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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고 섬뜩하기까지 한 책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 시구에서 따왔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하늘에서 허공에서
눈의 가위로
그 손가락을 잘라라
너의 입맞춤으로
이렇게 접혀진 것이 숨을 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종교사학을 전공한 저자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책 제목으로 삼은 것은 결코 종교에 대한 부정이나 경멸은 아니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릴리젼(religion)은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에서 온 것으로 '결합하다', '재독(再讀)하다'의 의미이다.

시에서 '이렇게 접혀진 것'은 바로 '책'을 의미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기도가 아닌, '눈의 가위'로, '너의 입맞춤'으로 보고 읽는 책임을 나타낸다. 그러니 기도하는 그 손을 자르고,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再讀)이 바로 종교와 삶의 과제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제목으로 어필하고 있다.

"독서는 무엇인가, 독서는 '네모'다"라고 했을 때 '네모' 안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저자는 '혁명'을 '네모' 안에 넣는다. 어떻게 독서는 혁명일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첫째 밤에서 문학의 범주를 글을 읽고 쓰는 일반으로 넓힌다. 둘째, 셋째, 넷째 밤은 독서가 혁명이 되었던 사례를 마르틴 루터, 무함마드, 중세 해석자 혁명을 통해 설명하고, 다섯째 밤에는 다시 문학이 죽었다느니, 문학의 종말이니 하는 엄살떨지 말고, 혁명의 근원으로서의 문학의 분발을 촉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 된다.
 
책읽기가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상상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읽기가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상상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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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권장하는 책이 많지만, 그 어떤 책도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보다 뜨거울 수 없다. 카프카가 일찍이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다면, 이 책은 우리 마음속에 얼어붙은 바다였던 이슬람교, 무함마드, 중세, 종교개혁, 문학, 책에 대한 안일한 생각들을 거침없이 깨뜨리는 최강의 도끼임에 틀림없다.

첫째 밤 - 문학의 승리

저자는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고 한 질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며, 지(知)에 종사하는 한 우리에겐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비평가'가 되거나 아니면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전문가'가 되거나 아니면 비평과 전문성의 최악의 결탁이라는 빈약하고 왜소한 선택지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진단한다.
 
"꼴사납게도 정보에 토실토실 살이 찌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비평가가 될 것인가, 초라하게 자기 진영에 틀어박혀 비쩍 말라가는 전문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각 자리에 어울리게 그 두 개의 가면을 재빨리 교체하며 살아갈 것인가." 25쪽
 
하지만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고 전제하고, 정보를 차단한다. 그리고 "한 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벌거벗은 '읽기'의 노정에 들어선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연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한 문학은 라틴어 '문자(littera)'에서 기원한 말로 읽고 쓰는데 필요한 문학적 학식 일반을 뜻하므로 어떤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저작물의 총체를 포괄한다고 말한다. 철학자 존 로크, 물리학자 뉴턴,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도 모두 문학가인 것이다. 그들은 광기를 내포하고 반(反) 정보로서의 문학, 세계 변혁의 가능성을 잉태한 지적 세계, 즉 문학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둘째 밤 -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저자는 '대혁명'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대혁명은 바로 성서를 읽는 운동으로 정의된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바로 혁명이었던 것이라고.

루터는 이상해질 정도로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는다. 베껴 쓰고, 몇 번이고 메모하며 되풀이해서 읽는다.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도 공부하여 몇 번이고 읽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세계가 성서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황, 추기경, 대주교, 수도원, 면죄부 같은 것이 성서에 없다는 것을.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85쪽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91쪽
 
읽어버린 이상 루터는 멈출 수 없다. "교회도 잘못을 저지른다"는 치명적인 말을 하고, 대이단으로 선고받는다. 루터는 그렇게 근세 최대의 무법자가 된다. 95개조 의견서를 내고,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다. 루터는 16세기 최대의 저작가, 문학자가 된다.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문학이 곧 혁명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증명한다.

셋째 밤 -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주신다." 140쪽, 149쪽(두 차례 반복 인용)
 
이는 이슬람 세계를 정초하는 최초의 계시다. '읽어라!'라는 언명에 무함마드는 거부한다. 몇 번이나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는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문맹인 무함마드는 어떻게 읽었을까? 천사 대천사 지브릴의 도움으로 읽는다.

이슬람의 성전 <코란>은 원래 '읽기(qur'ân)'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창조주인 무함마드가 문맹이라니. 읽을 수 없는 것을 그래도 읽어야 하는 역설, 읽을 수 없는 모순된 세계와 맞서야 하는 혁명이 바로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던 것이다.

문맹이라는 아랍어 움미(ummi)는 '어머니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읽기'라는 의미의 <코란>에는 인간이 읽을 수 없는 신의 말인 원본이 있는데, 그 원본을 '책의 어머니'라고 한다. <코란>은 그 원본의 사본인 셈이다.

저자는 이슬람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어머니란 뜻의 문맹 남자와 근원적으로 읽을 수 없는 책의 어머니 사이의 관계에서 잉태된 것으로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무함마드는 천사라는 매개, 번역을 통해 눈으로 소리를 읽고, 귀로 문자를 듣는다. 저자는 이를 소리와 문자가 미분화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형태의 '읽기'로 보며, 이슬람은 이 '읽기'에서 의해 잉태되었다고 본다.

넷째 밤 - 우리에게는 보인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유스티니아 법전, 즉 <로마법 대전> 50권이 발견된다. 수많은 법학자, 신학자, 문법학자들은 거대한 로마법의 유산을 밤새 읽고 또 읽으며 중세의 교회법을 고쳐 쓰기 시작한다.

이를 저자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 수수하고 담담한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근대법, 근대 국가, 근대 주권, 근대 의회, 근대 정치제도, 근대 자본제의 원형이 창출되었다고 주장한다. 과학 또한 이 혁명의 발명품이며 실증주의 또한 여기서 탄생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초기 설정'한 혁명이 바로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00년 가까이 이어진 법전에 대한 철두철미한 해석 작업은 '데이터베이스'로서의 법문체계를 완성하고, 모든 통치의 정보화를 가져오게 된다. 시, 춤, 노래, 예술까지 포함하던 '텍스트'라는 개념은 다양한 가능성을 잃고, 철저하게 법, 규범에 관련된 정보의 개념으로 축소되고 만다.

다섯째 밤 -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그리스인이 쓴 책 천 권 중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두 권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남은 0.1퍼센트의 그리스의 저작은 이슬람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고, 세계 문화의 초석이 되었다.

19세기 문학의 황금기라고 하지만, 당시 유럽의 문맹률은 50%를 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90% 문맹률이라는 파멸적 상황에서 글을 썼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문학의 위기니 문학의 죽음이니 운운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또 쓰는 것은 늘 혁명의 힘이 거처하는 곳임을 믿고, 5000년 밖에 되지 않는 젊은 학문인 문학은 혁명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저자는 생물 '종'의 평균연령은 대략 400만 년이고, 인류는 20만 년 전에 출현했으니 아직 380만 년이라는 영원의 시간이 남았다고 한다. 종말론에 현혹되지 말 것을 충고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책 읽기에 관한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임을, 혁명을 불러들이는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독서가 책을 읽고, 고쳐서 읽고, 고쳐서 쓰고, 법을 바꾸는, 목숨을 거는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상상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책을 읽고 말았으니, 읽고만 이상, 읽은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든 지식이 정보에 포섭된 병든 세계에서 우리는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책읽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 곁에 발소리가 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 한 발테 벤야민의 말처럼 우리 곁엔 니체, 푸코, 르장드르, 들뢰즈, 라캉이 있다.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긍지이고, 싸움이고, 책읽기여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299쪽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이룸)(2012)


태그:#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책읽기,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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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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