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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낭송하는 김남주 시인
▲ 통일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 시 낭송하는 김남주 시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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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뭉쳐야겠다. 하나로
하나로 뭉쳐 열여덟 작은 불
큰불 하나 이루어야겠다.
이루어 큰 불 하나
거세게는 타오르게 하고 해와 달로 높이 떠서
어둠에 묻힌 새벽을 열어야겠다.
- 김남주 시인의 옥중시선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중에서

"우리는 그를 물봉이라 불렀어. 세상 물정 모른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지. 눈빛은 9살짜리 착한 소년, 웃을 땐 짓궂은 개구쟁이, 토론할 때면 갑자기 체 게바라가 되기도 했어.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도사급이었지. '너 왜 그렇게 많이 똑똑해?'라고 심술을 부리면 '감옥에서 할 일이 책 읽은 것밖에 없어서'라며 뒤통수를 긁었어."
  

어리바리 촌놈 같았던 혁명가 시인
  
  
엄마 친구 김남주 시인은 유신헌법이 선포되자마자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했고 저항시를 썼다. 주요 작품으로 '나의 칼 나의 피', '저 창살에 햇살이 1·2', '옥중시선집'이 있다. 감옥살이할 때는 필기도구가 없어서 화장실 휴지에 손톱으로 눌러 쓰거나 우유갑에 시를 새겨 세상으로 내보냈다. 파블로 네루다와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등의 저항시선집을 번역했다.

"김남주가 감옥에 있을 때 나는 작가회의 상임이사였어. 대학에서는 축제 때마다 남주의 시를 읽으며 석방을 촉구했지. 서강대학 때는 나도 참석해서 촛불 순례를 했어. 여러 대학에서 남주를 위한 강연을 하고 석방운동을 했지만 정작 얼굴을 본 것은 그가 석방하던 날이었어. 그의 첫인상은 충격이었어. '나의 칼, 나의 피' 같은 어마무시한 시를 쓴 혁명가 시인의 얼굴이 글쎄, 어리바리한 촌놈 같더라니깐.

어떤 봄날이었을 거야. 그날은 국회에 김영현이랑 김남주랑 함께 갔어. 봄꽃이 눈처럼 날리던 날이었지. 남주가 다가가 만져보고 냄새 맡으면서 '와, 진짜 꽃을 보네' 그러더라고. 감옥에 10년 가까이 있으면서 꽃을 한 번도 못 봤다며... 그때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어."
 
  
맨 오른쪽에 남주 아저씨와 엄마
▲ 민예총 신년 기자회견 맨 오른쪽에 남주 아저씨와 엄마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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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가시밭길 험한 길 누군가 가야 할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김남주 시인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중에서.

나는 남주 아저씨의 시로 만든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어릴 때부터 불렀다. 지금도 가끔 부를 만큼 좋아한다. 지난 민중 총궐기 집회 때 물대포를 맞고 돌아가신 백남기 어르신께서 살아생전 이 노래를 좋아하셨다 하여 노제와 영결식에도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또 기억이 난다. 2002년 월드컵 때 나를 포함한 모든 붉은 악마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김남주 시인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1979년 11월 투옥되었다. 남민전 사건은 인혁당과 민청학련사건과 함께 대표적인 공안사건이다. 남주 아저씨는 이재문, 신향식,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과 연루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88년 12월에 석방되었다. 9년 3개월 만이었다.  

"석방되던 날 안재구, 김남주, 이해경, 박석률 등이 광교 사무실로 모였어. 그 사무실은 잡지 <공동체>를 발간하던 김도연과 후배들이 마련했는데, 그날 남주의 약혼녀 광숙이를 봤지. 옥중연애를 했다 해도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실제 만남은 처음이잖아? 두 사람이 불꽃 튀는 눈빛을 교환하는데 '며칠 내로 아기가 만들어지겠군'  이라는 생각을 했어."

"엄마도 그날부터 친해졌던 거야?"

"둘이서 마음이 뜨거워 죽겠는데 내가 비집고 들 틈이 어디 있어. 가까워졌던 것은 그가 작가회의에 인사를 온 날부터였어."

"이시영 아저씨랑 다 함께 맨날 만났다며?"

"그랬지. 거의 모든 행사를 함께했으니까."

 
얼마나 슬펐을까
▲ 친구 김남주 시인의 장례식 얼마나 슬펐을까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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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3개월 만에 출소, 췌장암 말기 판정
   
안타깝게도 김남주 시인의 바깥 소풍은 오래가지 못했다.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오랜 감옥 생활 끝에 이제야 결혼해서 아이도 생겼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남주는 우리의 상징, 죽으면 안 되는 존재였어. 반드시 살아야 했고 살리고 싶었는데 너무 늦었던 거야."
  
임종이 다가오자 남주 아저씨는 가까운 친구들과는 작별 인사를 직접 하고 싶어 했다. 그때 나도 엄마와 함께 문안을 갔다. 병원 복도에는 아저씨의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 지인들이 가득했는데 모두 깊은 슬픔에 빠져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어떤 분은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어 술을 마시고 오기도 했다.

그날 병실에서 본 아저씨는 너무 말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얼굴은 가지 색이었고 눈은 움푹 꺼졌으며 다리도 앙상했다. 그날이 사랑하는 사람도 인력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내 생애 처음으로 지켜본 날이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아저씨는 세상을 떠나셨다.

'좋은 일 많이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떠난다'가 아저씨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태그:#김남주, #윤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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