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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에서는 주인공 월터와 사진작가 숀이 등장한다. 월터는 고생 끝에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숀과 조우한다. 눈표범을 찍기 위해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기다리던 숀은 실제로 눈표범이 나타나자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눈표범을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는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Beautiful things don't ask for attention."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운 자태로, 아름다운 존재로 거기에 머무를 뿐이다.

사진은 대상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드러난다. 숀은 아름다운 것들을 찍어내는 것이 자신의 일이면서도 실제로 아름다운 존재와 조우하는 그 순간, 그 존재와의 만남에서 오는 경이로움에 압도당했다. 순간 속에서 영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예쁜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부모도 아이와 함께하는 삶 속에서 찰나의 영원을 느낀다.

사진 한 장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
 
노을을 보며 잠시 멈춘 곳.
▲ 마우이 해변 노을을 보며 잠시 멈춘 곳.
ⓒ 양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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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편은 신혼여행 때부터 카메라를 들고다니며 직접 사진을 찍었다. 현지 스냅촬영처럼 전문 사진작가의 손을 거치면 더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이미 나는 웨딩촬영을 통해 없던 S라인을 발견했고, 남편의 좁던 어깨가 넓어지는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포토샵과 작가님의 촬영 기술은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이벤트를 예쁘게 장식해줬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 지금 다시 사진을 꺼내 보면, 우리가 직접 찍었던 것들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진 찍을 장소와 포즈, 그리고 사진을 찍던 시점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즉흥적이었고 재미있었다. 오아후에서 수중 스쿠터 체험을 하겠다고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하게 배 멀미 했던 표정, 마우이의 한 도로를 끝없이 달리며 마주했던 파랗고 예쁜 하늘,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노을을 보고 무작정 차에서 내려 셔터를 눌러대던 순간들. 촬영장에 세팅된 컨셉이 아니라 우연히 포착했던 우리의 이야기들이 더 의미 깊었다.

가성비를 따지기 좋아하는 남편은 큰아이 만삭 즈음, 조리원 연계 스튜디오에 만삭사진을 찍으러 갈 때 신신당부했다. 아이 사진은 본인이 열심히 찍어줄 테니 성장앨범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나는 처음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무료 촬영 서비스라는 말에 신이 나서 가보니 막상 원본은 돈 주고 사야 하는 거였고, 무료로 증정되는 사진은 원본이 아닌 포토샵을 마친 한두 장이었다. '무료 촬영 서비스'라는 건 고객을 스튜디오로 발걸음하게 만드는 홍보 기술이었다.

만삭부터 50일, 100일, 그리고 돌까지 연달아 성장앨범을 촬영할 고객들에게 컨셉 사진을 덤으로 끼워주기도 하고 가족사진 서비스를 넣어주기도 하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만삭 사진만 찍고 빠지는 게 손해란 생각까지 들었다. 애초부터 마음에 드는 스튜디오를 골랐어야 한다는 걸, 사진 계약을 할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 갔던 조리원 연계 스튜디오는 사진이 정말 엉망이었다. 미련 없이 서비스 사진만 받는 걸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스튜디오에서 봤던 아이들의 예쁜 사진이 꽤 오랫동안 머리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이후에 나는 산후 도우미 업체에서 제공하는 무료 만삭 사진 서비스도 받으러 갔다. 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사진만 받고 오자며 남편을 설득했다. 심지어 아기 50일까지 무료 촬영을 해준다는데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어이 없게도 스튜디오가 마음에 쏙 들었다. 50일 촬영을 하고나서, 예쁜 소품과 깜찍한 의상을 입은 딸의 원본 사진을 안 살래야 안 살 수가 없었다. 이 맛에 성장 앨범을 진행하는구나 공감이 갔다. 남편은 혹시나 비싼 성장 앨범을 진행하자고 마음을 바꿀까 봐 내 눈치를 살폈다. 우리는 결국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직접 찍어주자고 합의한 후, 돌 사진만큼은 돈 주고 예쁘게 찍자고 타협했다.

시간은 참 빨리 흘렀고, 아이 100일, 200일, 300일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돌을 맞이해 예쁜 스튜디오에서 단품 촬영을 마친 후, 혼자 포토 앨범을 만들면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딸의 생애 첫 1년은 여전히 눈에 생생했다. 사진을 찍던 순간의 감정, 아이의 표정, 지켜보던 남편의 웃음 소리, 그 모든 것들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수많은 찰나를 찍은 사진들은 그날의 이야기를 재생했다.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딸과의 추억이 필름처럼 돌아갔다.

그럼에도 찍지 못한 인생샷이 있긴 있다. 아이와 함께하는 찰나를 만끽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는 것조차 미루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엄마를 알아보기 시작한 아이가 반짝반짝 웃던 순간, 엄마를 놀래켜 주려고 숨어있던 책상 너머로 들리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들.

이 뿐일까. 엉금엉금 기어 오던 아이의 표정, 스르륵 잠이 들기 직전 느릿느릿 깜빡이던 눈꺼풀, 닭봉을 크게 한 입 뜯어서 오물오물 씹던 야무진 입, 밤새 열이 올라 고생하다가 다음 날 핼쓱해진 얼굴로 언제 그랬냐는 듯 씨익 웃던 미소, 민들레 홀씨를 처음 불어본 후로 길가에 민들레 홀씨만 찾으러 다니던 호기심 가득한 얼굴.   
 
자매컷
▲ 토곡요에서 자매컷
ⓒ 양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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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립고 뭉클한 시절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나는 아이들과 함께한 오늘 하루가, 지금도 스쳐 지나가고 있는 순간순간들이 계속 그립다. 그립고 그리워서 이 순간 속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어진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한 순간들이 나와 내 딸, 서로의 인생에 반짝반짝 빛나는 흔적을 새겨주었으면 좋겠다. 사진으로 남은 아이의 인생 첫 장이, 그리고 찍지 못했으나 나의 마음 속에 새겨진 예쁜 추억들이 찰나의 영원함으로 오늘도 아름답게 빛난다.

태그:#성장앨범, #자매사진, #찰나의영원함, #내맘속에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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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화예술기획자/ 『오늘이라는 계절』 (2022.04, 새새벽출판사) 『사는 게 만약 뜨거운 연주라면』 (2023.10, 학이사) (주)비커밍웨이브 대표, (사)담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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