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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초암정원에서 맛 본 살구. 어렸을 때 먹던 살구의 추억을 떠올려 준다. ⓒ 이돈삼
 
"살구 따서 드셔 보세요. 농약 한 방울 안 한 겁니다. 매끄럽지 않게 생겼어도, 맛이 그만이에요. 비파도 맛있게 익었네. 비파도 드셔 보세요. 눈으로만 보면 뭔 재미가 있어요? 따서 맛도 봐야지."
 
김재기(82) 보성 초암정원 대표의 말이다. 정원을 함께 거닐던 김 대표는 살구며 비파, 보리수, 앵두를 맘껏 따서 먹으라고 했다. 혼자서 따서 먹으려고 심고 가꾼 것이 결코 아니라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난해 가을에도 허락도 받지 않고 감을 여러 개 따 먹었습니다. 단감도, 홍시도 맛있던데요." 나도 모르게 초암정원의 과일을 따서 먹었던 지난날의 행동을 고백하고 말았다.
            
"잘 하셨어요. 초암정원에 오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먹을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아무 때나 따서 드세요. 우리 아기들도 먹고, 손님들도 따서 드시고, 새도 먹고 동물도 먹게 하려고 심은 거니까요. 그래야 저도 뿌듯하죠."
 
김 대표의 말이다. 그동안 주변을 살피면서 하나씩 따서 먹었는데, 외려 칭찬으로 돌아온다. 정원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서는 이유다.
 
김재기 보성 초암정원 대표. 지난 60년 동안 집 주변에 나무를 심으며 정원을 가꿔왔다. ⓒ 이돈삼
           
초암정원에서 내려다 본 득량만과 예당평야. 초암정원은 드넓은 들과 바다를 마당으로 삼고 있다. ⓒ 이돈삼
 
초암정원은 과실수가 지천인 정원이다. 사철 푸른 상록정원이고, 난대정원이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초암마을에 속한다. 마을이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풀음마을'로도 불리는 곳이다. 전라남도 지정 민간정원이다.
 
정원은 5대째 살고 있는 200년 된 종가의 옛집을 중심으로 조성돼 있다. 면적이 5만㎡에 달한다. 이파리가 붉은 홍가시나무, 이파리가 동백과 차나무를 닮은 산다화(애기동백)가 많다. 호랑가시나무, 감탕나무, 종려나무, 치자나무, 돈나무, 감나무, 살구나무도 많다. 소나무와 편백나무, 대나무가 숲을 이뤄 정원을 둘러싸고 있다. 나무의 종류가 200여 종에 이른다.
 
"제 (친)어머니가 스물여덟에 돌아가셨어요. 그때 내 나이 8살이었죠. 밑으로 2년 터울의 동생 세 명이 있었습니다. 막내 여동생은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갔어요. 새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김 대표가 밝힌 가족사다.
            
그는 18살 때 대학에 들어갔다. 휑한 캠퍼스에서 인근의 산뜻한 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뻤다. 친어머니의 산소를 단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소 부근에 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지금 생각하면, 초암정원의 시작이었다.
 
새어머니를 맞이한 그는 키워주신 게 고마워 또 꽃과 나무를 심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큰 나무는 심지 못했다.
 
초암정원에 핀 석류꽃. 김재기 어르신이 가꿔 온 초암정원은 전라남도의 민간정원으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
  
보성 초암정원에서 만난 비파. 남녘의 바닷가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열매다. ⓒ 이돈삼
 
시행착오도 수없이 되풀이했다. 지난 60여 년 동안 틈만 나면 그렇게 했다. 가끔 놀러 오는 손자들이 뛰어놀다 다칠까 봐, 위험하다 싶은 곳은 다 손을 봤다. 손자들이 재밌게 타고 놀 수 있도록 나무그네와 미니 짚라인도 만들었다.
 
김 대표의 애틋한 마음은 가족에만 머물지 않는다. 숲속 동물과 새들도 식구로 여긴다. 정원에 돌 절구(확독)를 여러 개 두고, 물을 가득 채워둔 이유다. 숲에서 내려와 맘 놓고 쉬면서 목을 축이라는 배려다.
      
"남의 손을 어떻게 빌려? 내 손으로 다 했지. 지금은 동생(김국민, 80)이 관리하고 있는데, 고생 많이 해. 날마다 풀 뽑고, 나뭇가지 솎아주며 손질하고, 일이 끝이 없지. 근데 별 수가 없네. 내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초암정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김국민 어르신. 김재기 대표의 동생이다. ⓒ 이돈삼
  
보성 초암정원의 감나무 터널. 작년 가을에 감이 주렁주렁 열렸던 곳이다. ⓒ 이돈삼
 
어머니로 시작된 김 대표의 가족 이야기가 동생에게로 이어진다. 동생도 "정원을 관리한다는 게 보통 고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보람이 크다"면서 "내 부모님이고, 내가 살던 집"이라며 맞장구를 친다.
            
"이게 무슨 나무인 줄 아실까? 애국가에 나오는 나무야.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철갑송입니다. 장군의 갑옷처럼 굳세게 보이잖아. 저건 대왕소나무이고. 이건 고려영산홍, 수령 100년이 넘었어요. 이 꽃 참 예쁘죠? 협죽도, 유도화라고 하는데 독성을 지니고 있어. 젓가락으로 쓰지 말라는 거야. 이건 황매화, 매화라지만 장미에 가깝고. 이건 목단(모란), 이것은 골담초. 저것은 자목련, 목서, 산수유..."
 
그의 꽃과 나무 이야기가 한없이 이어진다. 광풍정에서 잠시 쉬는 그의 얼굴에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광풍정은 그가 선조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지내려고 무덤자리 한쪽에 세운 정자다.
 
"나무의 속을 한번 보세요. 겉으로 보이는 데만 손질해서 모양을 낸 게 아니고, 속까지 다 솎아주기를 했어요. 햇볕이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도록. 그래야 나무가 좋아하고, 건강하게 자라거든요."
 

세세한 데까지도 신경을 쓰는 그의 세심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몸집은 작아도, 열정만큼은 더없이 큰 김 대표다. 득량만과 예당평야를 마당으로 삼은 초암정원도 한없이 넓어 보인다.
 
초암정원의 군데군데 놓여있는 돌 절구. 절구에는 물이 가득 들어있다. 숲에서 사는 새와 동물들을 위한 배려다. ⓒ 이돈삼
  
진분홍 색의 꽃을 피운 협죽도(유도화). 독성을 지니고 있어 예부터 젓가락으로 쓰지 말라는 나무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립니다.

태그:#초암정원, #김재기, #보성초암정원, #민간정원, #보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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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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