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 < 1917 >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 1917 >을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용어가 '원 컨티뉴어스 숏'일 것이다. 롱테이크나 원테이크가 한 번에 찍은 한 장면이라면, 원 컨티뉴어스 숏은 여러 장면을 이어 붙여 한 장면처럼 보이도록 한 기법이다.

영화 < 1917 >이 원 컨티뉴어스 숏 기법을 사용하며 의도하는 가장 강력한 효과는 무엇보다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몰입감이다. 이 의도가 잘 반영된 듯 영화는 놀랍도록 생생했으며, 이 생생함은 최대한의 몰입감을 동반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마치 가상현실을 체험하며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관람 내내 인물이 느끼는 극도의 긴장감이 실제처럼 체감되어 참혹한 영화 속 현실에 속해 있는 듯하다.
 
영화 <1917> 포스터

▲ 영화 <1917> 포스터 ⓒ 스마일이엔티

 
원 컨티뉴어스 숏이 이토록 현실감을 전해주는 이유는 영화의 시간이 관람자와 유리되지 않고 밀착된다는 데 있다. 장면의 전환은 영화가 조작된 현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현실과의 거리감을 생성하기 마련이다. 영화 < 1917 >은 이 거리감을 거의 만들지 않는다. 인물을 바짝 쫓는 카메라의 시선은 관람자를 인물의 현실과 초근접으로 밀착시킨다.

원 컨티뉴어스 숏이 전해주는 현장감과 몰입감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생생하게 전해준다. 영화 < 1917 >이 보여주는 전쟁에는 명분도 승패도 선악도 없다. 거기에는 전쟁으로 인해 극한의 고통을 느끼는 개인과 그 곁에 동반하는 '죽음'이 있다.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는 삶의 목적

많은 이들이 일상에서 크게 의식하지는 않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전쟁터는 죽음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죽은 자가 도처에 널려 있으며, 함께 있던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죽어 나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이 작품은 죽음과 맞서는 인간의 생존 본능을 다각도로 조망한다.

영화는 평화롭게 시작된다. 카메라는 먼 곳에서부터 들판의 꽃들을 지나 서서히 내려와 나무에 기대 있던 군인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 분)를 비춘다. 마치 천상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한 가볍고 온화한 연출한 곧 시작될 긴박함과 큰 대비를 이룬다.

상사의 호출을 받은 블레이크는 전우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분)와 함께 지도부를 찾는다. 그에게 에린 무어(콜린 퍼스 분) 장군은 데번셔 연대에게 공격 중지 명령서를 전달할 것을 명령한다. 내일로 예정된 연대의 공격은 독일군의 함정으로, 공격 시행 전에 부대에 도착해야 1600여 명의 병사를 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연대에는 블레이크의 형도 있었다.

명령을 받은 블레이크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움직인다. 앞뒤를 재지 않는 블레이크와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스코필드는 너무나 달라 보인다. 농담을 좋아하며 감성적인 블레이크와 달리 스코필드는 이성적이고 냉소적이다. 

그러나, 이 임무에 그 누구보다 블레이크가 제격이라는 것에는 그리 이견이 없을 것이다. 독일군 주둔지를 가로질러야 하는 이 임무는 성공 여부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형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혈육에 대한 본능으로 블레이크가 임무 수행에 사력을 다할 것이라는 것은 예측은 가능하다.
 
영화 <1917> 한 장면

▲ 영화 <1917> 한 장면 ⓒ 스마일이엔티


 
임무 완수에 대한 블레이크의 불타는 투지가 1600여 명의 병사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형 한 사람의 생명 때문임은 자명하다. 명령을 받아든 순간부터 자신에게 형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이 블레이크에겐 무엇보다 중요할 터였다. 목숨을 걸고 목숨을 지키는 것이다.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처럼 임무 완수에 대한 절실함이 없다. 그러나, 목숨을 건 여정을 함께하며 블레이크의 투지는 스코필드의 것이 된다. 한발한발이 위태로운 이 '미션 임파서블'에 대한 스코필드의 냉소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것은 포화 속을 함께한 전우 블레이크에 대한 최선의 예의이다.

데번셔 부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코필드는 지하에 숨죽여 지내는 여인과 아기를 목격한다. 여인과 아기는 전쟁이 만든 폐허의 한복판에서 만난 타인들이다. 포화에 무너진 잔해 아래, 여전히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아기를 안은 여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생존하는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음이 존재하는 곳에 삶이 먼저 자리한다. 지켜주어야 할 누군가가 있는 사람은 죽음이 휩쓸고 간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목숨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보전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이 참혹한 전쟁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며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이들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죽음을 어찌할 수는 없지만 이에 굴하지 않는 역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거둬낸다. 그 역동이 혼자만의 생존을 뛰어넘어 다른 이를 위한 것이 될 때 감동은 배가 된다. 그들의 생존과 '나'의 살아있음에 안도하며 우리는 죽음을 뛰어넘는 삶의 다양한 목적들을 확인한다.

옆에 있는 듯 거칠게 몰아쉬는 스코필드의 숨소리는 생생하다. 이 참혹한 전쟁터 속, 그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죽여야 사는 전쟁의 참상

영화 <1917>에는 전쟁을 소재로 한 많은 영화들에 등장하는 전투 장면이 없다. 마지막에 전투를 시작하는 장면이 잠시 등장할 뿐이다. 영화는 스코필드의 임무와 상관없는 대규모 전투 장면 대신 스코필드와 독일군 개인의 대결 장면을 각각 다른 양상으로 삽입한다. 다수의 무차별적인 죽음은 무척 끔찍해 혐오감을 형성하나 정서적인 거리감을 크게 좁히지 못한다. 관람자는 감정이입된 주인공의 위기에 더욱 민감하다. 일대 일의 전투는 대규모 전투보다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독일군을 죽일 수밖에 없는 스코필드의 입장은 전쟁의 참상을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한다. 자신의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상대를 죽여야만 한다. 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두 사람 중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싸우는 것은 적이기 보다는 죽음이다. 이곳에서 전쟁의 대의명분 같은 것은 사라진다. 이들이 무슨 이유로 이 같은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영화 <1917> 한 장면

▲ 영화 <1917> 한 장면 ⓒ 스마일이엔티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매순간 죽음과 싸우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전투 후 곳곳에 버려진 시체들, 비좁은 참호 속에 갇힌 듯 존재하는 비참한 군인들의 모습을 통해 전달한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시작된 전쟁의 현장에는 숫자로 기록될 뿐인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들이 존재한다. 영화는 생존을 위해 사투하는 개인을 집중 조망함으로써 전쟁의 고통을 보다 현실화한다. 1600여 명의 목숨은 곧 이름을 가진 1600여 명의 블레이크이자 스코필드인 것이다.

원 컨티뉴어스 숏은 이와 같은 영화의 메세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먼 역사 속의 전쟁이 시간을 가로질러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가져온다. 죽음을 마주한 인물들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는 전쟁의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한다.

많은 게임이 전쟁을 모방하여 제작되었고, 영화 <1917>은 게임의 방법을 모방하여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재현한다. 그러나, 전쟁은 결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를 죽이고 제거됨에 상관없이 반복할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 같은 것이 아니다. 전쟁을 재현한 게임은 결코 전쟁의 참상을 전해주지 않는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런 게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쟁은 하나 뿐인 목숨이 매순간 위험에 처하는 것이며, 전쟁이 참혹한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매순간 죽음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지닌 공격 중지 명령서는 전투를 잠시 연기할 뿐, 전쟁을 멈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계속된다면 살아남는 숫자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전쟁은 지속적으로 죽음을 불러들인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하여도 전쟁은 명백한 '인재'이다.

임무를 수행하며 스코필드는 자신이 결코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았을 것이다. 나무에 기대앉아 사진을 꺼내 보는 스코필드는 이전과 조금 달라 보인다. 앞서 집과의 기억을 그리 긍정적으로 떠올리지 않던 그였다. 허나,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메시지는 이제 달리 느껴질 터였다. 누군가가 기다린다는 것은 살아야 할 하나의 이유가 된다.

다시 태어난 듯한 그는 새롭게 삶을 느낄 것이다. 내일 다시 목숨이 경각에 달릴지라도 이 잠시의 안식은 살아 있지 않다면 느낄 수 없다. 이것이 영화 < 1917 >이 원 컨티뉴어스 숏을 이용해 죽음이 임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지 않는가.
 
영화 <1917> 한 장면

▲ 영화 <1917> 한 장면 ⓒ 스마일이엔티

 
어떤 영화가 선택한 특정한 기법이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최적일 때, 더구나 그 기법이 보지 못했던 때 새로운 시도일 때 영화가 주는 만족감은 더욱 상승한다. 완벽하지 않았더라도 영화 < 1917 >은 그러한 영화였다. 이 영화가 전쟁을 막는 전령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큰 기대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영화 < 1917 >은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전령이 되어 주었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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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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