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분(정은경·왼쪽)은 고향에 왔다가 호기심에 딸 한희(장선)을 찾아간다.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은 숨긴다.

영분(정은경·왼쪽)은 고향에 왔다가 호기심에 딸 한희(장선)을 찾아간다.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은 숨긴다. ⓒ 영화사 삼순

 
"몇 달 전에 한희가 찾아왔어요. 엄마가 보고 싶대요."

고향에 와 지인의 미용실을 찾은 영분(정은경)이 지인 대신 만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편지를 읽은 영분의 표정은 무심하다. '○○○ 필라테스 담당강사 정한희'라고 적힌 명함을 잠시 보더니, 하천에 던져버리고 자리를 떠난다.
 
23일 개봉하는 <바람의 언덕>(감독 박석영)의 초반부다. 영분은 얼마 후 그 자리로 돌아가 명함을 줍는다. 그 길로 필라테스 학원을 찾아간다. 학원 문 앞에 쌓인 광고지에서 딸의 얼굴을 보는 영분. 그때 문을 열고 나오는 한희(장선). "누구세요?" "저요?" "필라테스 학원에 오셨어요?" "구경 좀 하려고요." 손님이라는 사실에 한희가 활짝 웃는다. "저희가 야간반이 없긴 한데 들어오세요." 끊어졌던 두 사람의 연(緣)이 우연처럼, 필연처럼 다시 묶이는 순간이다.
 
인간은 이중적이다. 선의를 베푸는 것 같다가도 자신이 짐을 짊어질 것 같은 순간에는 그 자리를 피한다. 엄마라는 위치에 서 있는 여성도 다르지 않다.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꼭 따뜻함과 부드러움만이 있으라는 법은 없다. 엄마도, 때로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기도 한다. 잘 살고 싶으니까. 영분이 때때로는 한희의 엄마 같지만 때로는 평범한 남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영분이 한희 몰래 학원 전단지를 거리에 붙이고, 한희가 없는 자리에서 "한희야~"라고 소리 내부를 때는 그리움과 간절함에 몰입하다가도 갑작스럽게 한희 곁을 떠나려고 할 때는 급격하게 마음에서 멀어진다. 박성영 감독은 추운 어느 겨울 저녁에도 온기가 떠도는 것처럼 적당히 따뜻하고 건조하게 그려냈다.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 영화사 삼순

  
모녀의 상봉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 불안한 삶을 헤쳐나가려는 한희보다, 영분의 지지부진한 삶의 궤적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다. 왜 영분은 남편과 사별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왜 사별한 남편의 아들은 영분을 아줌마라고 부를까. 왜 영분은 시집을 여러 번 갔다 왔을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넌지시 추측할 수 있다. 영분의 삶이 꽤 오랫동안 꽉 뭉친 실타래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불안할 때마다 그는 안정적인 곳을 찾아 떠났던 것은 아닐까.
 
"누가 너무너무 좋을 수가 있잖아요. 근데 또 너무너무 미울 수가 있잖아요"라고 시작하는 영분의 작은 하소연. "사람이 너무너무 미안할 수도 있잖아요. 너무너무 죽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너무, 너무, 너무 행복해서 이럴 때 하늘에서 나 좀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잖아요. 나는요. 되돌리고 싶어요. 나는 되돌리고 싶어. 근데 그럼 안 되잖아요." 한 마디 더 붙인다. "아, 억울해." 쉬지 않고 달려오던 삶의 어느 길목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 법한 이야기. 같은 곳을 바라봐도 피어나는 감정은 교집합처럼 펼쳐지는 것처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영분의 태도에 가만히 수긍하게 된다.

하얗게 눈 덮인 산을 보여주며 시작한 영화는 눈이 녹은 산에서 끝을 맺는다. 불안해서 찾아온 고향 땅에서 영분은 정착할까, 떠날까. 마음 한구석은 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진수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박석영 바람의 언덕 정은경 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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