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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 순헌관
 숙명여대 순헌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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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이 오늘날 페미니스트 정치의 주된 목표이자 정당성의 기반이 된 지 오래다. 강남역 사건부터 예멘 난민 사건, 불법촬영 이슈와 이에 연관된 성중립화장실 이슈, 또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학생 입학 이슈를 거치며 여성 '안전'에 대한 요구는 점차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는 스스로를 소위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호칭하는 집단의 핵심적인 의제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특히 최근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한 전사회적 인식이 확대되고 N번방 이슈가 터져 나오면서 여성들의 '안전'은 대단히 다양한 방면에서 위협받고 있는 것, 따라서 국가와 시민사회에 의해 시급하게 보호되고 또 보장받아 마땅한 것으로 위치지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오로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세력화를 추진한 '여성의당'이 이번 총선에서 N번방 이슈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흐름에 대한 염려의 목소리들도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예멘 난민 이슈가 불거질 때 페이스북에는 '경계없는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의 페이지가 개설되었고, 난민과 이주, 국경, 소수자, 인권을 주제로 활동을 이어 온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짧은 글을 게시하기 시작했다. 이는 2019년 동명의 책 출간으로 이어졌다. 또 2019년 한국여성학회 차세대 연구-활동가 여름캠프는 "'안전'한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라운드테이블을 열기도 했다.

이런 시도들을 통해 만들어진 공론장에서 여러 페미니스트들은 '안전'이라는 담론이 갖는 양면성을 지적했다. 예컨대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전'은 여성의 행위와 자율성을 제약하기 위한 정치적 보수 우파의 주된 캐치프레이즈로 활용되어 왔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페미니즘의 흐름은 성적 엄숙주의로 귀결되기도 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또 이는 여성에 대한 지극히도 익숙한 이분법(도덕과 부도덕, 순수와 오염 등)을 재생산하는 남성지배적 논리 위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비판 역시 제기되었다.(김현미, "페미니스트가 상상하는 '안전', 여성에게 할당된 '위험' 부담", 2019 한국여성학회 차세대 연구-활동가 여름캠프 <페미니즘×페미니즘> 라운드테이블 토론문)

그리고 위의 문제의식에 기반하되 한 걸음 더 바싹 들어가 최근 숙명여대 사건을 통해 드러난 여성과 '안전' 담론, 그리고 장소의 정치가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여자대학교(이하 여대)라는 장소가 페미니스트 정치학 내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그것이 '안전'에 대한 전체 담론과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의 '안전'을 요청하는 페미니스트 정치학은 구체적인 현실 속의 장소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다른 말로 묻자면,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학은 특정 장소에 의의와 가치를 부여하는 장소의 정치학과 어떻게 맞물려 작동하고 있는가?

정체성과 공간이 맞물리는 정치학

여대라는 공간은 주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 우선 여대는 여성이 사회적 소수자라는 인식, 즉 교육면에서 남성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놓인 집단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 곳임을 짚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여대는 어떤 의미가 됐든 소수자인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이해되며, 여대의 성격과 정체성은 곧 보편 여성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어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 이후 여대는 "메갈 양성소", "페미니스트 전초기지"라는 명성을 획득하며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부분적으로 대표하는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여대에 대한 사회의 보편적 인식은 다소 양분되어 있는 듯 하다. 우선 전술한 대로, 여대는 여성들만의 공간이자 따라서 여성들이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동시에 여대는 언제든지 '침범'될 수 있는 수동적인 공간이자 외부인에 의해 해를 입을 수 있는 위태로운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학생들을 물리적으로 위협하고, 성기를 노출한 채 사진을 찍어 올리고,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외부인 남성에 의해 여대가 '침범'당한 사건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바로 이런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공포와 무기력함을 호소하는 학생들의 반응과 이에 공감하는 사회의 모습, 특히 '우리네 딸들'을 위협한 가해자에게 맹목적으로 분노하는 중년 남성 집단의 반응은 여대라는 공간이 갖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특정 장소가 '침범'당하고 위협당할 수 있다는 인식은 그 자체로 그 장소가 어떤 동질적인 정체성에 기반해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구성원들의 인식 속에 확고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으며, 그 선의 양쪽을 전혀 다른 구성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공간으로 상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대를 여대 바깥의 공간과 전혀 다른 공간으로 상상하게끔 만드는 핵심적인 닻이자 기반은 아마 '여성'이라는 정체성일 것이다. 여대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완벽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지만, 숙대 사건에서 해당 학교의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생물학적 여성'으로 호명하면서 외부인인 MTF 트랜스젠더 신입생의 입학을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구성원들 스스로가 '생물학적 여성'의 정체성을 얼마나 유효하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기반을 둔 '안전'의 페미니스트 정치학은 특정 장소에 대단히 빠르고 효율적으로 부착되고 있으며, 그 장소는 개방적이기보다는 폐쇄적이고 복수의 가능성을 수용하기보단 밀어내고 부정하는 곳으로서 구성된다. 이에 대해 폐쇄적 장소의 정치가 '생물학적 여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체성의 정치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고 보는 해석은 대단히 정확하다.(이현재(2018), "디지털 도시화와 사이보그 페미니즘 정치 분석: 인정투쟁의 관점에서 본 폐쇄적 장소의 정치와 상상계적 정체성 정치", 『도시인문학연구』, 제 10호 2집, 127-152.)

'여성'이라는 확고한 주체에 대한 믿음과 외부와 명확하게 분리된 장소에 대한 욕망이 서로를 겹겹이 둘러싸며 같은 시공간 위에 포개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봤을 때 트랜스젠더 학생이 여대를 '침범'한다는 주장은 곧 트랜스젠더라는 이름의 외부인이 여대라는 장소가 갖는 균질성과 폐쇄성, 그리고 그 기반에 있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외부에 실재하는 위협으로부터 여대라는 장소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처럼 순식간에,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타자를 소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생물학적 여성'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학의 효과

'생물학적 여성'을 모든 운동의 근간으로 삼는 움직임에 대한 비판은 새삼스럽지 않으며, 숙대 사건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단순히 성소수자 배제 혹은 정체성 정치의 폐해로 비판받기보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을 필요로 한다. '생물학적 여성'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체성의 정치가 구체적인 장소를 거치며 물리적 경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장소는 다시 동질한 정체성과 특성을 가진 주체들만의 폐쇄적인 공간으로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가 갖는 문제점은 현실 속의 물리적인 장소와 만나 더 빠르게 구체화되고 눈에 보이는 실질적 배제를 낳는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 정체성 정치에 대한 추상적인 비판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의 개입을 요청하고 있다.

여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는 과연 여대가 그동안 '여성들만의' '안전한' 장소였는지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사실 여대는 단 한 순간도 균질하고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주체들의 장소인 적이 없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여대를 구성하는 필수 기반인 것처럼 이야기되었지만, 사실 이는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을 점검하는 수많은 기준들과 엇물려 끊임없이 그 범주 역시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견고한 외벽을 갖춘 정체성에 대한 믿음, 물리적인 선을 긋듯이 외부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집단에 대한 믿음은 스콧이 지적한 페미니스트들의 '판타지'이다.(Scott, J. W. (2001). Fantasy echo: History and the construction of identity. Critical Inquiry, 27(2), 284-304.)

현실 속의 판타지는 실체 없는 실체로서 우리의 인식을 구성하고, 장소 위에 덧씌워지고, 물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인식이자 담론에 불과하다.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만들어진 담론으로서의 '여성' 정체성에 대한 판타지가 구체적인 장소의 굴곡과 만나면서 발생하는 효과들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송유진님은 페미니스트 연구웹진 Fwd의 필진입니다. 이 글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격월간소식지 <월간평등업>에도 실립니다.


태그:#페미니즘, #트랜스젠더, #여성,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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