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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방송작가와 엄마, 아내와 여성으로 살아가며 온 몸으로 부딪히는 일상 속 이야기를 기록합니다.[기자말]

어느 날, 후배가 상담을 요청해 왔다. 결혼한 지 이제 막 1년을 넘긴, 한창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후배였다. 그런 후배가 요청해온 상담이라니, 무슨 일일까. 반가운 마음과 얼마간의 걱정을 안고 만난 자리에서 후배는 반갑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고민은 얼마 전 방송국에서 담당 피디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 때문이었다. 그 피디 말이,

"아니 글쎄, 예전에 말이에요. 어떤 국장이 한 말인데, 작가는 임신을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왜냐고 물었더니 글쎄, 작가가 애를 낳으면 머리가 나빠진대나 어떻대나, 그러더라고. 아니,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하하."

앞뒤 맥락도 없이 꺼낸 이야기였다고 했다. 후배는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며 "선배님, 저 기분 나빠야 하는 거 맞죠?"라며 자신이 느낀 모욕적인 감정조차 의심하고 있었다.
 
일 하는 중에 사고나 실수가 있었다면, 그에 합당한 절차와 순서에 따라 징계나 경고를 내리면 될 일이다.
 일 하는 중에 사고나 실수가 있었다면, 그에 합당한 절차와 순서에 따라 징계나 경고를 내리면 될 일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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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나는 후배의 고민을 듣기 전 또 다른 동료로부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방송사에 있을 때 겪은 일이라며 해 준 얘기는 이랬다. 그건 한 리포터의 방송 사고였다. 리포팅 해야 할 타이밍을 놓쳐 라디오 방송에서 무음이 나갔는데, 이 방송 사고에 대해 회의를 하던 중 담당 부장이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애 낳은 아줌마는 뽑지 말자고 했잖아. 아무래도 떨어진다니까, 기능이."

애 낳은 아줌마인 나와 애 낳을 가능성이 있는 후배는 그 이야기들 앞에서 침울해졌다. 일 하는 중에 사고나 실수가 있었다면, 그에 합당한 절차와 순서에 따라 징계나 경고를 내리면 될 일이다. 그것은 애 낳은 아줌마라서가 아니라, 누구나 실수 할 수 있는 일이다. 사건의 본질은 '애 낳은 아줌마'의 문제가 아닌데, 왜 자꾸 이야기의 원인과 결과가 '애 낳은 아줌마'로 귀결되는 걸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앞에 놓인 이런 '농담' 앞에서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살면서 참 많은 말을 듣는다. 조언을 가장한 충고, 걱정을 위시한 비꼼, 비판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난, 모욕적인 발언 등등.

수많은 말들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처가 어려운 건 '농담의 얼굴을 하고 건네는 비하와 조롱'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마주 섰다가, 갑자기 옆구리로 훅 치고 들어오는 어퍼컷에 고꾸라지는 형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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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농담의 얼굴을 하고 온다

대개 그런 '웃자고 한 말'을 던진 사람은 내용의 심각성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으레 들어왔던 말이고, 들은 대로 내뱉은 것뿐이며,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게 익숙한 변명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상은 늘 그래 왔다.

신입이라서, 나이가 어리니까, 여자니까, 애니까. 모든 위계와 질서의 하위에 있는 집단이 그리고 권력과 집단의 힘과 크기에서 밀리는 약자와 소수자들이 늘 농담의 소재로 소비돼 왔다. 나 역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온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것들은 버려야 할 낡고 오래된 사고라는 것을 안다. 남녀의 성별이, 나이의 많고 적음이, 피부의 색깔이, 출신 국가가 비하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건강한 사회의 기본 조건이요, 근간을 지탱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최근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계기로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삭제가 됐다고 한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이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하고 노예제를 미화했다는 비판 때문이다. 영화가 제작돼 개봉될 당시에는 미처 인식되지 못했으나, 지금은 괜찮지 않다고 느낀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담고 있는 묘한 차별에 대해 불편하다고 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대는 이렇듯 진화하고 변화하며, 그 가운데 스스로 균형을 잡아간다. 그럼에도 소소한 차별과 혐오는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털어내지 못한 먼지처럼 남아 있다.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곳곳에 '농담화' 돼 남아 있는 개개인의 인식들이다.

돌이켜 보면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었던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달려든 당사자에겐 부당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농담이 농담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누가 당사자인가를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애 낳은 기능이 떨어지는 아줌마'는 우리의 어머니이며, 아내이자, 누이이고, 우리의 딸이다. 세상 어느 누가 이 사실 앞에서 웃을 수 있겠는가.

결코, 웃기지 않습니다

모든 애매한 가해는 폭력이란 정의를 교묘하게 피해 가며 웃음이란 가면을 쓰고 일상을 통과한다. 그러한 교묘함은 피해자로 하여금 그것이 피해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침묵을 강요하고, 더욱 강화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쓴 김지혜 교수는 "유머로 던져진 말에 정색하고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농담의 얼굴을 한 말들은 무엇이든 가볍게 만드는 성질로 인해 쉽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지며, 때문에 그 언어 공격은 인간 내면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기는 쉽지만, 반면 그 말이 왜 문제인지를 설명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그 기회 또한 짧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반응하지 않기'를 말했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괜찮지 않은 것이란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농담은 웃음의 기대 위에 행해지는 것이므로, 웃지 않으면 농담이 될 수 없음을 역으로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어떤 방식으로든 있는 듯 없는 듯, 인 듯 아닌 듯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폭력을 알아차리고 거부를 표현할 때, 내가 잘 못 생각한 거겠지 하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모른 척하지 않을 때, 누군가 말하겠지 하고 뒤돌아서지 않을 때, 폭력은 더 이상 농담이 되지 못하고, 그 자체로 드러나게 된다.

​거기에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더 덧붙이고 싶다. 다시 질문하기. 미국의 여성 저술가 리베카 솔닛은 무례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에게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농담의 얼굴을 하고 오는 폭력에 대해 우리는 다시 당당히 물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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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웃긴가요? 어느 지점에서 웃긴 거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여성, #농담, #폭력,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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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지상파 20년차 방송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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