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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때로는 역사를 움직이기도 한다. 지난 100년간 한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죽음은 1919년 고종의 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죽음은 3.1운동을 촉발시켰고, 3.1운동으로 인한 진동은 지금까지도 한국을 움직이고 있다.

8.15 해방 이후에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죽음들이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이 그랬고, 오래 전에는 여운형이나 김구의 죽음이 그랬다. 이들의 죽음도 한국인들의 뇌리에 강한 각인을 남겼지만, 역사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는 1979년 10월 26일과 2009년 5월 23일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를 죽이고 살렸던 10.26
 
전두환 현역시절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함께
 전두환 현역시절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함께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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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체제는 집권 8년 뒤의 1969년 3선 개헌을 계기로 민주적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승만의 1954년 3선 개헌이 6년 뒤 4.19혁명으로 이어진 데서 느낄 수 있듯이, 한국인들은 3이란 숫자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대통령의 3연속 재임에는 강렬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박정희는 한술 더 떠 3선 개헌의 후속타로 1972년 유신 개헌까지 성사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사실상 '제왕'의 위치에 올라섰다.

유신체제 하에서 박정희는 국회의원 3분의 1을 뽑았다. 유신헌법(1972년 개정 헌법)은 제36조에서 국민을 대신해 주권을 행사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하고 대통령을 그 의장에 앉힌 다음, 제40조 제1항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선거한다"고 명시했다.

그런 뒤 제2항에서 "제1항의 국회의원 후보자는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다고 했다. 제3항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이 추천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통령이 새로운 후보 명단을 작성해서 계속 추천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런 황당한 조항은 국회의 견제 기능을 약화시키고 국회를 대통령의 자문단 정도로 격하시켰다. 3선 개헌을 한 것도 모자라 이런 일까지 저질렀으니, 반(反)박정희 운동이 반이승만 운동보다 격렬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1979년 10월 그날 김재규 손에 죽지 않고 계속해서 독재를 했다면, 박정희는 하야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국민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 박정희를, 어떤 면에서는 살려준 게 10.26이다. 10.26은 한편으로는 1980년 서울의 봄과 5.18 광주항쟁으로 연결됐지만, 또 한편으로는 보수세력 재편으로 이어지면서 독재정치를 연장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10.26은 미국과 불편했던 박정희를 퇴장시키고 좀 더 미국 친화적인 전두환을 등장시킴으로써, 보수 정권이 보다 강력한 미국의 지원을 얻도록 만들었다. 박정희의 핵개발을 견제할 목적으로 한국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던 미국은, 전두환이 실권을 잡자마자 5.18 학살을 지지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보수세력 입장에서 보면, 10.26은 미국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면서 한숨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지금의 박근혜처럼 박정희도 국민의 손에 의해 심판을 받았다면, 박정희는 살아생전에 추악하고 초라한 이미지를 갖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밤중의 술자리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그의 죽음에 극적인 요소가 부가됐고, 이는 그에 대한 국민적 원성을 어느 정도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보수세력이 전두환 중심의 체제 재정비를 하고 미국의 지원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34년 뒤에 박정희의 딸이 동정론을 등에 업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데도 도움이 됐다.

이렇게 본다면, 10월 26일에 김재규가 한 일은 박정희를 죽이는 동시에 살리는 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방식의 죽음으로 인해 한국 민주화가 지연됐으니 그 죽음은 한국 역사를 반동(反動)시키는, 퇴행시키는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0.26을 계기로 형성된 민주정의당(민정당)은 민주자유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을 거쳐 지금의 미래통합당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의 역사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박정희의 죽음이 얼마나 오래도록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박정희의 반동, 노무현의 동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박정희의 죽음과 정반대의 역사적 의미를 보였다. 박정희의 죽음이 역사를 반동시켰다면, 노무현의 죽음은 역사를 동(動)시킨 사건이다.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 동안에 민주진영은 보수세력의 공세를 막아낼 충분한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것은 2007년 12월 19일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승리의 만세를 부르며 BBK 의혹을 모면하고 2009년 4월 30일 노무현이 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가 우병우 검사와 마주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상태에서 발생한 노무현의 죽음은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중립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더 나아가 노무현이 꿈꾼 실질적 국민주권 시대를 향해 하나로 뭉치는 촉매제가 됐다.
 
지난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가운데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지난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가운데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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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7년 뒤 촛불혁명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 부분은 '죽은 노무현'의 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의 죽음과 달리, 노무현의 죽음은 고종의 죽음과 더불어 한국 역사를 전진시키는 데 이바지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한 '역사의 반동'은 2016년 촛불에 의해 사실상 멈춰졌다.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고 아직도 유신을 그리워하는 세력이 남아 있지만, 유신잔재와 유신세력이 역사를 움직일 동력을 상실한 것은 비교적 명확한 사실이다. 박정희는 1979년에 김재규가 아니라 2016년에 국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효과는 2016년 이후로 거의 약해져 있다. 박정희의 죽음은 지금은 '죽은 죽음'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고종의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결과물과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한 결과물은 아직 남아 있다. 3.1운동 때 한국인들은 1차적으로는 민족 자주독립을, 2차적으로는 민주공화국을 지향했다. 2020년이 된 지금까지도 이 과제는 여전히 현재적 문제다.

지금도 여전히 일제 식민통치로 인한 분단상태가 남아 있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위협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3.1운동이 지향한 자주독립의 과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공화국 건설의 과제 역시 형식적으로는 달성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노무현이 용감히 맞서 싸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민주공화국의 실질적 건설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종의 죽음은 그래서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의 죽음이 남긴 정치적 결과물도 마찬가지다. 촛불혁명으로 어느 정도 달성되기는 했지만, 그 과제는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노무현의 죽음을 말하며 그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의 죽음도 '살아 있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 남긴 것
 

노무현의 죽음과 고종의 죽음은 똑같이 역사를 동(動)시켰을 뿐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죽음'이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두 죽음에는 명확히 대비되는 차이점이 있다. 죽음의 당사자와 죽음의 결과물이 밀착돼 있는가 하는 점에서 확연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의 촉매제가 됐다. 총독부와 군경의 감시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대중집회를 가질 수 있는 명분이 됐다. 한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혹은 동정하며 추모의 장소로 몰려들고 이를 이용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종은 얼마 안 가 3.1운동에서 분리됐다. 한국인들은 3.1운동은 기억하지만, 고종의 죽음과 연관시켜 기억하지는 않는다. 죽음의 당사자와 죽음의 결과물이 분리된 것이다.

3.1운동 시기에 한국인들은 그 열기를 모아 임시정부를 건립했다. 그리고 민족적 열망을 수렴해 임시헌장(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전제군주제나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했다. 고종이 원치 않은 것들을 임시헌장에 규정했던 것이다.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일어난 3.1운동의 정신을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압축한 것은, 고종의 죽음이 3.1운동을 낳았지만 얼마 안 가 3.1운동으로부터 분리됐음을 뜻한다. 고종은 그 자신의 죽음으로 3.1운동의 길을 터줬지만, 3.1운동과 끝까지 함께 가지는 못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 그해 4월 11일이니, 고종의 죽음이 3.1운동으로부터 얼마나 빨리 분리됐는지 알 수 있다.

그와 달리 노무현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그 기운과 분리되지 않고 있다. 두 달도 안 돼 3.1운동과 분리된 고종의 죽음과 달리, 노무현의 죽음은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질적 국민주권을 향한 운동과 분리되지 않고 있다.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정치개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개인적 정치성향이 어떠하든 간에 노무현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힘뿐만 아니라, 죽음의 주인공이 죽음의 결과물과 분리되지 않도록 만드는 생명력이 노무현의 죽음에 내재돼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09년 5월 23일은 한국 현대사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태그:#노무현 서거, #촛불혁명, #10·26,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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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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