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4 15:07최종 업데이트 20.04.1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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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카피텔 광장. 황금 지구의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는 9미터 높이의 조형물이다. ⓒ 막걸리학교

 
코로나19로 여행을 떠날 수 없으니 지난 여행 사진을 자꾸 뒤적인다. 그러다 3년 전 이맘때의 행선지를 보게 되었다. 2017년 4월 11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켈레티 역에서 오전 9시 40분에 RJ062 기차를 타고 5시간 12분이 걸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역에 도착했다. 잘츠부르크 시내의 태권도 도장이 있는 길 건너편 호텔에 짐을 풀고, 마을버스를 타고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시내로 들어갔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가에 이르니, 산 위에 왕관처럼 둘러진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1077년 신성로마제국 시절에 구축된 요새, 호엔 잘츠부르크성이다. 첫날은 도시 경관을 보러 그곳에 오르고, 다음날은 아침에 운동 삼아 올랐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잘츠부르크는 성당의 돔 지붕과 규칙적인 문양의 창문, 그리고 성벽처럼 둘러친 하얀 벽채들이 이채로웠다.
 

잘츠부르크의 야경, 성당의 첨탑 뒤로 호엔 잘츠부르크 성이 보인다. ⓒ 막걸리학교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도레미송이 울려 퍼진 무대인 미라벨 정원과 궁전을 가보고, 17세기에 세워진 화려하고 유연한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 안을 들어가보았다. 모차르트가 나고 자란 마을답게 음악회가 열리는 공연장들이 돋보였고, 관광객들이 채우고 간 자물쇠로 무거워진 마카르트 다리도 건너보았다.

소금 광산 마을, 할슈타트에 가다

잘츠부르크(Salzburg)의 잘츠는 소금(salt)을 뜻한다. 근처에 소금 광산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다하여, 이튿날에는 그곳을 다녀오게 되었다. 왕복 쿠폰을 끊고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국 여성 둘을 만났다. 우리 일행에도 여성들이 있어서, 한국 여성들이 특히 좋아하는 곳이 소금 광산 마을인 할슈타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좋아할까? 음악의 선율처럼 흘러가는 강물이 있고, 웅장하게 치솟은 건축물과 성채가 있어, 잘츠부르크만으로도 화려한데 왜 짭짤한 소금 광산에 가려고 할까? 나는 잘츠부르크에서 멀어지면서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중간 환승지 바트이슐 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차창 밖으로 멀리 웅장한 산들이 있고, 가까이 산자락에 깃든 마을들이 듬성듬성 펼쳐졌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잘츠부르크까지 오던 길은 완만한 평야 지대였는데, 할슈타트로 가는 길은 웅장한 산들이 동행했다. 머리 뒤로 한참 올라오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 부지런히 길을 가는 여행자들이 고단해 보이기도, 부럽기도 했다.
 

호수가 마을 할슈타트. ⓒ 막걸리학교

 
바트이슐 정거장에 내려 기차로 갈아타고 다시 할슈타트로 향했다. 기차는 버스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다. 기차의 창이 넓고,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고 또 일행들과 마주 앉을 수 있으니 그럴 것이다.

기차는 우리를 소박한 간이역에 내려주었다. 그곳은 호숫가였고, 선착장이 있었다. 할슈타트로 가려면 다시 배로 갈아타야 한다. 운송 수단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 같았다. 떠나왔던 곳을 아주 잊어버리라는 주문 같기도 했다.

배는 물살도 일지 않은 호수 위를 썰매처럼 밀려갔다. 호수 위로 건너 산 그림자가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 어떤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세상으로 간다. 때로 동행자들에게 여정을 맡기고 무작정 따라나서는 길은 그래서 더 신비롭다.

배가 할슈타트 마을의 선착장에 가닿았다. 집들이 물가에서부터 비탈진 산 위까지 타고 올라있다. 사진을 찍으면 그대로 그림엽서가 되는 곳이다. 마을은 길지도 깊지도 않았다. 수평으로 뻗은 호수와 수직으로 솟은 산, 그리고 그 사이에 사람들이 깃들어 살며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어떤 부족함도 없을 것 같은 편안하고 아름다운 동네다.

마을 안쪽에 소금광산으로 오르는 모노레일이 있었다. 7천 년 전부터 소금을 캤던 광산인데, 인간이 파고 들어간 터널의 길이가 65㎞나 되고, 지금도 채굴이 되고 있고 관광객도 받고 있다고 한다.

소금은 작은 금이다. 소금(salt)을 임금으로 주었던 시절이 있어서 월급, 샐러리(salary)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하니 그렇게 해석할 만하다. 소금 광산의 할슈타트와 소금의 성 잘츠부르크가 소금 때문에 영화로웠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짐작되었다.

할슈타트 마을 골목길을 걷다가, 잘츠부르크 정류장에서 만난 한국 여성 둘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좀 긴 대화를 나눴다. 둘은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이였다. 한 여성은 대기업에서 5년 근무하다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사표를 내고, 새로운 삶을 구상하기 위해 한 달 일정으로 유럽을 여행중이라고 했다.

할슈타트에 대한 인상을 물었더니, 그녀가 말한다. "이 마을에 너의 마음을 다 줘야 해! 그리움이 어디에 사냐고 묻는다면, 이 마을에 산다고 말해줘!" 그런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할슈타트에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찾아갔던 길을 되짚어왔지만, 오던 길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도 없다. 할슈타트의 풍경이 가득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왜 여성들이 그곳을 동경하는지, 그곳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찍는지 이해가 되었다. 내게는 붙들 수 없는 향기 같고, 만질 수 없는 풍경 같고, 소유할 수 없는 판타지 같았다. 화려한 풍경이 나를 안타깝게 만들 뿐 위로되지 않았다.

수도원 지하에서 파는 맥주라니

다시 돌아온 잘츠부르크가 이제는 평범해보였다. 밤이 되었고, 마음도 훨씬 더 차분해졌다. 여행지의 밤은 술 한 잔을 곁들여야 한다. 이때 술을 마다고 숙소로 들어가는 사람은 내일의 여행을 꿈꾸는 사람일 테고, 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늘의 여행을 즐기려는 사람일 것이다. 오늘을 즐기려면, 체력이 좋아야 하고 술도 좀 마실 줄 알아야 한다.

여행자로서 그 마을의 주점에 들고 싶은 또 다른 이유는, 그 마을의 소란과 흥겨움을 공유하고 싶어서다. 그런데 잘츠부르크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넓다는 맥주펍이 있고, 그 펍에서 직접에 맥주를 만들어 파는데, 그곳이 수도원 지하라고 했다.

수도원과 맥주의 조화라니! 벨기에 수도원 맥주가 한국에도 들어와 팔리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와 술은 서로 양극단에 있는 존재인데, 어떻게 연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내게는 그림 같은 할슈타트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술이 있어 매력적인 관광지였다.

잘츠부르크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물을 따라 걷다가 비탈진 언덕에 이르러 길을 잃고 물어물어 찾아간 곳에 관공서 같기도 한 3층 건물이 있었다. 건물 벽에 아우구스티노 브로이(Augustina Bräu) 상호가 있었다. 뒷문 쪽일까? 입구는 좁았다. 앞선 사람을 따라 물살에 떠밀리듯이 우리는 계단을 타고 지하로 빨려들어갔다.
 

1621년 수도원에서 맥주를 처음 팔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아우구스티노 브로이의 맥주펍. ⓒ 막걸리학교

 
지하는 다른 세계였다. 역의 대합실처럼 돔형의 높은 천정이 있고, 넓은 복도가 있었다. 애초에 술집으로 설계된 건축물이 아닌 줄은 쉽게 짐작이 갔다. 복도 한쪽에는 안주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다른 쪽에는 넓은 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복도를 돌아가니, 도자기 맥주잔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선반장이 있었다. 계산대에서 맥주값을 지불하고, 잔을 직접 골라 식수대에서 잔을 씻고 영수증을 제시하면 오크통에서 맥주를 따라주었다.

안주는 복도에 있는 음식 코너에서 직접 주문하여 받아온다. 소시지, 돼지족발인 학센, 감자칩, 치킨, 수제 빵 들이 있었다. 그리고 술과 안주를 들고 원하는 홀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는데, 홀마다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마당으로 나가보니 비어가든이 있다. 비어가든까지 해서 모두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가든을 지나 건물을 돌아나오니, 양조장이 나왔다. 창문을 들여다보니 구리로 만든 당화솥과 발효솥이 있다. 맥주 제조 작업이 끝났지만, 불을 밝혀두어 내부 설비를 볼 수 있게 했다.

이곳에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이 있었고, 1621년부터 맥주를 만들어 수도원 입구에서 팔았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도사들이 금식할 때 마셨다는 사순절 복비어(Bock-beer)와 크리스마스 복비어를 팔고 있었다.

수도사들이 금식할 때 마셨던 도수가 높고 영양이 풍부한 맥주다. 맥주를 음료로 분류했기 때문에 금식 기간에도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연중 판매하는 술은 독일 옥토버페스트 축제장의 맥주와 동일한 메르첸(Märzen)이었다.

1ℓ 도자기잔에 메르첸을 또 한 잔 가득 채우고 돌아오는 길에 소란한 방이 있어 들어가보았더니, 벽면 스크린에서 유럽 챔피언스리그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맥주잔을 손에 쥐고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사내들로 홀 안은 땀 냄새가 가득했다.

수도원 지하의 맥주펍, 세상 빛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바깥으로 소리가 새나가지 않고,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는, 한때는 기도와 기원으로 가득찼을 지하 공간에서 술을 마신다.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것 같은 공간에서 술을 마신다.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에, 맥주는 생명의 물이었다. 세균과 바이러스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에 물이 오염되어 병이 전염되는 줄을 몰랐던 시절에, 물을 끓여서 만들었던 맥주는 전염병을 피할 수 있는 생명수였다. 그래서 '때로는 술집 탁자 밑에서 운명의 거센 몽둥이질을 가장 쉽게 피할 수 있다네'라는 술꾼의 말도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내가 다시 잘츠부르크를 간다면, 아우구스티노 브로이 때문일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브로이가 궁금하여 홈페이지를 들어가봤더니, 코로나19 상황을 실제 상황(the actual situation)이라고 묘사하며 양조장과 맥주펍을 대문자로 "CLOSED!" 문 닫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노 브로이도 운명의 거센 몽둥이질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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