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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포석정으로 알려진 수로만 남아 있다.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포석정으로 알려진 수로만 남아 있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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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을 펼쳐 '풍류도'라는 단어에서 '도'를 떼고 '풍류(風流)'만을 찾아보면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명사>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

그렇다면 '도(道)'는 어떤 의미일까? 다시 사전을 뒤적여본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명사> 종교적으로 깊이 깨친 이치. 또는 그런 경지."

결론적으로 '풍류'와 '도'라는 두 명사가 합쳐진 '풍류도'란 "노는 일의 멋스러움이 세속적 경지를 벗어나 어떤 도저한 깊이에 다다른 경지"가 아닌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말한다. 풍류도는 신라의 엘리트 청년들이었던 화랑의 지도 이념인 동시에 지향점이다. 그렇기에 이런 추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1300년 전 화랑들은 수려한 용모와 전장(戰場)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맹을 두루 갖췄으며, 노는 것 또한 화끈했다'.

국문학자이자 소설가인 홍성암은 "한국인은 예부터 풍류도를 숭상해왔다"고 말한다. 논문 <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을 통해서다. 논문을 좀 더 읽어보자.

"그러나, 풍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리는 쉽지 않다. 우선 용어에 있어서 풍류도는 화랑도와도 혼용되고 있고, 또 풍월도란 말로도 쓰이는가 하면 문학인의 흥취를 위주로 한 풍류정신과도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풍류를 '멋'과 통한다고도 하고 '신바람'이라고도 하고 '신선(神仙)'이 되는 길이라고도 한다."

홍성암은 풍류도가 고대에는 '신앙 체계'였다가, 현재는 문학작품에서의 '풍류정신' 정도로 변용됐다고 진단한다. 이어 '학문적 시스템과는 무관하게 풍류에 대한 관습적 인식은 널리 알려져 있다'고 썼다. 여기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와 같은 부연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가리켜 '풍류를 안다'라고 말하게 되면 대체로 '멋'을 안다는 말이 되고, 멋쟁이를 풍류객이라 한다. 멋이란 흔히 '하늘과 통한다'는 말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이는 곧 '자연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의 화랑들은 어디서 어떻게 놀았을까?

그렇다면 풍류도, 혹은 풍류정신이란 사상 체계 아래서 몸과 마음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하늘과 통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놀았을까? 이를 추측할 수 있는 고문헌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의미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현대식 문장으로 바꿔본다. 이렇다.

"신라 제23대 법흥왕 원년에 어린 사내들 중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화랑을 달리 이르는 말)라 부르고, 착한 선비들을 구하여 따르는 무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효(孝)와 공손함, 충성과 믿음으로 조직됐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이들 중 진짜 인재를 알 수 없음을 걱정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풍월주를 무리 지어 놀게 하는 가운데, 그들의 행동과 예의범절을 유심히 살펴 등용(登用)하고는 했다."

자,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풍류도는 신라사회의 최상급 이데올로기였고, 화랑의 절대다수는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풍류를 제대로 이해하고 익힌 화랑을 찾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켜본 사람들(왕과 대신)과 놀았던 청년들의 신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매운바람 몰아치는 서라벌 공터에서 가악(歌樂)을 즐기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또한 '노는 자리'에 술이 없었을 리가 없다. 취중(醉中)의 행실은 인간의 됨됨이를 살펴볼 수 있는 긴요한 기회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에 부합하는 공간으로 '포석정(鮑石亭)'을 지목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추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알다시피 포석정은 경주시 배동에 자리한 정원의 시설물 중 하나다. 돌을 이용해 휘어진 도랑을 타원형으로 만들어 물이 흐르게 했다.
 
신라의 왕과 귀족, 화랑들이 자리를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석정.
 신라의 왕과 귀족, 화랑들이 자리를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석정.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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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 '유상곡수연'의 풍류 속에서 진짜 인재를 찾다

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8권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는 포석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다.

"서거정이 쓴 '동국통감(東國通鑑)'에 포석정지 근처에 성남이궁(城南離宮·왕의 별궁)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포석정은 이궁에 딸린 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설치된 정자와 수로를 모두 포함한 이름으로 생각된다. 현재 정자는 없고 수로만 존재한다. 포석정은 다듬은 돌로 축조된 전복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수로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울창한 느티나무 숲 속에 있는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수로에 술잔을 띄워 흐르게 하고 그 잔이 자기 앞을 지날 때 시를 한 수 지어 읊는 유흥)을 즐겼던 곳이다."

어렵지 않게 그때의 풍경이 그려진다. 왕이 주관하고 다수의 고관(高官)들이 함께 하는 주석(酒席). 높은 벼슬아치의 아들인 화랑 여러 명이 성남이궁 포석정에 모였다. 짙푸른 숲 속에서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는 청아하고, 푸른 하늘엔 솜털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은 화랑들은 왕이 호명하며 내리는 제 몫의 술잔이 앞에 도착하기 전에 '멋진 시 한 편'을 생각해둬야 한다. 화랑들은 마음속으로 똑같은 혼잣말을 했을 것이다.

"이번에 왕과 대신들의 눈에 든다면 궁궐로 불려가 높은 벼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술을 마시더라도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주사(酒邪)를 부려서는 안 된다. 나는 풍류도를 배워온 신라의 지식인이 아닌가."

신라시대 포석정에서의 연회(宴會)는 단순히 '놀고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직 임명의 권한을 가진 이들이 어떤 화랑이 '노는 일의 멋스러움이 세속적 경지를 벗어나 도저한 깊이에 올라있는 것인지'를 선별해 내는 일종의 테스트가 아니었을까?

앞에서 언급한 책에 따르면 포석정은 안쪽 12개, 바깥쪽 24개의 다듬은 돌로 조립됐고,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의 양쪽은 돌 6개, 출수구 꼬리 부분은 4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수로의 너비는 31cm, 깊이는 21~23cm, 길이는 대략 22m쯤 된다.

1991년엔 술잔이 수로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도 측정했다. 결과는 약 10분 30초. 그 짧은 시간에 왕과 대신들의 마음을 뒤흔들 시를 떠올려 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상태가 아닌가… '품성과 재능을 인정받는 화랑'이 된다는 건 이처럼 몹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풍류도'를 제대로 체화(體化)한 화랑이 가려졌다면 자긍심이 높았을 수밖에 없었을 터. <화랑세기(花郎世記)>는 화랑들이 가졌던 프라이드(Pride)를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전에 선도(仙徒)들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권면하였음으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좁은 공간을 벗어나 드넓은 명산대천으로의 유람도

'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에서 홍성암은 "공동체적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천적 이념"이 풍류도라 규정하며, 그 성격을 다음과 추정하고 있다. 이는 화랑도가 지향하는 목표와도 맥이 닿는다.

- 개인적인 것보다 집단적인 행위를 통해 수련을 쌓는다.
- 사회적 규범으로서 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연마한다.
- 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긴다.
- 수련 과정에서 능력이 인정되면 나라의 인재로 등용된다.


홍성암이 요약한 4번째 항목이 '젊은 리더를 가려내는 포석정의 연회'를 지칭하고 있다면, 3번째 항목 '산천을 유람하며 심신을 연마한다'는 21세기식 문법으론 '여행을 통한 자아의 성장'이라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오늘. 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까진 수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배낭을 메고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1300~1500년 전 신라의 화랑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한 서술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등장한다. 아래와 같다.

"실제로 풍류, 즉 화랑도의 유래는 '선(仙)'에서 나왔다. '선'은 불교 수용 이전부터 신라에서 숭배했던 신격들을 통칭하는 말로 여겨지는데, 삼산오악(三山五岳)을 비롯한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신들이 바로 그 '선'에 해당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화랑도는 그 시초부터 명산대천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던 것이며, 그들의 수련 장소로 전국의 주요 산과 강이 선택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실제로 신라시대 화랑들은 동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금강산의 풍경과 마주하기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지만, 당시의 교통 환경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과 감통편(感通篇)엔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이 강원도 통천 일대를 유람한 기록과 진평왕(재위 579∼632) 시대 화랑인 거열랑, 실처랑, 보동랑이 풍악(금강산) 여행을 계획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서 우스개 같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단상(斷想) 하나.

'풍류도'에 기반해 성장한 신라의 청년 화랑들은 문재(文才)와 바른 주도(酒道), 여행을 통한 내적 성장까지 골고루 요구받았다.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청춘이 왜 이리 버겁고 힘겨운 것이냐"라는 푸념은 당시도 있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연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신라, #풍류도,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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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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