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겠지만 농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의하여 좌우되는 비중이 더 큰 종목으로 꼽힌다. 재능은 우수한 신체조건이나 농구지능, 성장 속도 등을 모두 포함한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난다긴다 하는 최고의 재능을 지닌 농구 선수들이 여러 단계를 거쳐 프로의 세계까지 올라온다. 이 과정에서 한때는 천재 소리를 듣던 선수들도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반면 한번 성장이 정체되거나 경쟁에서 밀려난 선수들이 뒤늦게 각성하여 빛을 보는 경우는 정말로 드문 것이 농구판이다.

남자프로농구 2019-20시즌 신인왕은 김훈(원주 DB)이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15순위로 DB에 지명된 김훈은 데뷔 첫해 23경기에 출전해 평균 2.7득점 1.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기록 자체는 신인왕치고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김훈은 그해 데뷔한 신인중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김훈의 신인왕 수상이 유독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바로 그가 걸어온 이색적인 경력 때문이었다. 김훈은 연세대 2학년 시절 한때 농구를 그만두고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3대3 농구에 뛰어들거나, 아예 농구와는 거리가 먼 다양한 직업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뒤늦게 프로의 문을 두드렸다. 지난해 11월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을 때 김훈의 신분은 다른 대학출신 선수들과 달리 '일반인'이었다.

신인드래프트에서 김훈보다 앞서 지명을 받았던 14명은 모두 고교나 대학까지 공백기 없이 평생 농구를 해온 선수들이었다. 한때 농구를 포기했던 선수가 일반인 자격으로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은 것도 드문 일이지만, 난다긴다 하는 대학 유망주 출신들을 모두 제치고 생애 한 번뿐인 신인왕까지 수상한 것은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김훈의 신인왕 수상은 '꿈을 지닌 자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기적이었다.

하지만 프로농구 역사에는 김훈보다도 훨씬 더 드라마틱한 농구인생을 살았던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최근 고양 오리온에서 은퇴를 선언한 박상오다. 김훈이 신인왕을 수상했다면 박상오는 프로농구 선수의 정점이자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MVP까지 수상했던 '대기만성'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박상오의 농구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골밑슛을 시도하는 박상오

골밑슛을 시도하는 박상오 ⓒ KBL

   
박상오는 광신고와 중앙대를 거쳐 2007년 신인 드래프트 전체 5순위로 부산 KTF(현 부산 kt)에 지명됐으며 서울 SK와 고양 오리온 등을 거치며 선수생활을 보냈다. 양동근(은퇴)-김동욱(서울 삼성) 등과 동갑인 81년생이지만 프로 데뷔는 한참 늦은 20대 중반에야 했다.

박상오는 대학 재학시절 송영진-김주성 등 당시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버티고 있던 중앙대농구부에서 적응하지 못하여 한때 운동을 포기하고 현역병으로 군에 입대했고 만기 전역했다. 엘리트 농구 선수들이 상무나 공익근무를 통하여 병역을 해결하는 것과 달리, 3년 이상 농구와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런 선수들이 재기하는 사례는 농구계에서 극히 드물다.

하지만 박상오는 용기를 내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다시 농구부의 문을 두드렸다. 공백기에 대한 우려에도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대학무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신인드래프트에서는 예상보다 높은 순위지명을 받으며 프로진출까지 성공했다.

박상오의 인생역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프로인생은 KT에서 추일승과 전창진, 두 감독을 잇달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꽃을 피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두 감독 모두 선수 시절에는 그리 빛을 발하지 못했던 아픔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추일승 감독이 박상오를 처음 지명하며 프로 인생의 시작과 끝을 사실상 함께했다면, 전창진 감독은 박상오의 최전성기를 열어준 지도자였다.

당시 KT는 박상오를 비롯하여 송영진-김도수-김영환 등 막강한 장신 포워드 군단을 자랑하는 팀이었다. '포워드 덕후'로 유명한 추 감독이 이 선수들을 끌어모았다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것은 전창진 감독 시절이었다. KT는 전창진 감독 부임 이후 2시즌 연속 정규리그 40승 이상을 거두며 꼴찌팀에서 당당한 우승후보로 거듭났고, 박상오는 KT 포워드 군단의 핵심자원으로 부상하며 리그의 엘리트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박상오 농구인생의 하이라이트 시즌이었던 '2010~2011'

2010~2011시즌은 박상오 농구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박상오는 평균 14.9점에 5.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KT는 그해 41승 13패로 정규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우며 1위에 올랐다. 화려한 기술이나 폭발적인 득점력은 없지만 엄청난 강골에다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능력, 감독의 요구를 성실히 이해하는 전술소화력과 의외로 뛰어난 농구센스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전창진표 포워드 농구에 가장 최적화된 선수였던 것이 뒤늦은 전성기를 여는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한 번도 기록하지 못한 선수, 대학 시절까지 스타였던 적도 없고 심지어 3년간 군복무기간을 포함하여 농구와 인연을 끊었던 선수, 심지어 27세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프로에 데뷔하여 벤치멤버를 전전하던 늦깎이 선수가 30대에 접어들며 각성하여 쟁쟁한 슈퍼스타들을 제치고 MVP급 선수로까지 성장했다는 스토리는, 드라마로 만들어도 현실성이 없다고 느껴질 법한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양동근, 이상민, 서장훈, 김주성 등 역대 프로농구 MVP들은 모두 유망주 시절부터 일찌감치 그 재능을 인정받은 스타들이었고, 박상오 같은 대기만성의 사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프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험난한 경쟁의 세계에서 좌절하기 쉬운 모든 무명 선수나 벤치멤버의 귀감이 되는 대목이다.

아쉬운 부분은 MVP 수상 이후에 상승세를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커리어가 내리막을 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도 MVP 시즌의 성적이 '거품'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2012년에는 FA자격을 얻어 서울 SK로 팀을 옮기며 꾸준히 플레이오프 무대와 챔피언결정전까지도 밟았지만, 자신이 전술의 중심이었던 KT 시절과 비교하면 기록이 하락하며 조연의 역할에 만족해야했다. 프로 MVP 출신임에도 성인 국가대표로 메이저급 국제대회 한번 나가지보지못했고, 챔피언결정전 우승도 끝내 이루지 못했다.

박상오는 이후 친정팀 KT 복귀를 거쳐 고양 오리온에서 추일승 감독과 말년을 함께했다. 2018-19시즌에는 출장시간이 줄었지만 54경기 전게임을 소화하며 노익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지막이 된 2019-20시즌에는 팀성적 부진과 추 감독의 사임, 코로나 사태로 인한 시즌 조기종료로 다소 아쉬운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 박상오는 현역 연장 여부를 두고 고심 끝에 결국 은퇴를 선택했다.

늦은 나이에 데뷔했음에도 박상오는 어지간한 선수들보다 프로무대에서 오래 버티며 한국나이 마흔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규리그 통산 603경기 출전은 역대 1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남들보다 월등한 재능을 지닌 것도,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음에도 프로무대에서 쟁쟁한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이야말로 박상오라는 선수의 얼마나 끊임없이 열정을 다해 노력해왔는지를 증명하는 기록이다.

최근 양동근-전태풍에 이어 KBL은 한 시대를 풍미한 또 한 명의 훌륭한 농구선수를 떠나보내게 됐다. 화려함에서는 남들보다 더 빛나지는 못했을지라도, 치열한 프로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공신화를 이뤄낸 박상오의 농구인생은 충분히 '레전드'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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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선수박상오 프로농구역대MVP 대기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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