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지난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지난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홍범도 장군이 일제와 맞서 싸운 영웅이라면, 백선엽 장군도 공산세력과 맞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이다."

지난 8일, 국민의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나온 안철수 대표의 말이다.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파 백선엽을 '영웅'이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독립운동가 홍범도와 나란히 놓고 비교하다니. 이게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지내고, 대선까지 나갔던, 대한민국 원내정당 대표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었다. 그야말로 '천박한' 역사의식이다.

홍범도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오로지 조국 독립만을 생각했던 사람이다. 단 한 번도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적이 없었다. 민간인 집단 학살에 가담한 적도 없었다. 그런 티끌 만한 과오조차 없기에 민족의 영웅으로 오늘날까지도 만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감히' 백선엽이 홍범도와 동급으로 비교될 수 있단 말인가.
 
2019년 6월 10일,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군사편찬연구 자문위원장실에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 황교안 대표 기다리는 백선엽 2019년 6월 10일,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군사편찬연구 자문위원장실에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라는 게 안철수의 논리다. 그의 논리는 지난 75년 간, 우리 사회가 친일 청산의 의지를 불태울 때마다 반민족·반역사 세력이 내세웠던 논리와 닮았다. 우리 집에 든 도둑이 가족을 해해도, 나중에 우리 집에 든 다른 도둑을 대신 잡아줬으면 용서해도 된다는 논리와 뭐가 다른 걸까. 헝겊이 아무리 두껍다 한 들 송곳을 덮을 수는 없는 법이다.

요새 나는 대학원에서 '일제 식민정책과 저항'이라는 주제로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듣는 중이다. 안철수의 발언이 나온 날도 만주 지역 친일 세력의 형성 과정에 관한 논문들을 읽으며 발제문을 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안철수의 발언을 접하고 급하게 발제문의 방향을 바꿨다. 발제문에 간도특설대 챕터를 추가하고, 부랴부랴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간도특설대의 악명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실체를 마주했을 때, 내 입에서는 긴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무자비한 탄압의 대명사, 간도특설대

백선엽이 복무했던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15일, 만주국군 휘하에 설치된 정규부대로 초기의 명칭은 '조선인특설부대'(朝鮮人特設部隊)였다. 즉, 한인(韓人)으로 하여금 한인(韓人)을 통제하고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부대였던 것이다. 간도특설대는 지원병 체제로 운영됐으며 자격 조건은 '20세 미만 간도 거주 한인 청년'들이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간도특설대가 항일운동가를 살해하거나 체포한 사건은 100여 회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른바 '소탕작전'을 통해 재만한인(在滿韓人)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 항일운동을 미연에 방지하고 주민들이 일제의 통치에 철저히 순종하도록 만들었다.
 
간도특설대의 활약상을 보도한 1943년 1월 11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
▲ "半島徵兵制에 先驅하는 間島特設隊의 活躍" 간도특설대의 활약상을 보도한 1943년 1월 11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
ⓒ 국립중앙도서관

관련사진보기

 
간도특설대가 자행한 행태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이들은 만주국의 '삼광정책'(三光政策: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빼앗아가는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전위부대였다. 전시 상태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을 금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총부리는 민(民)과 병(兵)을 가리지 않았다.
 
"(1945년 4월 27일, 하북성 사집진 지구에서) 취령(당시 18세)이라고 부르는 처녀가 집으로 돌아갈 때 남색 면실로 만든 장삼을 입은 키 큰 자와 키 작은 병사가 집까지 따라와서 취령을 강간하려고 하였다. 취령이 불복하니 적들은 총칼로 젖가슴과 머리를 찔러 죽였다. 그 자리에 있던 취령의 어머니가 딸을 보호하려다가 그들에게 찔려 죽었다. 놈들은 시체를 북문어구에 가져다 놓고 불태우는 겨와 짚으로 덮어놓고 가버렸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III-2>, 543쪽

이 사례는 극히 단편적인 예일 뿐이다. 간도특설대가 자행했던 수많은 학살과 토벌의 생생한 기록들이 이미 역사학자들에 의해 낱낱이 드러난 바 있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한중 연합 항일무장단체였던 '동북항일연군'의 토벌 작전에 나섰는데, 사살된 항일연군 사망자의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하고 여성 포로 4명에 대한 강간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살해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 군사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 군사들
ⓒ 인민망

관련사진보기

  
간도특설대가 주민들과 포로들을 대상으로 자행했던 행태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사격
2. 임신부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
3. 마을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집단 구타
4. 주민을 우물에 넣어 살해
5. 노인을 구타하여 살해
6. 아녀자에 대한 강간 및 남편 살해
7. 포로에 대한 고문 (고춧물 붓기·가죽혁대로 구타)


"독립군과 싸우지 않았다"는 말이 면죄부가 될 수 없는 까닭

이렇듯 악명 높았던 부대에 백선엽이 있었다. 의외로 백선엽은 자신의 간도특설대 복무 이력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가 1993년에 펴낸 일본어 회고록의 내용이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중략)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나?>, 24~49쪽

그런데 그는 2019년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립군과 전투 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라면서 자신의 주장을 뒤집는다. 자신이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해 간 1943년 초 간도 지역에는 항일독립군이 이미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고 없을 때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고록의 고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1930년대 간도특설대 초기의 피할 수 없었던 동족간의 전투와 희생 사례에 대해 같은 조선인으로서의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일 뿐"이라며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늘어놨다. 그나마 반성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던 회고록 당시의 발언보다도 훨씬 후퇴한 발언이다.
 
훈련 중인 만주군 병사들. 간도특설대는 만주군 휘하 정규부대였다.
 훈련 중인 만주군 병사들. 간도특설대는 만주군 휘하 정규부대였다.
ⓒ 위키피디아 중문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독립군과 전투를 한 적이 없었다는 그의 주장은 미심쩍기만 하다. 실제로 간도특설대는 1944년 이후 러허(熱河)와 허베이(河北)로 넘어가 중국 팔로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쳤지만,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부임한 1943년 당시는 아직 간도에서 활동하던 시점이었다. 당시에 간도 지역에 잔존 한인 독립군 세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동포 한인과의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팔로군 토벌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간도특설대가 팔로군을 상대로 자행한 잔혹한 토벌과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국적을 넘어 단죄받아야 할 '전쟁범죄'다. 그런 부대에서 사병도 아닌 '장교'로 복무했던 백선엽이 과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설마 '몇몇 병사들의 일탈행위였을 뿐'이라고 빠져나갈 생각인가.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자조적인 언급에 역사적 책임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라며 "우리 사회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더욱 엄정하고 결연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친일 청산은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정신'

사실 백선엽을 띄우는 건 안철수뿐만이 아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역시 백선엽을 가리켜 "6.25의 이순신"이라고 칭송하는가 하면,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도 백선엽의 사후 현충원 안장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얘기"라며 백선엽을 옹호하고 그에게 합당한 예우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사람의 역사학도로서 대한민국 보수를 대표한다는 정치인들의 역사관이 이렇게 기울어져 있다는 게 부끄럽고 참담하다.

나는 역사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를 '시대정신'이라고 배웠다. 시대정신은 곧 민중의 요구였다. 그것을 외면한 민족과 국가에는 늘 혼란과 불행이 뒤따랐다. 해방 후 우리 민족에게 요구된 시대정신은 '친일청산'이었다. 그러나 반민특위 해산으로 시대정신이 좌절되고, 우리의 근현대사도 꼬이기 시작했다. 소위 대한민국 보수라고 하는 정치인들의 기울어진 역사관도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신현준·김석범·김백일·송석하·김홍준·백선엽.

이들의 공통점이 뭘까. 모두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점이다. 또한 해방 후 일본군에서 한국군으로 군복을 바꿔 입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6.25 전쟁의 영웅으로 변신했다는 점까지도 닮았다. 이들 중 신현준, 김석범, 김백일, 송석하, 김홍준 5인은 현충원에 잠든 채 애국지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국민들은 이제 현충원에 잠든 친일파들의 묘를 '파묘'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친일 청산이라는 구호가 2020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으로 다시금 부활한 것이다.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창설에 가장 큰 영향 끼친 인물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송석하 묘지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창설에 가장 큰 영향 끼친 인물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 김종훈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마지막 간도특설대원' 백선엽. 그의 사후 안장지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열띤 논쟁 중이다. 분명한 것은 백선엽의 사후 현충원 안장은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번 논란을 대한민국 보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역사관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 아울러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도 함께 성찰하길 간곡히 당부한다.

태그:#백선엽, #안철수, #친일파, #간도특설대, #현충원
댓글8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