 식구 생활비를 보태야 하는 상황에서 돈 주고 경쟁해야 하는 판에 차마 뛰어들 수가 없었다. 배경이 좋아서든 머리가 좋아서든 노오력이 엄청나서든, 세상에 이미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은 넘쳐났고, '이미 늦어버린' 나는 그걸 따라잡을 배경도, 머리도, 노오오오력도 한참 모자랐다. 그래서 나는 그 판에서 물러났다.

물러나고 보니 갈 곳이 없었다. 서울에서 영어학원 강사 일을 조금 하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으로 떠났고, 중부 작은 도시에 살며 8년을 보냈다. 경제적 지위는 한국에서보다도 더 떨어졌고, 직업 선택의 폭도 더 좁아졌다. 그래도 차라리 한적한 미국 소도시에서 적당히 일하면서 계속 살고 싶었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언어를 마음껏 쓸 수 있고, 돈 들여 경쟁하는 판에 꾸역꾸역 들어가진 않아도 되니까. 

돌아온 한국, 어떤 면에선 더 악화된

하지만 어디 인생에 내 뜻대로 되는 게 있던가. 어쩔 수 없이 8년여의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것이 작년이다. 돌아온 한국에서, 당장의 생계를 위해 뛰어들 곳은 또다시 학원 뿐이었다. 학원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각종 영어사교육을 섭렵해 이만큼의 영어 실력을 쌓은 사람인지라, 학원을 무조건 나쁘게 보진 않는다. 문제는 학원이란 곳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괴롭히게 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는 데 있다. 

학원의 풍경은 여전했다. 어떤 면에선 더 악화된 것도 같았다. 10여년 전, 면접 보러 간 어느 학원에서 시강을 하는데 초등 고학년 아이들이 서로 '쟤는 지난 시간에 단어를 00개 틀려서 맞아야 된다, 나는 한 개도 안 틀렸으니까 사탕 주시면 된다' 하고 아우성치는 장면을 보고 도망쳐 나온 일이 있다. 아이들을 그런 괴물로 길러내고 있던 그 학원엔 교실마다 CCTV가 돌아가고 있었고, 로비엔 그 모습을 보여주는 화면이 수십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면접을 다녀보니 요즘의 학원은 그보단 '고급지고', '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데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재미있게 수업하는 곳이라고 이름난 데라 해도, 제아무리 괜찮은 교사들이 있다 해도, 좁디 좁은 교실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아이들을 보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 늘 조용하고 어딘지 침울한 구석이 엿보이던 5학년 아이는 '꿈이 뭐냐'는 나의 말에 '중소기업에 취직하는 거'라고 말해서 나를 우울하게 했다. 똑부러지는 인상의 5학년 여자 아이 하나는 '공부 스트레스'로 신경성 위염과 두통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생들은 원치 않는 '영어말하기 대회'에 억지로 나가게 되어 고통받고 있었고, '학원 내 레벨업 테스트' 때문에 벼락치기 영어 시험 문제풀이를 강요당했다. 그리고 중학생들은 요상한 작문 수행평가 (단어 수 제한이 있거나 특정 문법 구문을 반드시 몇 개 이상 써야 하는,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쓰면 학원에서 해줬다는 뜻이므로 일부러라도 몇 개는 틀려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하는)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우리 교육의 나침반?
 
10일 남은 대학수학능력시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0일 앞으로 다가온 4일 오후 서울 노량진종로학원에서 수험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 10일 남은 대학수학능력시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0일 앞으로 다가온 2019년 11월 4일 오후 서울 노량진종로학원에서 수험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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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원 시민기자의 글("한국 교육은 늘 틀리고, 유럽 교육은 늘 옳은가")과 그에 이은 다른 분들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유럽 교육이 우리 교육의 나침반인 건 맞다"는 글과, "일타강사 따라하는 교사"였다는 분의 글을 읽으며, '일개 학원강사였던' 사람으로서도 한 줄 보태고 싶었다.

한창 놀아야 할 나이, 한창 놀아야 할 시간에 아이들이 우울한 얼굴로 시간 맞춰 이 학원 저 학원 전전하는 모습을 2020년에도 봐야 하는 게 진절머리가 났다. 많은 것이 멈춘 코로나 시국에도 학원과 독서실, 입시 준비만은 멈추지 않는 이 기이한 광경을 보며 몸서리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 교육의 나침반을 다른 어딘가에서 찾으려 할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고 싶다.  '더 좋은 교육 체제'를 찾기 위해 바깥으로 눈을 돌릴 게 아니라, 그래서 그걸 가지고 '이게 맞다 저게 맞다'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 아이들과 눈을 마주쳐야 하는 게 아니냐고. 우리 그동안 '저 멀리 좋은 곳' 얘긴 넘치도록 해오지 않았느냐고.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쉴새 없이 노란색 승합차에서 학원 건물로 토해내지는 그 많은 아이들을 보며,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학원 문을 걸어잠그고 아이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좋은 대학 - 좋은 직장 - 안정적으로 살기'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정작 원하던 대학, 원하던 전공을 마치고서도 그 뒤로도 이어진 끝없는 경쟁의 소용돌이에서 튕겨져 나온 나를 아이들은 이미 '어른'의 눈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꿈꾸는대로 흘러갈 수 있게 해 줄 순 없을까? 아니, 꿈이라도 좀 꿀 수 있게 아이의 시간, 아이의 삶을 되돌려줄 순 없을까? 그걸 꼭,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려야만 할 수 있을까? 답은 아이들의 눈 속에 있지 않을까?

새로운 길을 여는 끝장토론이 필요하다 

코로나로 학원 문을 두 달 넘게 닫게 되면서, 나는 그 핑계로 학원계를 빠져나와 완전히 다른 직종으로 이직을 했다. 새 직장에서 우리의 교육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은 고민을 시작했지만, 아직은 전혀 손에 잡히는 게 없다. 마음 같아서는 코로나를 탓해서라도 대학 입시를 당장 폐지해버렸으면 좋겠다. 수업 일수, 수능 일정, 숙제며 수행평가며 그만 따지고,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몇 주건 몇 달이건 끝장토론을 좀 벌여봤으면 좋겠다. 

그런 판이 벌어진다면, 나는 제일 먼저 일어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 대학은 꼭 가고 싶은 사람만, 공부를 깊이 하고 싶은 사람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공부에 흥미도 소질도 없는 사람은 억지로 대학엘 가지 않고도 자기가 원하는 길을 찾아 직업 교육을 받고, 그에 따라 직업을 찾고, 넉넉하게 먹고 살 만큼의 대가를 받으며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 물론 그 전에, 노동 현장의 안전과 모두의 인권부터 좀 제대로 챙기자. 김용균 전후로 벌써 몇 명인가. '안정적인 삶'을 위해 나의 적성이나 관심사에 상관 없이 교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지 않아도 되는, 무엇을 택해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보면 좋겠다. 그게 정말 그렇게나 불가능한 일일까? 

무엇보다도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불확실해 진 이때에 이르러서도 아이들의 입시 일정, 입시 불이익, 수업 일수, 성공적인 (또는 실패한) 원격 수업, P/F 평가, 이런 얘기들이 훨씬 더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 나는 너무나 못마땅하다.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강요에 의해서든 자발적으로든 '공부를 하는'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일 뿐이다. '공부 안/못 하는' 아이들, ' '형편이 안 되고 능력이 안 되는' 아이들은 코로나 시국의 교육 얘기에서도 많이들 빠져 있다. 이 아이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교육이란, 교육 개혁만으론 가능하지 않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교육의 본질과 목적은 어디에  

가끔 생각한다. 학창시절 나는 왜, 무엇을 위해 그렇게 내달렸던 걸까. 형편이 안 되어서, 능력이 안 되어서 끝내 가지 못했던 어떤 길을 에둘러서라도 뒤늦게 탐해보고 있는 지금, 그 질문은 더욱 뼛속깊이 파고든다.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친구 몇 외에는 이름자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주변 다른 친구들에게 무심했던 고3 시절, 나는 나의 행위가 굳이 어떤 '경쟁'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때 나는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와의 경쟁을 하는 중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다 한참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런 무심함과 무지마저 그나마 내가 '공부 잘하는 축'에 속했던 아이여서 가능했던 일이었음을. 

2002년, 모두가 월드컵의 열기에 휩싸였던 때. 나는 고3이었고, 어딘가에선 중학생 여자아이 둘이 처참한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몰라도 되는 '대한민국 고3'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지 나도 알아야 하는 거였다. 평생 '대한민국 고3'으로 살 것이 아니고, 한 나라의 '시민'으로 살자면 알아야 하는 것들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은데, 왜 나는 고3이란 이유로 그 모든 것에서 비켜나 있었던 걸까. 그게 가능한 나라에서 어떻게 '시민'이 길러질 수 있을까. 

대학 입학 후에야 그 사건의 전말을 보고 들으며 분노했지만 뒤늦은 분노에는 힘이 없었고, 나는 내가 짓지 않은 죄로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죄의식은 나의 기억을 2002년 말, 학교 앞에 내걸렸던 현수막 앞으로 데려갔다. 누구누구 SKY 합격이라는 현수막에 이어 등장한, 내 이름 석자와 '수석입학'이라는 문구가 박힌 현수막. 그걸 보며 엄청 좋아하진 않았지만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 현수막이 부끄러워 진 것 역시,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전으로도, 그 뒤로도 숱한 아이들이 목숨을 잃고 세상에서 그 귀하고 애틋한 이름들을 지워갔는데, 나는 현수막에, 책에, 지면에, 급여명세서에, 이름을 찍어갔다.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원해야 할 교육은, 더 이상 이런 모습이어선 안 된다. 

태그:#교육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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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엄마. <아이는 누가 길러요>를 썼다. 비영리단체 '교육을바꾸는사람들'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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