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주시경(1876-1914)
 주시경(1876-1914)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주시경이 국문연구소에서 열정을 바치고 있을 즈음 나라 안팎은 더욱 소용돌이쳤다.

큰 흐름은 일제가 병탄으로 몰아가는 길이고, 여기에 크고 작은 저항이 있었지만 망국의 물줄기를 바꾸기는 어려웠다. 1907년 7월 18일 고종이 황태자에게 국사를 대리시킨다는 조칙을 발표하고, 7월 20일 조선조 마지막 임금이 된 순종이 즉위하였다.

자의에 따른 선위가 아니었다.

헤이그 밀사를 파견한 일을 트집잡아 일제가 고종을 밀어내고 순종을 즉위시킨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국왕까지 바꿀 정도가 되었다. 고종은 망국 군주이지만, 일제에 쉽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종은 선왕과도 달라서 그야말로 애국심도 패기도 없는 '흐물흐물한' 군주였다.
  
고종(가운데)과 그의 아들 순종(왼쪽),영친왕 이은(오른쪽).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이었다.
 고종(가운데)과 그의 아들 순종(왼쪽),영친왕 이은(오른쪽).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이었다.
ⓒ 위키백과

관련사진보기

 
순종이 즉위한 지 사흘 만인 7월 24일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었다. 정미7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법률 제정과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 고등 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를 받고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입법권과 인사권이 통감부에 넘어간 것이다.

통감부는 같은 날 신문 발행의 허가제와 신문기사의 사전 검열을 규정하는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7월 27일 항일운동의 탄압을 목적으로 집회 결사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제정하였다. 해방 후 이승만과 박정희가 유용하게 써먹은 국가보안법의 모태가 된 악법이다. 이어서 7월 31일 군대해산 조칙을 발령하여 취약하지만 나름의 국토방위의 역할을 맡았던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에 저항하여 정미의병이 일어나고, 이보다 앞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해가 바뀌어 1907년이 되면서 일제의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9월 6일 통감부는 의병 활동을 막고자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고, 10월 7일 '한국주차헌병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일본 헌병의 경찰권을 강화하고 병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12월 6일 유학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군대해산, 보안법 제정, 신문지법 제정, 의병학살 등 일련의 조처로 일제는 대한제국의 손발을 묶고 귀와 눈을 가렸다.
  
<경성안내>에 소개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전경이다. 오른쪽의 <경성부명세신지도>(1914년)에는 동양척식과 더불어 '귀족회관' 자리가 나란히 표시된 모습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한국외환은행 본점 건물은 이 두 구역을 합친 터전에다 세워 올린 것이다.
▲ <경성안내>에 소개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전경이다. 오른쪽의 <경성부명세신지도>(1914년)에는 동양척식과 더불어 "귀족회관" 자리가 나란히 표시된 모습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한국외환은행 본점 건물은 이 두 구역을 합친 터전에다 세워 올린 것이다. <경성안내>에 소개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전경이다. 오른쪽의 <경성부명세신지도>(1914년)에는 동양척식과 더불어 "귀족회관" 자리가 나란히 표시된 모습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한국외환은행 본점 건물은 이 두 구역을 합친 터전에다 세워 올린 것이다.

관련사진보기

 
일제는 조선의 병탄을 앞두고 치밀하고 치열하게 옭죄었다.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을 반포하여 학교설립과 교과서 발행을 인가제로 바꾸도록 하였다. 개화세력이 국민계몽을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사립학교까지 저들의 손아귀에 장악되었다. 같은 해 12월 28일 식민지 지주회사로 조선 농민의 땅을 빼앗고 일본 농민의 조선이주를 목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다시 해가 바뀐 1909년 2월 23일 통감부는 출판물의 원고 검열과 배일ㆍ항일 출판물의 압수를 합법화하는 출판법을 공포했다. 이 조처로 연말까지 5,767권의 민족운동 관련 책이 압수되어 소각되거나 일본으로 실어갔다. 9월 2일을 기해 일본군이 남한의병 대학살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의 씨를 말렸다.

영국 기자 F. A. 맥켄지는 일본군의 잔학상을, 번잡하고 유복했던 마을 제천이 "온전한 벽도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그릇도 하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고 보도하였다. 일본군은 의병학살에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 하여 "모두 죽이고 모두 탈취하고 모두 불태우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숨통을 조일 때 주시경은 1908년 11월 음성론ㆍ소리갈 등의 국어 문법을 논한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발행하고, 얼마 뒤 『소리길』을 박문서관에서 펴냈다. 이어 남대문 안에 있는 상동 기독교청년회관에 '하기 국어강습소'를 열어 청년 학생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쳤다.

이외에도 여러 곳의 청년학원과 각급 학교, 야학 강습소에 초빙되어 "앉은 자리가 따뜻해 질 겨를이 없는 만큼" 분주한 교육과 생활에 온갖 열정을 다 쏟았다. 강의할 책을 큰 보에 싸서 바삐 이곳저곳으로 강의하러 다니는 선생을 학생들이 '주보따리', '주보퉁이'로 별명지은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주석 1)


주석
1> 『나라사랑』 제4권, 2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한글, #주보따리, #주보퉁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주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