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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6월 29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성별, 장애, 나이, 국적 등으로 차별하지 않을 것을 규정해 놓은 이 법은 2007년 정부 입법으로 처음 발의된 바 있으나, 반발을 마주하며 폐기를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지난 14년간 진전과 후퇴를 거듭해온 차별금지법 논의가 이번엔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모두를 위한' 차별금지법이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전합니다.[편집자말]
6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의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제정 필요 의견을 밝히는 기자회견장 입구에서 일부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6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의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제정 필요 의견을 밝히는 기자회견장 입구에서 일부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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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주도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에 대한 보수 개신교계의 반발이 뜨겁다. '사회적 약자 보호에는 동의하지만 성소수자 보호가 목적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나쁜 차별금지법'이며 따라서 '한국교회 전체가 법 제정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일부 맘카페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동성애자로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을 촉구하는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불교계에서는 '모든 사람은 존재하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들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차별행위가 금지될 수 있도록 국회에 조속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한다'며 오체투지에 나섰다. 이에 개신교, 천주교와 원불교 등 타 종교도 가세했다. 갑론을박 속에 2007년부터 지금까지 7번이나 표류해온 차별금지법,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 것일까.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다. 현재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규정하는 특정한 카테고리(장애, 성별 등)에 속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다 다양한 범주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차별을 금지, 시정하도록 하는 평등법이다.

단순히 '성 소수자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며 법 제정을 반대하는 보수 개신교계의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직도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과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죽도록 노력해서 '쟁취'해야 했던 권리
 
지난 2일 '2020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행동 선포 - 대세는 이미 차별금지법! 평등에 합류하라!' 기자회견이 여의도 국회앞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빈곤사회연대,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한국한부모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지난 2일 "2020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행동 선포 - 대세는 이미 차별금지법! 평등에 합류하라!" 기자회견이 여의도 국회앞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빈곤사회연대,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한국한부모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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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타오카 아야카, 한국인이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두었고,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8살에 한국으로 이주해 한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았다. 이후 직장에 근무하며 30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차별하는 사회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짓궂은 아이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다문화가정이 점점 늘어나면서 모두가 같은 사회 구성원이라는 인식도 싹트기 시작했지만 30년 전 한국 사회는 다문화가정이라는 용어조차 없었을 때였다. '아야카짱'은 그야말로 이질적인, 어쩌면 또래 친구들에게는 외계인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대놓고 적대적인 새로운 사회에 던져진 나는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다. 불량 학생들이나 간다는 오락실이나 만화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혹여 나쁜 짓을 하다 들키면 남들보다 몇 배로 질책을 받고 배척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다.

공부 말고는 한 게 없다 보니 좋은 성적이 따라왔다. 모범생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선생님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칭찬이 늘었다. 놀리고 따돌리던 아이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하나둘 친구가 생겼다.

그렇게 표면상으로 나에 대한 차별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정체 모를 분노와 공허함을 느껴야 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나 권리는 개인이 죽도록 노력해서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야만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거라는 비틀린 사고를 갖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또 다른 차별의 벽에 부딪혔다. 일본 국적과 외국인등록증이 문제가 됐다. 대다수 기업의 입사 지원 시스템상 외국인등록증은 무용지물이었다. 한국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치열한 경쟁 속에 인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고 비교적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음에도,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나에게는 입사 지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정확한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라는 에러 메시지를 보며 좌절하기를 여러 날,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판단하에 귀화를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귀화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터라 나를 비롯해 가족들 모두 귀화 절차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어찌어찌 귀화허가신청서를 제출하고 나서야 서류와 면접 심사를 통과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대략 1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류 심사 후 우편으로 면접 통지를 받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그 기간 동안 합법적인 경제활동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다시 말해서 백수로 1년을 버텨야 한다는 것이었다.

1년을 기다려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별도 개명 신청은 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름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차별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소심한 저항 같은 것이기도 했다. 한국인 카타오카 아야카가 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회사에 입사했다.

입사 후 며칠이 지나자 사측에서는 다른 사원들이 불편할 수 있으니 일본 이름이 아닌 한국 이름을 사용했으면 한다고 했다. 일본 이름이 왜 다른 사원들을 불편하게 하는지 납득이 가지는 않았지만 사내에서는 이예가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이예가라는 이름으로 직장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유니크한 가족의 탄생

우여곡절 끝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의 사례를 거울삼아 4살 터울의 남동생은 귀화를 한 후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대견하게도 서류 심사와 1차 면접을 통과하고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최종 면접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남동생은 갑자기 합격하면 개명 신청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남동생이 지원한 재무부서는 주로 은행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는데 최종 면접에서 '평소 은행 업무를 볼 때 일본 이름 때문에 불편함은 없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순간 일본 이름을 보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동네 은행 창구 직원이 떠올랐단다. 실무를 하면서 이래저래 번거로운 일들이 많을 것 같다는 나름의 판단과 함께 입사에 대한 자신의 뜨거운 의지와 패기를 보여주겠다며 개명을 하겠다고 대답했단다.

그 결과 남동생은 최종 합격자가 되었고 약속대로 개명 신청을 했다. 그렇게 카타오카 아야카의 남동생은 한양 이씨의 시조 이○○씨가 되었다. 나는 단단히 꼬인 사람이라서 그랬는지 만약 남동생이 개명을 하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최종 합격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씁쓸하게 남았다.

어쨌든 아들 딸 모두 한국 사회에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 결과물로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일본 이름을 가진 한국인 딸과 한양 이씨의 시조인 아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유니크'한 가족이 탄생했다.

어린 시절 나는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나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을 원망했고 내 처지를 비관했다. 한때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올라 차별을 극복하고 스스로 존엄성을 쟁취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글픈 착각이었다. 나를 둘러싼 차별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우등생이 되어야만 인정받고 받아들여진다는 것, 즉 나에게만 다른 잣대가 적용됐다는 그 자체가 차별인 거였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은 한 개인의 불행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불평등에 기인한 문제였다는 것을, 내가 원망했던 부모님조차도 차별하는 사회 속에서 상처받은 또 하나의 피해자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도 외국인 신분이 취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고 20대 꽃다운 나이에 1년이라는 시간을 마음 졸이며 하릴없이 흘려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 이름이 은행 업무를 포함해서 평범한 일상 속에 불편함을 야기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면접관은 애초에 그런 우려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남동생은 패기 넘치는 개명 선언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7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차별금지법
 
6월 29일 정의당 심상정 대표, 배진교 원대대표, 장혜영, 강은미, 이은주, 류호정 의원과 부문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21대 국회 차별금지법 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6월 29일 정의당 심상정 대표, 배진교 원대대표, 장혜영, 강은미, 이은주, 류호정 의원과 부문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21대 국회 차별금지법 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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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난 30년 동안 한국 사회는 더 나은 사회로 변화해 왔다. 혼혈아나 이중문화가족이라는 차별적인 용어 대신 다문화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9년 7월부터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본격 시행되어 이른바 '블라인드 채용'이 공기업, 대기업을 넘어 민간기업에도 점차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다문화가정을 위한 나눔 행사에 참석한 공직자가 '튀기'와 '잡종강세'라는 차별적 언행으로 구설에 오른다. 또 미흡한 현행 고용허가제의 족쇄에 묶여 백만 명 넘는 이주노동자가 정당한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만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니며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을 역차별하고 처벌하려는 법도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보편적이고 마땅히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 우리 모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평등법이며 우리 사회의 인권감수성을 높이고 평등하고 다채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의 발현이다.

7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차별금지법, 이제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 다름이 틀림이 되지 않는 사회를 향한 의미 있는 한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다.

태그:#차별금지법, #평등법,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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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방인 같지 않은 이방인 AY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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