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외국인 타자 카를로스 페게로는 지난 시즌 KBO리그에서 '대체 선수의 대박 사례'를 기록했던 선수다. 토미 조셉의 대체 선수로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고 KBO 리그에 입성한 페게로는 후반기 짧은 활약 기간에도 불구하고 타율 .286 9홈런 44타점을 기록하며 LG의 가을야구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심지어 포스트시즌에서도 홈런 2방을 터뜨리며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줬다.

하지만 LG는 페게로의 수비능력과 팀 내 포지션 중복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하여 페게로와 재계약을 일단 포기했다. 대신 LG가 영입한 로베르토 라모스는 올 시즌 타율 .375 13홈런 31타점으로 맹활약하며 페게로를 포기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렇게 한동안 잊혀졌던 페게로가 다시 야구 팬들의 화제로 떠오른 것은 최근 키움 히어로즈 구단이 대체 외국인 선수로 페게로의 영입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키움은 기존의 테일러 모터가 올시즌 1군에서 타율 1할 1푼 4리(35타수 4안타)에 그친 데다, 사실혼 관계의 여자친구가 자가격리 문제로 불만을 토로해 논란을 일으키자 방출을 결정했다. 그 대체 선수로 검증된 페게로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다.
 
 22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 대 두산 경기. LG 카를로스 페게로가 연장 10회초 2사 1, 3루 상황에서 스리런포를 날린 뒤 환호하고 있다. 2019.9.22

22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 대 두산 경기. LG 카를로스 페게로가 연장 10회초 2사 1, 3루 상황에서 스리런포를 날린 뒤 환호하고 있다. 2019.9.22 ⓒ 연합뉴스

 
하지만 키움의 페게로 영입은 결과적으로 무산됐다. LG가 페게로에 대한 보류권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류권은 선수와 구단이 맺은 계약이 만료된 후에도 해당 구단이 선수와 독점적으로 재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규정상 페게로가 국내에서 다시 뛰기 위해서는 전 소속팀이었던 LG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구단이 해당 외국인 선수와 계약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보류권이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구단과 선수 양측이 구체적으로 계약조건을 주고받는 협상이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법적 공방으로 갈 수도 있는 사안이다. 어쨌든 페게로는 LG와의 보류권 문제가 정리되지 않는 한 키움을 비롯한 KBO리그 어느 팀에서도 뛸 수 없다. LG에서 뛰었던 헨리 소사가 지난해 SK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던 것도 구단이 흔쾌히 보류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LG는 페게로에 대한 보류권을 유지한 이유가 라모스의 부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라모스는 최근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만일 라모스가 전력에서 이탈할 경우 LG는 페게로를 대체 외국인타자 1순위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 19'로 인해 가뜩이나 대체 외국인 선수 영입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LG 구단으로서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야구 팬들의 여론은 곱지 않다. 당초 LG가 페게로의 보류권을 풀어주기로 약속했으나 말을 뒤집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비난 여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차명석 LG 단장도 <스타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코로나 사태 때문에 상황이 달라진 것'이라고 해명했다(2020년 6월 16일자 <스타뉴스> "페게로, 제가 말 뒤집은 거죠" 차명석 LG 단장 사과에 담긴 진심). 키움 구단은 페게로에 대한 미련을 접고 다른 외국인 선수의 영입을 검토하기로 결정하며 더이상 논란을 키우지 않으려 하는 분위기다.

결국 애꿎은 피해를 보는 것은 페게로 본인뿐이다. LG 구단이 페게로의 보류권을 쉽게 풀어줄 수 없었던 속사정이나, 코로나 19로 인한 특수한 상황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키움도 페게로 외에는 당장 외국인 선수 선택지가 없을 만큼 다급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페게로는 KBO리그의 보류권 규정 '악용'과 LG 구단의 무책임한 '말바꾸기'에 일방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라모스의 허리 통증에 대한 불안 요소가 있지만, 아직 경기에 출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만일 라모스가 끝까지 시즌을 완주한다면 페게로는 기약없이 시간만 허비하다가 귀중한 한 시즌을 날리는 꼴이 된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의 스포츠 리그가 정상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페게로같은 외국인 선수에게는 KBO리그에서의 활동 여부가 '야구 커리어'나 '생계적인 측면'에서나 모두 절실할 수도 있다. 만약의 가능성을 대비해 작은 손해조차 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정작 개인에게는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수하라는 행태는 전형적인 이기주의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도 해외 리그에서 활약했거나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있다. 만약 김광현, 추신수, 손흥민, 이강인, 김연경, 지소연 등 한국 선수들이 해외 무대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았는데 보류권이라는 규정으로 인해 정당한 직업 선택의 기회마저 박탈 당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보류권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가 이를 뒤집고, 만약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창고에 쌓아둘 '재고품' 정도로 취급한다면 당사자나 우리 팬들의 기분은 어떨까. 지금의 LG 구단처럼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무책임한 한 마디로 끝낼 수 있는 문제일까.

선수의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를 구단은 보상해 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한 특수한 경우'라는 핑계를 대지만, 그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상황 논리에 따라 얼마든지 비슷한 사례가 나올 수 있다. 페게로가 외국인 선수라고 해서 이러한 불공정한 행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조직의 이해 관계를 내세워 개인의 희생과 권리 박탈을 정당화하는 식의 논리는 분명 불합리하다. 현행 보류권 규정에 대해 KBO가 재검토를 고려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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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게로 LG트윈스 키움히어로즈 보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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