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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격투스포츠 중 하나인 복싱은 한때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최근에는 어지간한 세계 챔피언이 언급되어도 모르는 사람 투성이지만 과거에는 정말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7080 전후를 오가는 세대라면 한번쯤 복싱에 열광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의 주인공 홍수환은 당시 '박치기 왕' 김일(프로레슬러) 이상 가는 인기스타였고 '짱구' 장정구는 파마머리 스포츠 스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 외 '작은 탱크' 유명우, '링위의 호랑이' 박종팔, '돌주먹' 문성길 등 쟁쟁한 선수들이 팬들을 울리고 웃겼다.

어려웠던 시절 세계 챔피언이 된다는 것은 곧 엄청난 성공을 의미했다. 비운의 복서 김득구가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이유다. 세계 챔피언이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격투기하면 복싱, 복싱하면 격투기로 통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만화대본소, 잡지 연재물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많은 복싱 만화가 쏟아져 나왔다. 구기 종목하면 야구였고 격투 만화하면 복싱이었을 정도로 스포츠물의 한축을 담당했다. 복싱 만화 전성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복싱 만화들

복싱 만화의 대부를 꼽으라면 역시 김철호 화백이 첫손에 언급된다. 유명 복싱잡지에서 만평, 앨범 코너 등을 담당했을 정도로 복싱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대단했던 그는 대본소, 잡지 연재물에 걸쳐 양과 질적으로 가장 많은 복싱 만화를 그려낸 만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스케치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그림체를 바탕으로 실제 인물 혹은 이를 연상시키는 캐릭터와 가상 인물을 적절히 섞어가며 리얼리티한 극화를 선보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편시리즈물 '스콜피오', '슈퍼스타'를 필두로 '나는 복서', '멕시코의 KO왕', '체급없는 복서', '성난 유리턱', 'IQ 300', '챔피언은 내 거야' 등 다양한 복싱 만화를 쏟아냈다. 실존 인물을 살짝 변형해 캐릭터로 만드는 데 능했던지라 당시 그의 작품을 보면 잘나가던 해외 유명 복서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작가가 즐겨 쓰던 주인공 성일은 무시무시한 강펀치를 가진 KO머신으로 자주 표현됐다.

복싱이 격투 스포츠 만화의 대세였던 시절을 반영하듯 만화계 거물로 불리던 작가들 역시 자신들만의 대표 복싱 만화를 가지고 있다. 허영만의 '무당거미' 시리즈, '변칙복서', '사마귀', '카멜레온의 시', 이현세의 '지옥의 링', '까치의 유리턱', 박봉성의 '신의 아들', '괴소년 최강타', 이상무의 '파도여 파도여' 등이 대표적이다.

장태관의 '아웃복서' 같은 경우 복싱 황금기가 꺾인 시점서 인기를 끌었다는 부분에서 주목을 받았다. 자신만의 그림체에 역동적인 움직임 묘사 등이 호평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여러 부분에서 표절 논란에 휩싸이며 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내일의 죠'의 마지막.
 "내일의 죠"의 마지막.
ⓒ 주간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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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 해도 복싱팬들에게 가장 유명한 복싱 만화는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죠(국내명 도전자 허리케인)'와 모리카와 조지의 '더 파이팅(The Fighting)'일 것이다. '내일의 죠'는 1970년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희대의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또 '더 파이팅'은 많은 인기를 등에 업고 현재 진행형으로 연재되고 있는 작품이다.

'내일의 죠'의 주인공 야부키 죠는 보는 이들의 심장마저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복싱에 대한 열정이 엄청나다. 단순한 성공, 명예 같은 게 아닌 진짜로 복싱이 좋아서 모든 것을 불태우는 캐릭터다.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은 주인공에게 묻는다.

"슬프지 않아? 같은 또래 아이들이 거리로 산으로 바다로 젊음을 발산하고 있는데 날이면 날마다 땀과 바셀린, 송진 냄새가 떠도는 어두운 체육관에 틀어박혀서 줄넘기하고 샌드백치고, 간만에 밝은 곳으로 나간다 싶으면 그곳은 링이라는 우리 안… 투견처럼 피투성이로 치고받기만 하는 생활,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마시고 싶은 것도 못 마시고, 청춘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어둡지 않아?"

주인공이 대답한다.

"빚이나 의리 때문이 아닌 복싱이라는 녀석이 좋아서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청춘을 발산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를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불타오르는 충실감을 몇 번이고 맛봐왔다. 겉만 화려한 불완전 연소와는 질이 틀려. 진짜 한순간이라도 눈부실 만큼 새빨갛게 타오르는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새하얀 재만 남지."

고아로 자라 소년원, 빈민가 등을 전전하며 세상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죠에게 복싱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철학이고 신념이었다. 복싱이 있었기에 무너질 듯 위태로운 삶속에서도 입가에 웃음을 그릴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링 위의 자기 쪽 코너 의자에 앉아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둔다. 마지막 대사인 "남김없이 새하얗게 불태워 버렸어"는 만화 역사상 최고의 대사 중 하나로 꼽힌다.

'내일은 죠'의 주인공 죠가 투지 가득한 반항아 이미지라면 '더 파이팅'의 일보는 밝고 순수한 성격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홀어머니와 낚시 가게를 꾸려나가던 왕따 소년이 강해지기 위해서 복싱을 시작하고 점차 프로 복서로서 신체적, 정신적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색깔은 다르지만 복싱에 대한 열정이 엄청나다는 점에서는 죠와 궤를 함께 한다.

현재 판으로 진행되는 작품답게 복싱 레전드들의 다양한 기술도 소개되고 있다. 1920년대 전설적 복서로 이름을 떨친 '미시간의 암살자' 잭 뎀프시의 '뎀프시 롤(Dempsey Roll)', 1980년대 초중반 전 세계를 강타했던 '페뷸러스 4(Fabulous 4)' 중 한명이자 '디트로이트 코브라'로 불렸던 토마스 헌즈의 '플리커 잽(flicker jab)' 등이 대표적이다.

그 외, '파이팅! 모나코와 소라', '홀리랜드', '타로', '권투 암흑전 세스타스', '링위의 히어로', '리쿠도' 등 복싱팬들을 위한 다양한 취향 저격만화는 과거에서 현재로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정지훈 작가의 '더 복서'
 정지훈 작가의 "더 복서"
ⓒ 울트라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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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위의 괴물, 재능에 관한 현재형 서사시 <더 복서>

최근 모 포탈사이트 웹툰 코너에 눈길을 끄는 복싱 웹툰이 등장했다. 지난해 12월 4일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복싱이라는 철 지난 비인기(?) 장르를 소재로 함에도 불구하고 연재 초반부터 독자들을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몇 회 지나지 않아 해당 요일 상위권을 굳건히 지키는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다름 아닌 '더 복서(정지훈 작)'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전에도 복싱 웹툰(복싱 만화)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물지만 '그린보이(글 정재한/그림 임진국)'같은 수작도 발표되어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복싱이 주가 되는 작품은 질을 떠나 당장 양적으로도 많이 부족했다. 요즘 대세인 종합격투기의 한부분 정도로 묘사되는 게 고작이다.

앞서 언급한 복싱만화의 대부 김철호 화백조차 최근에는 농구, 당구, 볼링, 종합격투기, 액션 활극 등 다양한 장르를 그려내는 쪽으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런 점에서 '더 복서'의 등장은 복싱팬들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몰입감이 좋아 '복싱팬은 물론 복싱에 크게 관심 없던 이들까지 복싱의 세계로 빠지게 만드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충격적인 재능!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라는 소개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더 복서'는 재능에 관한 이야기다.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역량을 보여주는 존재를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다른 이들만큼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도 더 좋은 성과를 보여주는 이른바 타고난 재능, 보통의 능력치를 가진 이들에게 부러움, 동경, 시샘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같은 재능은 복싱 같은 스포츠에서 더욱 빛난다. 토할 정도로 열심히 훈련했는데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상대, 힘겹게 그 상대를 넘어섰지만 눈앞에는 더 큰 벽이 버티고 있다. 초반 학교 신에서는 인재와 백산이 대립하며 그러한 부분을 설명한다. 힘없는 친구들을 괴롭히고 갈취하는 일진 백산은 싸움에 대한 감각을 타고났다. 단순히 일진 패거리들뿐 아니라 복싱도장 관계자들까지도 천재로 인정할 정도다.

그런 백산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인재는 더 이상 수모를 당하기 싫어 열심히 복싱을 수련한다. 잘나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 역시 한때 근성 있는 복서로 평가받던 인물이었다. 인재는 복싱을 활용해 일진 무리들에게 잘 대응하나 싶었지만 백산의 타고난 재능 앞에 절망을 맛보고 만다. 그렇게 힘들게 노력하고 연습했는데 타고난 백산 앞에서 인재의 그간 노력은 놀림감일 뿐이었다.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백산의 비웃음이 주변을 휩쓰는 순간 주인공 유가 나선다. 세상 일에 초연한 듯 무표정하게 다니는 유 또한 굉장한 재능을 지녔다. 세계챔피언을 다섯 명이나 길러낸 전설적인 트레이너 K가 반할 정도였다. 유는 백산에게 묻는다. '사람을 때리는 게 재미있나?' 그리고는 가소로운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진들을 유유히 처리하고 백산마저 무참히 무너뜨린다.

인재를 보는 백산이 그랬듯, 유 입장에서 백산의 천재성 따위는 평범하게 보일 뿐이었다. K는 백산을 가리켜 "세계를 제패할 재능이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유에게는 "오싹한 공포가 느껴진다"는 말과 함께 "납치해서라도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천재, 그러한 천재를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른바 괴물의 재능을 가진 이가 바로 유였다.

유의 재능은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K는 기술적인 부분에 관한 훈련은 거의 생략하다시피 한 채 체력만 길러주는 정도로 유를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는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을 농락하며 충격적인 데뷔전을 가진다. 마치 혼자만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 봉인된 악마의 재능을 꺼내든 유를 쳐다보는 복싱 관계자들 혹은 주변인들의 감정은 다양했다.

은근슬쩍 그와 경쟁 심리를 드러냈으나 압도적 재능 차이에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쪽,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도 열심히 해봐야지"라고 의지를 불태우는 인재같은 긍정적인 인물, 결국 건달로 전락해 유를 질투하며 열등감을 느끼는 백산, 그리고 현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 쟝 삐에르 마뉘엘은 "반해 버렸다"는 말로 본인 입장에서 새파란 애송이로 느껴질 법한 상대에게 동경심을 표한다.

'더 복서'는 주인공 못지않게 주변 인물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주인공 유는 표정, 심리 변화가 매우 적다. 거기에 압도적 재능을 타고났다. 처음부터 정상급 기량을 뽐냈던지라 어떻게 스토리를 이어나갈 것인지 걱정될 정도였다.

정지훈 작가는 주인공 시선 일변도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대다수 작품과 달리 주변 인물들의 비중을 확 끌어올렸다. 과묵하고 엄청나게 강한 주인공과 맞서는 상대의 심리 등을 섬세하게 그려 넣으면서 입체적으로 스토리를 만들어나간다.

'더 복서'는 현재 20화까지(미리보기 제외) 진행된 상태다. 가장 최근 화에서는 주인공의 라이벌이 될지도 모르는 또 다른 괴물 카심 알 하자드가 등장했다. 카심은 세계적 대기업 총수의 친손자로 타고난 금수저임에도 불구하고 복싱(싸움)에 대한 재능이 상상을 초월한다. 겉보기에 우스꽝스러울 만큼 어설픈 폼으로 오랜시간 열심히 노력해온 복서들을 어린아이 데리고 놀 듯 농락시켜 버린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자고 싶은 대로 자면서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복싱을 즐긴다. 재능에 더해 초월적인 연습량까지 소화시킬 수 있는 타고난 신체능력마저 지녔다. 카심의 소속 체육관 관장조차 짐승의 왕같은 포스를 뿜어내는 그를 바라보며 '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다'는 자괴감을 느낀다.

격을 달리하는 절대 재능을 뽐내는 괴물간의 승부에서 최후에 살아남는 인물은 누가될 것인가. 현 챔피언 마뉘엘과 그를 위협하는 절대재능의 소유자 유 그리고 카심 등 새로운 경쟁자들이 만들어갈 향후 스토리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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