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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화려한 휴가>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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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의 '화려한 휴가'가 끝나가던 1980년 5월 27일 새벽,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항쟁지였던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그것도 가장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멸시받았던 밑바닥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이름도 모른 채 그저 김군, 이씨, 박형 등으로 불렸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치안 부재 상태에서도 그 흔한 절도사건 하나 없을 만큼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여주었다. 5·18민주화운동 연구에 천착한 많은 학자들은 이를 '절대 공동체'로 명명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보기 힘든 사례라는 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동참했던 건 아니다. 일찌감치 광주를 빠져나갔거나 집에서 두문불출한 경우도 많았다. 대개 부유한 사람들이거나,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그랬다. 그들 중 계엄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경우는 드물었다.

명망가를 중심으로 꾸렸던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내부에선 즉시 시민군의 무기를 회수하고 투항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은 폭도를 자인하는 꼴이라며 결사항전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별도로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어 항쟁을 이끌었다.

노동자를 '2등 시민'으로 간주하던 이들도 있었다. 누구는 넝마주이라고 손가락질했고, 룸펜이라 조롱하며 함께 행동하는 것 자체를 마뜩잖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광주의 노동자들은 청년 학생들과 손 맞잡고 불의에 온몸으로 맞서며 항쟁의 주축으로 거듭났다.

과거 노태우 정부 때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명명되었지만, '민중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민들을 학살한 불의한 권력에 맞선 항쟁이었고, 민중, 곧 노동자가 그 중심에 섰다는 이유에서다. 국립 5·18 민주묘지의 추모탑에도 '민중항쟁'으로 명시돼 있다.

김종태 열사

'오월 광주에서 여태껏 단 한 번도 주인 행세를 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진짜 이 땅의 주인으로서 마지막 의무를 다했다.'

어느 학자는 '민중항쟁'으로서 5·18을 이렇게 규정했다. 마치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역사의 고비길마다 노동자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5·18에 빚졌듯이, 5·18은 노동자에 빚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도청에서의 의연한 죽음이 그들의 '마지막 의무'가 되지 못했다. 불의에 맞선 저항이 폭동으로, 무고한 시민이 폭도로 매도되는 현실에서, 철저히 고립된 광주의 바깥으로 진실을 알리는 일 역시 그들의 몫이었다. 광주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그 맨 앞자리에 김종태 열사가 있다. 그는 1980년 6월 9일, 여러 대학이 모여 있는 서울 신촌 네거리에서 '광주 시민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몸에 불을 댕겼다. 6월 9일이면, 계엄군에 의해 도청이 진압된 지 불과 13일이 지난 때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배움을 이어나가며 노동운동에 투신한 청년 노동자다. 남다른 지적 열정과 헌신으로 구조 악과 싸우며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야학을 열기도 했다. 70년대 말 암울했던 현실이 그의 정의감에 불을 질렀다.

고작 스물두 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을 처음 접했을 때, 교사로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과 그는 나이 차이가 두세 살에 불과하다.

앎이란 무엇이며, 배움은 어떻게 증명되는가에 대한 고민은 그로 인해 비롯된 것이다. 은연중에 내면화된 노동자에 대한 편견이 깨진 것도 그의 덕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어린아이들조차 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그의 삶을 통해 깨달았다.

참된 교육이란

5·18 즈음이 아니더라도, 수업 시간 그의 불꽃 같은 삶을 아이들에게 들려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열사의 삶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화이거나, 수백 년 전의 위인전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장문의 유서조차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 아이도 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현대사에 그토록 해박하고 논리 정연한 글을 쓸 수 있느냐는 거다. 물론, 반박하긴 어렵지 않다. 그와 유사한 사례가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

배움이 오로지 학교에서만 일어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은 탓이다. 우리 사회는 검·인정 교과서가 지식을 독점하고, 공인 자격증이 있는 교사만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덩달아 아이들도 수능을 비롯한 공인 시험의 성적으로만이 실력을 검증할 수 있다고 여긴다.

앎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쓰일 때, 공동체엔 오히려 독이 된다. 초등학생 때부터 내몰리는 밑도 끝도 없는 학벌 경쟁이 우리 사회에 백해무익한 이유다. 참된 교육이란, 배움은 학위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삶으로서 증명되는 것임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 있다.

해마다 오월이면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의 모교 후배들로서, 학생회의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다. 특히 40주년을 맞는 올해는 주제를 '민중항쟁'으로 정하고, 노동자의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었다.

사실 민중이라는 용어는 5·18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시민이나 대중과 같은 말조차 잘 쓰이지 않고, 오로지 국민으로 통칭됐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피지배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의미하는 민중은 자칫 권력자들로부터 '빨갱이'로 치도곤당할 수 있는 위험한 용어였다.

올해는 5·18 당시 희생된 분들을 제외하고, 광주의 참상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민중, 곧 노동자를 찾아 나설 참이었다. 곧, 김종태 열사로부터 시작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교실이 아닌, 그의 묘소 앞에서 공유하는 그의 삶은 각별한 깨달음을 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교내외 단체 활동이 제한되면서, 참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모든 학년이 등교 개학을 했지만,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는 계속되고 있다. 교실 수업에서 모둠학습도 금지된 마당에, 수십 명의 아이들과 함께 교문 밖을 나설 순 없는 노릇이다.

대학생과 노동자는 친구가 되어
 
나란히 잠든 김종태 열사와 김의기 열사의 묘 김의기 열사 묘소 왼편에는 5.18 당시 최초의 희생자로 알려진 전북대학생 이세종 열사가 잠들어 있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 가거든, 이 세 청년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길 권한다.
▲ 나란히 잠든 김종태 열사와 김의기 열사의 묘 김의기 열사 묘소 왼편에는 5.18 당시 최초의 희생자로 알려진 전북대학생 이세종 열사가 잠들어 있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 가거든, 이 세 청년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길 권한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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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홀로 김종태 열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카메라에 담아왔다. 수업 시간 아이들에게 묘소의 위치를 알려주고, 개별적으로 짬을 내서 다녀올 수 있도록 권하려는 뜻이다. 열사가 남긴 장문의 유언도 스크랩해 함께 읽어볼 작정이다.

40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책자가 발간되었다고 한다. <너는 불꽃이었다, 햇살이었다>는 제목이 그의 올곧은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조직된 추모 사업회에서 생전의 글과 그의 어머니의 생애 등을 그러모아 엮은 것이다.

4-13. 그의 묘소 번호다. 국립 5·18 민주묘지 내 4묘역의 13번째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묘역이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는 데다 맨 앞 열이라 찾아가기 쉽다. 4묘역에는 김영철, 박효선 등 들불야학의 강학들과 <한겨레> 초대 사장을 역임한 송건호 등이 함께 잠들어 있다.

공교롭게도, 그의 바로 옆에는 김의기 열사가 모셔져 있다. 당시 서강대생으로,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뒤 도청이 진압된 지 꼭 사흘째인 5월 30일,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호소하며 분신했다. 5·18 이후 죽음으로 광주의 진실을 외부로 알린 최초의 사례다.

장래가 촉망되는 명문대생과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가난한 노동자가 오로지 광주의 참상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김의기 열사의 죽음이 있은 지 꼭 열흘 뒤 김종태 열사가 그 뒤를 따른 것이다. 그것도 '잿빛' 서울의 한복판에서 '핏빛' 광주를 온몸으로 증언했다.

이곳에 서면 늘 '노동자의 예수' 전태일 열사가 떠오른다. 그는 입버릇처럼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자투성이인 법조문을 알기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간절했다는 유언과 같은 그의 말에 당시 수많은 대학생들은 가슴을 쳤다.

김종태 열사에게 '한자투성이인 법조문을 알기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대학생 친구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 테지만, 어쩌면 김의기 열사를 '지음(知音)'으로 여기진 않았을까. 1970년엔 노동자 전태일이 수많은 대학생의 성찰과 실천을 이끌었다면, 1980년엔 대학생 김의기가 노동자 김종태의 용기를 북돋운 셈이다. 대학생과 노동자는 그렇게 친구가 되어 나란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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