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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편집자'는 연예인보다 더 보기 힘든 존재다. 2014년에 1인 출판사를 차려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지만, 그 전에 10년 넘게 영상번역가로 살았기에 편집자를 실제로 만날 일이 없었다. 연예인은 TV에서라도 보지, 편집자들은 어디 가야 만날 수 있나?

나는 출판사에 다니며 체계적으로 편집을 배운 게 아니라서 늘 배움에 목말랐다. 편집자의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어떻게 공부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제일 먼저 찾을 수 있는 선배는 책이었다. '출판과 편집'과 관련된 책들을 하나씩 찾아 읽으며 출판 관련 세미나나 강좌를 들었다.

그러던 중 한겨례 문화센터의 인문학 편집 강좌에서 이지은 편집자를 처음 만났다. 1강 수업이 끝나고, 이지은 편집자가 강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는 강사의 목소리가 한순간 내 귀로 날아와 꽂혔다. 

"아니, 10년차 편집자가 이 수업을 왜 들으러 왔어요?" 

10년차인데도 공부하는 편집자라고? 그때부터 나 혼자 몰래 이지은 편집자를 사수로 두면 좋겠다는 꿈을 키우며 팬질을 시작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독서 모임이라도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 이지은 편집자 곁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연락처를 공유했고, 나도 냉큼 끼어들었다.

그렇게 2018년 2월에 나를 포함해 4명이 '편집자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일하는 출판사도 다르고 경력도 다양한 편집자들과 함께 하는 독서 모임이라니!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한 달에 한 번 하는 독서 모임이 나에게는 연예인을 만나러 가는 팬클럽 모임과도 같았다.

편집자들의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지적 호기심이 충만해졌다. 매일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퇴근 후에 굳이 독서 모임에 나와 쉴 새 없이 책 얘기를 하는 그들이 신기하게 보이기도 했다.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그들에게서 출판에 대한 무한 애정이 느껴졌다.

어느 책에선가 '요즘 젊은 편집자들은 공부도 게을리 하고 책도 잘 읽지 않는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편집자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편집자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번역가의 삶과 비슷했다. 저자나 원작보다 앞에 나설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일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편집자의 삶과 편집의 세계가 더 궁금해졌다. 더 자세히,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얘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이지은 편집자가 개인 블로그에 꾸준히 서평을 남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출판사 업무를 하면서 보도자료가 아닌, 서평을 꾸준히 쓴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성실함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지은 편집자의 독서법과 업무 노하우가 궁금했다. 그러다 이지은 편집자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다.

나는 전문적으로 출판을 배운 편집자도 아니고, 인지도도 없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번역가일 뿐인데 과연 내 출간 제안을 수락할까? 오랜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는데 뜻밖에도 흔쾌히 수락을 해줬다.

매일 읽고 쓰는 삶을 사는 편집자는 역시 준비된 저자다. 내가 뜬구름 잡듯 몇 가지 키워드만 제시했는데, 집필 방향부터 목차 정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렇게 <편집자의 마음> 원고가 내 손에 들어왔다.
 
책을 만든다는 건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일하는 것이다.
▲ <편집자의 마음> 표지 책을 만든다는 건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일하는 것이다.
ⓒ 함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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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기획의 출발은 순전히 나를 위한 책을 만드는 거였다. 편집에 문외한이었던 나를 위한 지침서를 갖고 싶었다. 10년차 편집자의 업무 노하우를 단숨에 배우고 싶다는 내 사심이 노골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책을 만들 때 한 명의 독자를 정해 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제대로 성공한 셈이라 할 수 있을까. 다르게 말하자면, '성덕(성공한 덕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고를 편집하며 여러 차례 반복해 읽다 보니 당연히 편집 실무도 배웠지만 이지은이라는 사람을 통해 '편집자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여섯 개 출판사를 다니며 이리저리 치이고 상처받던 사회 초년생이 점점 단단해져 가는 과정은 나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10년 넘게 번역가로 살던 내 삶을 그대로 대입해도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지은 편집자는 처음 입사한 출판사에서 2개월 만에 해고 통보를 받으면서 "넌 편집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평가를 들었다. 어느 분야든 처음부터 능숙하게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모든 신인에게 베테랑급 실력을 은근히 기대하고 요구한다.

"실력 없는 너를 뽑아서 돈 주며 가르치니까 고마워해야 하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는 회사에 들어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 취급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계속 부족한 자신을 탓한다. 이지은 편집자 역시 신입 시절에는 온갖 모욕을 당해도 늘 "죄송하다"고 말할 뿐 제대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10년이 훨씬 지난 이제서야 과거의 자신에게 미안해 하는 이유다.

출판사 역시 회사다. 회사에서 신입으로서 온갖 모멸과 상처를 받아도 '내가 무능한 탓이야'라고 생각하던 이지은 편집자는 이제 달라졌다. 어디선가 같은 상처를 받고 있을 후배에게 '당신 탓이 아니다'라고 담담히 응원의 말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함께 책을 만드는 동료 및 프리랜서들의 마음까지 돌보는 여유가 생겼다.

이지은 편집자는 '내가 행복해야 내 책도 행복하다(39쪽)'는 모토로 일을 한다. '100만 명이 사랑해 주는 책을 만든다 해도. 만든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책은 거짓말을 하는' 거니까. 나는 <편집자의 마음>을 편집하면서 동료 겸 사수 하나를 얻었다. 내가 <편집자의 마음>을 만들면서 행복했으니, 적어도 이 책이 독자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편집자의 마음 - 공감하고 관계 맺고 연결하는

이지은 (지은이), 더라인북스(2020)


태그:#편집자의마음, #더라인북스, #이지은편집자, #책을만든다는것, #슬기로운직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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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며 글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영상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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