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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베란다 창고에는 이삿짐센터 마크가 찍혀 있는 종이 상자가 몇 개 있다. 이사 온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아직 풀지 않고 그대로 있는 짐이다.

제일 큰 상자는 음악 시디(CD)다. 그동안 클래식, 재즈 를 많이 모아 시디 수납장이 따로 있었다. 스트리밍이 편하다 보니, 점점 시디를 꺼내 듣지 않게 됐다. 음악을 좋아하는 후배에게 모두 줘야겠다 싶어 이삿짐 상자로 꾸렸다.

이사를 한 뒤, 막상 후배에게 연락하려니 '그래도 마지막인데 시디를 한 번씩은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해외에서 어렵게 구했던 바흐 시디는 빼놓을까? 첫 월급 탄 기념으로 산 빌리 할리데이 시디도 빼야 하지 않을까?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 박스 테이프조차 뜯지 않았다.
 
우리가 물건을 잘 못 버리는 것은 언제 사용할지 모른다는 실용적인 목적보다 물건에 얽힌 추억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물건을 잘 못 버리는 것은 언제 사용할지 모른다는 실용적인 목적보다 물건에 얽힌 추억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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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상자는 두 딸의 어릴 적 물건을 모아둔 상자다. 이 상자는 여러 번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일기, 상장, 편지도 있지만 두꺼운 스케치북이 제일 많다. 처음 그린 '우리 가족', '유치원 소풍 간 날' 등 어릴 적 고사리손으로 그린 그림을 보니 차마 정리할 수 없었다. '사진으로 남겨놓고 버리자' 싶어 다시 상자를 열었다. 그 색감을 사진으로 담을 수 없어 포기하고 도로 상자를 닫았다.

묵은 짐은 손으로 만져지는 물건뿐 아니다. 핸드폰 안에도 사진과 음악이 쌓여 있다. 핸드폰에는 칠천 장 가까운 사진이 들어있다. 월정액을 내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데도, 무제한 다운로드에 욕심이 나서 보관함에 내려받은 음악이 몇 백 곡이다. 컴퓨터 속 쌓인 짐은 또 어떠한가. 제목만 봐서는 내용을 알 수 없는 파일이 수두룩하다.

인터넷 세상에도 내 묵은 짐은 여기저기 널려 있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나는 무려 오십 개가 넘는 카페(커뮤니티)의 회원이었다.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급하게 가입했거나 재봉, 스테인리스 팬, 베이킹 등 한때 관심 있어서 들어갔지만,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카페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2007년에 내가 만든 카페도 있다. 혼자 글을 올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카페이름도 '숨어있기 좋은 방'. 글은 달랑 2개. 그중 하나가 '둘리'였다.

때는 무려 2007년 3월. 정수기 점검 관리자가 바뀌어, 새로운 분이 처음 방문했다. "어머, 제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과 많이 닮으셨어요. 선생님 별명이 '둘리'였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중학교 때 별명이 둘리였기 때문이다.

한참 잊고 있었던 별명을 들으니 중학교 친구들이 생각났다. 항상 세 명이 붙어 다녔는데, 각각 애니메이션 <둘리>에 나오는 캐릭터 둘리, 또치, 도우너로 불렸다. 신기하게도 정말 닮았었다. 지금은 모두 연락이 끊기고 말았지만.... 이런 내용의 글.

작년 연말에 참석한 친목 모임이 생각나 옛날 글이 더 뭉클하게 다가왔다. 지인이 의미 있는 심리 게임을 하자며, '나는~' 으로 시작하는 한 문장을 여섯 장의 빈 카드에 각각 쓰라고 했다.

완성된 여섯 장의 카드를 공개한 후, 한 장씩 버리며 이유를 말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어릴 적 <둘리>라는 별명이 있었다'는 카드를 제일 먼저 버리려다 멈칫했다. 별명에 배어든 추억까지 버리는 것 같았다. 잊고 지낸 또치와 도우너의 얼굴도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결국 카드를 마지막 전까지 들고 있었다.

우리가 물건을 잘 못 버리는 것은 언제 사용할지 모른다는 실용적인 목적보다 물건에 얽힌 추억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음악 시디를 보면 그 시디를 고르던 레코드 가게의 분위기와 냄새까지 생각난다.

아이들의 물건 속 삐뚤빼뚤한 글씨와 귀여운 그림에서 그 시절 아이들의 온기가 다시 살아난다. 오래된 별명을 적은 카드를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도 추억 속에서 우리 삼총사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까르르르 소리 내며 웃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걸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어요?" 창고 문을 열고 한숨을 쉬는 나와는 달리,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래, 딸들에게 본인들의 그림을 각자 처분하도록 맡겨야겠다. 이번에도 내가 건드렸다가는 추억에 빠져 도로 다 담을 테니. 시디 상자는 절대 열어보지 말고 후배에게 주자. 박스 테이프를 뜯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처럼 추억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와 질척댈 테니.

내가 이렇게 결심을 한 것은 '물건 정리 실용서'가 아닌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길 잃기 안내서> 덕분이다. 작가는 물건뿐 아니라 물건에 쌓인 추억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말해주었다.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은 가끔 생각보다 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략) 시간과 함께 기억들은 대부분 희미해졌고, 내가 그중 하나를 글로 적을 때마다 그 기억은 버려지는 셈이었다. 그 순간 기억은 그림자처럼 흐릿한 추억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활자로 고정된다.(64쪽)'
 
그녀의 말대로 이 글을 쓰며 추억이 오히려 뚜렷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시디와 아이들의 물건, 중학교 동창들과의 추억은 이미 활자로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버려도 잃지 않는다'는 의미를 조금 알겠다. 좀 더 가볍게 창고의 묵은 짐을, 마음속 추억의 짐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어떤 것은 영영 잃어버린 상태일 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멀리 있는 한 우리가 영영 잃지 않는다. (68쪽)'니까.

태그:#집정리, #버리기, #비움, #리베카 솔닛, #길잃기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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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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