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희와 녹양> 포스터

영화 <보희와 녹양> 포스터 ⓒ KT&G 상상마당

 
"불알친구"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당찬 녹양(김주아)과 이런 "녹양처럼 되고 싶"은 보희(안지호). 불알친구라는 말대로 꽤 어려서부터 우정을 이어온 둘은 한쪽 부모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작 둘은 한쪽 부모가 없는 채로 별 문제 없이 살아가지만, 학교 급우로부터 "고아들"이라는 혐오성 언어폭력을 종종 감수해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녹양과 보희는 꿋꿋하지만, 한쪽 부모가 엄연히 있는 급우를 "고아들"이라고 멸칭하는 이 목불인견의 세계가 녹양과 보희가 사는 세상의 한 부분인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허나 저런 부류의 반인격적인 혐오의 벽을 '넘사벽'으로 설정하고 애면글면할 이유가 녹양과 보희에게는 없다. 오히려 아예 그 벽이 없는 양 무화 시키는 것이 녹양과 보희가 살아가는 법이다. 이렇게 의연하게 마이 웨이 우정을 쌓아가는 절친 녹양과 보희는 어느 날, 보희의 '아빠 찾기'에 나서게 되는데, 보희는 마침내 아빠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보희는 왜 갑자기 아빠를 찾겠다고 나선 것일까.
 
보희는 싱글 맘인 엄마(신동미)가 술을 마시고 낯선 남자와 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민다. 나만의 엄마였던 존재를 다른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는 건 열네 살 사춘기 소년을 불안하게 만든다. 엄마와 불화하고 불쑥 가출한 보희는 배다른 누나 남희(김소라)를 찾아간다. 하지만 배다른 누나라는 것은 보희의 착각이었을 뿐, 남희는 사촌누나였다. 하루 저녁을 남희의 집에서 묵게 된 보희는 뜻하지 않게 아빠의 흔적을 찾게 된다.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안자, 보희는 설레기 시작한다.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 컷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 컷 ⓒ KT&G 상상마당

 
보희의 어릴 적 기억으로는 좀 노는 누나였던 남희는 번듯한 어른이 되어 있다. 십 여 년 만에 만난 보희를 남희가 보자 마자 단박에 알아보는 영화의 설정은 무리수임에 틀림없지만, 영화는 피가 섞인 사촌 남희보다는 오히려, 타인인 남희의 동거남 성욱(서현우)을 경유해 보다 가족다움을 연출한다. 성욱의 사연을 영화는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성욱 또한 사회가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가족의 범주에 편입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성욱이 보희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속 깊은 정은 정상가족이라는 허상에 기대지 않고도 가족을 능가하는 정서적 교감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옥에 티라 할 만한 아쉬운 면도 있는데, 목욕탕 신이 그렇다. 남탕이라는 곳은 너무도 빈번히 남자가 되거나 남자끼리의 정서적 교감을 획득하는 장소로 전유되곤 한다. 아빠와 목욕탕을 가본 적이 없는 보희에게 남탕에서 성욱이 보이는 태도는 마치 아빠를 대리하는 듯하다. 마치 보희에게 아빠가 없는 결여가 남자끼리 만의 젠더적 교감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말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남자인 가부장 아빠이기 보다, 든든한 지지자로서의 어른인 아빠이지 않을까.
 
영화는 '아빠 찾기' 과정의 초조함과 고단함을 성욱을 한 축으로 간간이 새어 나오는 웃음으로 해소해가면서, 또 한 축으로는 보희의 절친인 녹양을 매개해 그녀의 장기인 맹랑함과 대담함으로 긴장을 유지시킨다.

엄마 없이 자랐지만 구김이라곤 찾을 수 없는 통 큰 녹양.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다큐를 찍으며 보희와 세상을 들여다본다. 다큐 감독이 되겠다는, 어찌 보면 허무맹랑하달 수밖에 없는 꿈을 키우지만, 녹양은 그 꿈의 실현 가능성 따위로 현재의 희열을 저당 잡히지 않는다. 아빠를 찾아서 뭐 하냐는 성욱의 힐난에, "찾고 싶으면 찾는 거고 찍고 싶으면 찍는 거지, 꼭 뭘 해야만 하는 거"냐는 녹양의 일갈은 묻는 어른을 우두망찰하게 한다. 열네 살 아이 녹양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지.'
 
이런 통 큰 녹양이라고 해서 아예 아픔이 없을쏜가. 엄마 대신인 할머니가 있고 그 할머니는 손녀를 끔찍이 챙기지만, 조손간에 빈 곳이 없을 수는 없다. 손녀를 키우고 산 평생이 할머니는 허무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혼자 설움에 겨운 어느 밤, 인삼 담금주를 통째로 비우지만, 녹양은 그런 할머니의 쓸쓸함도 이해하고 사랑한다. 할머니가 술은 다 비우고 덜렁 인삼만 남겨 놓은 술병을 대견해하는 이 열네 살의 마음은 결코 어리지 않다. 이런 대견한 녹양을 관객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보희를 보다 보니 어딘지 낯익다. 아,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의 '은호'를 연기했던 배우였네. 진짜 많이 컸다.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보희의 목소리 때문에 이 아이가 은호라는 게 덜 실감 나게 하지만, 웃는 입매하며 툭 던질 때의 가벼운 퉁명스러움은 두 사람이 한 배우임을 증명한다. 아역 배우가 훤칠해지거나 성숙해져서 등장하면 내가 키운 것도 아니면서 왜 뿌듯한 걸까. 안지호는 지금도 좋은 배우다. 더 좋은 배우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가출한 보희는 능숙한 솜씨로 김치찌개를 끓여 성욱과 저녁을 먹는다. 성욱이 식탐 좋게 먹는 품새를 보며 녹양과 닮았다고 한 말은, 보희로서는 최고의 찬사였을 것이다. 무뚝뚝하지만 서서히 곁을 내주며 보희와 친구가 돼가는 성욱과,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한 번도 저버리지 않은 절친 녹양이 보희에겐 매우 소중한 존재들일 테니.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 컷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 컷 ⓒ KT&G 상상마당

 
보희의 절친이 뜻밖에 '여사친' 녹양이라는 사실에, 어떻게 계집애랑 비슷하다고 했냐며 통박을 놓는 성욱에게, 당찬 녹양은 일성을 토한다. 여자가 뭐 어때서? 성욱이 만들어준 칵테일을 눈빛 하나 풀림 없이 거뜬히 해치운 후, 인삼주 한 병을 통째로 비운 할머니의 손녀라는 기개를 당당히 과시하는 녹양에게 성욱은 어설픈 꼰대질을 사과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라도 무시하면 혼나야 한다.
 
아빠의 단서를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아빠의 지인인 한 남자를 통해 관객은, 아빠가 보희를 떠난 단서와 어쩌면 이것이 보희 부모가 이혼하게 된 이유일지 모른다는 꽤 합리적인 추측에 이른다. 그런데 불쑥, 이런 의구심이 든다. 이혼은 할 수 있지만 아이는 돌볼 수 있지 않은가. 아빠는 왜 보희를 돌보지 않은 걸까?
 
아빠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하자 보희는 엄마에게 아빠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청하지만, 엄마는 "조금 더 크면"이라며 진실을 유예시키려 한다. 엄마가 피하고 싶었던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이를 승인하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아이에게 아빠의 내밀한 스토리와 그로 인한 부부의 결별을 고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고, 엄마에게 남편을 잃은 일 또한 분명 아픔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보희에게 아빠를 상실할 이유가 돼서는 안 되지 않았을까.

아이가 부모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을 납득할 수 있는 최적의 나이란 몇 살일까.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각각 살아온 삶의 궤적이 크거나 적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지만, 나이가 절대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열네 살은 조금 더 기다려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삶이 무너지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보희가 이미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오히려 어린 네가 뭘 알겠냐며 제쳐버리는 몰이해가 더 위험할 수 있다.
 
마침내 아빠를 찾아낸 보희는 그의 비밀을 알아채고 이로 인해 타격 받지만, 이를 딛고 일어선다. 밤새 혼란으로 쓰린 마음을 부여잡다, 희뿜해지는 새벽녘, 뜨는 해를 보며 강물로 서서히 들어가는 보희는 어느새 한 굽이를 넘어서 있다. 강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가(어떤 관객은 약간의 불길함을 가질 수도 있는 연출이었다), 마치 양수 속을 유영하듯 고요히 헤엄치는 모습에서 관객은 안도한다. 흐르는 강물에 상처를 씻어내고 돌아오는 보희의 물기 흐르는 몸을 닦아주고 싶은 것은 비단 엄마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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