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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지식인, 혹은 스타들의 목소리만 넘쳐나는 속에서 진짜 이 사회의 주인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살려내고자 합니다. 노동자 개인의 삶을 인터뷰하면서, 어릴 적 꿈과 직장을 구하는 과정, 일터에서의 보람, 힘든 점,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의식의 변화 등을 중심으로 진솔한 삶을 기록합니다.[기자말]
"그림 말고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른 걸 잘했다면 미대 진학할 때 부모님이 반대하셨을 거예요. 그림은 돈벌이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잖아요?"

2019년 만화책 <저 청소일 하는데요?>를 출간한 김예지씨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커서 무엇이 될 거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미술가'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고3 때까지 미술학원에 다니지 못했다.

고3이 된 그의 고민은 깊었다. 학원에서 입시 미술을 배우지 않고서는 미대에 진학하기 어려웠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친구가 학원비를 할인해 주는 미술학원을 소개했다. 그렇게 뒤늦게나마 어렵게 입시 준비를 해서 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청소 일 하는 젊은이'를 납득하지 못하는 시선과 만나다
  
일상의 평범한 시간 속  감정과 기억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고 공유하는 작가 김예지, 그는 청소 일을 하면서 우리 사회의 직업과 노동에 대한 편견과 마주할 수 있었다.
▲ 김예지 작가 일상의 평범한 시간 속 감정과 기억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고 공유하는 작가 김예지, 그는 청소 일을 하면서 우리 사회의 직업과 노동에 대한 편견과 마주할 수 있었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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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엔 1년 정도 인턴사원으로 일했다. 그때 했던 상품스타일리스트 일은 재미있었고, 계속 했으면 정직원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월급이 너무 적어 학자금을 갚기에도 빠듯했다. 무엇보다 상품스타일리스트는 그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예지씨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회사에 원서를 넣어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던 그에게 엄마가 먼저 청소 일을 제안했다. '회사 들어가 봤자 박봉에 시간 여유도 없을 거고, 네 뜻에 맞는 그림 작업을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청소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개인매장 주인이나 건물주와 계약을 맺어 일정 기간 '맞춤형 청소'를 해주는 일이었다. 시간 조절이 가능하며 수입도 괜찮은 편이고, 무엇보다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예지씨는 엄마와 함께 청소 일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일터로 가야 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특별한 간섭이 거의 없었고, 일한 만큼 수입도 보장됐다. 일의 특성상,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몇 마디 인사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 몇 마디가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었다.

마주치면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네던 이가 어느 날 "내 자식은 이런 거 못 시켜. 자식 이런 거 시키면 나중에도 좋은 일 못 하지. 내 자식은 좋은 것만 시킬 거야"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지나다가 청소하는 예지씨를 보고 "좋은 회사 다니고 효도해야지"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런 말들로 상처를 줬을 때 예지씨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무심한 언행이 가끔 예지씨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쟤는 내가 이런 일 한다고 무시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자격지심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불편한 감정을 떨치기 힘들었다.

예지씨는 남들의 시선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저 견딜 뿐이었다. 당연히 마음속에서 복잡한 고민과 의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음에 질문을 품게 되었으니, 답을 찾아야 했다. 청소 일을 하면서 그는,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타인에게 설명하는 첫 번째 명사가 '직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한 사람의 직업이 '그가 열심히 살았는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잣대가 됨을 새삼 느꼈다.
  
청소 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젊은이들이 흔히 가지는 직업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는 예지씨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사'를 필요로 했다. '쟤는 왜 사회생활 안 하고 이걸 하나?', '미혼모인가?', '할 일이 정말 저것밖에 없나?' 같은 다양한 호기심이 존재했다. 그리고 예지씨 자신도 청소 일을 하는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서사'를 넣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경제적 여유와 시간상의 이유로..."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질문했다.

"누구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냥 납득하면 되는데, 왜 다들 그렇지 못한 걸까? 왜 나이, 성별, 학벌을 따지며 선택의 폭을 제한하는 걸까? 남의 인생에 오지랖이 아닌가?"

그 질문에 다시 답하기 위해 예지씨는 그런 '오지랖'의 이유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학습했던 게 아닐까? 예지씨와 친구들은 '대학이 달라지면 남편이 달라진다'는 류의 말들을 들으며 자랐다. 또 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 질문에 장래 희망이라며 '직업'을 대도록 요구받았다.

그렇게 20년을 지내다 보니, 자신이 원했던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장래 희망으로 '그저 열심히 살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미래의 나'를 얘기해도 되는데, 왜 직업만을 얘기하라고 했을까? 그 결과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패배감을 떠안게 된다. 예지씨는 이것이 너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되어 '꿈'을 이뤘다고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해피엔딩을 이룬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쓴 책, '저 청소일 하는데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기에, 꿈만 쫓고 있을 수 없었던 김예지씨가 청소 일을 선택하면서 겪은 체험과 고민이 담긴 책. 그는 청소 일을 하면서 타인 뿐 아니라  스스로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괴롭기만 할 것 같은 낯선 직업이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었다.
▲ 김예지 작가가 펴낸 책 "저 청소일 하는데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기에, 꿈만 쫓고 있을 수 없었던 김예지씨가 청소 일을 선택하면서 겪은 체험과 고민이 담긴 책. 그는 청소 일을 하면서 타인 뿐 아니라 스스로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괴롭기만 할 것 같은 낯선 직업이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었다.
ⓒ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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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씨는 청소 일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림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SNS를 활용해 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일러스트집을 내자니 아직 자신의 색깔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책을 내서 서점에 깔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보지 않을까? 만화책을 그려야겠다.'

청소 일을 하면서 겪었던 고민을 담은 만화책을 쓰면, 스스로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지금까지 했던 많은 고민을 정리해서 독립 출판을 했다. 생각보다 반응은 뜨거웠다. 책을 읽고 감동한 사람들이 연락해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같은 청소 일을 하는 젊은이가 보낸 장문의 메일은 예지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젊은 나이에 청소 일을 시작해서 6년째 청소하청업체에서 일한다는 그 독자는 스스로를 쓸모없는 패배자라 생각했는데, 예지씨 책을 읽고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하찮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게 되었다'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이런 반응을 보면서 예지씨는 '한국사회도 변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요즘 예지씨가 바빠졌다. 책을 내고 이곳저곳 강연을 다니고, 다음 책도 준비 중이다. 제대로 된 작업실도 마련했다. 그럼 청소 일은 계속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도 청소일을 하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할 것 같다고 했다.
  
"일주일에 몇 번은 나가서 몸 쓰는 일을 하니 생각보다 좋더라고요. 그림 그리는 일은 내내 앉아 있는 작업이니까요.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직업을 가지는 걸 꿈꾸도록 배웠지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일이죠.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을 떳떳하게 제공하고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 그게 어른의 일 중 가장 기본적인 게 아닐까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말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진짜로는 '직업에 귀천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편견을 대변하는 말이죠. 옛날에는 신분에 따른 계급이 있었다면, 지금은 직업이 계급이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요즘 김예지씨는 바빠졌다. 책을 내고 이곳저곳 강연을 다니고, 다음 책도 준비 중이다. 제대로 된 작업실도 마련했다. 그럼 청소 일은 계속 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도 청소일을 하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할 것 같다고 했다.
▲ 새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 김예지 작가 요즘 김예지씨는 바빠졌다. 책을 내고 이곳저곳 강연을 다니고, 다음 책도 준비 중이다. 제대로 된 작업실도 마련했다. 그럼 청소 일은 계속 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도 청소일을 하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할 것 같다고 했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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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평범하게 회사에 다녔으면 이런 생각 안 했을 것이라 했다. 청소 일을 하면서 김예지씨는 우리 사회의 편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소수의 삶이 외롭고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수'에 속한 사람들이 '소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그들에게 상처 주는 언행을 너무 쉽게 하는 것도 체험했다. 자신은 직업적으로 그런 아픔을 겪었지만, 같은 '소수'에 속한다는 점에서 장애인이나 다문화가정 같은 사람들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지씨와 같은 삶을 사는 젊은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특히 예체능 계열은 투잡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투잡이 아니더라도 알바 노동을 수시로 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다음 세대들은 직업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저에게 청소 일은 고마운 것이죠. 남들에게 없는 '김예지만의 이야기'가 생기도록 했으니까요."

지금 그의 꿈은 화가나 디자이너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보람되게 일하며 당당하고 멋지게 늙어가는 것'이다. 그림도 청소 일도 그의 삶의 일부인 건강한 노동일 뿐이다. 물론 그림을 그리면서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창조적 기쁨을 나눌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인간 '김예지'를 완벽히 대변하지는 않는다. 직업과 상관없이 그는 그 자체로 충분히 존재의 이유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 -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

김예지 지음, 21세기북스(2019)


태그:#저 청소일 하는데요?, #김예지, #21세기 북스, #청소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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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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