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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양행 창업자 고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창업자 고 유일한 박사
ⓒ 유한양행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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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진자 760만명 낳은 1918년 '악성 돌림감기'

이른바 '스페인 독감'은 20세기 최악의 재앙이었다. 1918년에 발생한 이 감염병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2500만에서 5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역사학자 알프레드 크로스비 및 존 배리, 스페인 역사학자 산티아고 마타 등에 의하면, 이 독감의 발원지는 미국이다. 그런데도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것은 당시 스페인 언론이 외국 언론과 달리 보도의 자유를 많이 누린 사실과 관련이 있다. 독감 발병 사실이 스페인 언론에서 집중 보도되다 보니, 스페인에서 발생한 전염병인 듯한 이미지가 형성됐던 것이다.

독감으로 인해 식민지 조선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1919년 1월 3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악성 윤감(輪感)의 사망자가 실로 14만 명'이라는 기사에서 그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이 신문은 악성 돌림감기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14만이고 "앓은 사람은 칠백 육십만 명"이라고 보도했다. 1918년 10월부터 조선에 번진 독감이 1919년 1월 30일까지 확진자 760만 명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총독부의 보건정책은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시의 핵심적 사회문제 중 하나인 폐결핵과 관련해서도 그랬다. 2013년에 <의사학> 제22권 제3호에 실린 최은경 서울대병원 연구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결핵 정책(1910~1945): 소극적 규제로 시작된 대응과 한계'는 "일제강점기 내내 결핵 예방을 위한 총독부의 조치는 극히 미비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식민지 한국의 의료 현실을 슬픈 마음으로 지켜본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은 의사나 약사는 아니었다. 미시간대학을 졸업한 뒤 식품회사를 경영하던 기업인이었다. 1926년에 유한양행을 창립한 유일한이 바로 그이다.

"국민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유일한이 약품회사인 유한양행을 창립한 것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였지만,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동기가 따로 있었다. 철학자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유일한의 생애와 사상>은 유한양행 창업 전에 유일한의 고민거리 중 하나가 "국민 보건의 문제"였다면서 그의 창업 동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인들의 절대다수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으며, 한국병이라고 볼 수 있는 폐결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의료 혜택이 전혀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다면 국민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어떠어떠한 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노라고 말하는 기업인들이 있다. 그런 말은 어느 정도는 진실되고 어느 정도는 상투적이지만, 유일한의 경우에는 정말로 그랬을 거라고 신뢰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삶에서 그의 인생관과 사업 동기가 명확히 표출되기 때문이다.

유일한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세상이 요동치던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김기복과 유기연 사이의 9자녀 중에서 장남이었다. 아버지 유기연은 기독교인이자 상인이었다.

유일한(柳一韓)의 본명은 일형(一馨)이었다. 일한으로 바꾼 것은 부모님 뜻이 아니었다. 본인이 결정한 일이었다. <유일한의 생애와 사상>은 "나중에 미국에 유학하면서 조국을 위해 생애를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형(馨)을 한국의 한(韓)으로 바꾸었다"고 소개한다.

특이한 것은 그가 자기뿐 아니라 동생들 이름까지 죄다 바꾸었다는 점이다. 그는 동생들의 이름에도 똑같이 한(韓)을 넣음으로써 '한'을 돌림자로 만들어 버렸다. 동생들은 중한·선한·명한·신한·동한·순한·특한 등의 이름을 갖게 됐다. 이 중에서 유한양행 2대 사장인 유명한은 큰형이 미국에 체류하던 태평양전쟁 기간에 회사를 이끌던 중에 총독부에 기부금을 낸 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한인소년병학교 훈련 모습.
 한인소년병학교 훈련 모습.
ⓒ 유일한온라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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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국에서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며 의약품 공급

유일한이 태어난 평양은 기독교가 발달한 곳이었다. 아버지 유기연은 서양 선교사나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서양 학문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이 때문에 유일한을 미국에 보내기로 결심하게 됐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숙부인 박장현이 평안도 선천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던 유일한은 1904년 아홉 살 나이로 이들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게 됐다. 그 뒤 그는 미국 중부인 네브래스카주의 헤이스팅스에 있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거쳐 미시간대학에 진학해 상과 공부를 하게 됐다.

그의 미국 생활은 학업으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와 함께 도착한 미국은, 그에게 독립운동의 무대가 됐다. 일종의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수료한 것을 포함해 그는 독립운동 방면에서도 상당한 이력을 남겼다.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24세) 4월, 그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했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동 대회에서 기초작성의원회 대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였다"고 설명한다. 그의 독립운동은, 훗날 귀국했다가 미국에 다시 간 뒤에도 계속된다.

대학 졸업 뒤 그는 미국에서 현지인과 동업으로 라초이 식품회사를 경영했다. 그러다가 31세 때인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의약품 판매업에 뛰어들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식민지 한국의 보건 상태를 개선하겠다는 열망으로 벌인 일이었다.

한약을 제외한 양약의 생산 및 수입은 거의 다 일본인에 의해 장악되던 시절이다. 식민지 한국 기업이 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이런 속에서 유일한은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결핵·피부병·학질이나 기생충 감염의 치료 등에 필요한 의약품을 수입해 한국 시장에 공급했다.

일본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그는 1933년부터는 의약품을 자체 생산했다. 오늘날까지도 판매되는 소염·진통제인 안티푸라민을 비롯해 구충제·피부병약 등을 제작했다. 1936년에는 실험연구소를 두는 한편, 회사 형태를 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종업원 복리후생에도 주력... 경영 참여 기회까지 보장

동족의 건강을 위한다는 유일한의 사업 목표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농촌과 도시를 직접 찾아다니며 서민들에게 필요한 약들을 조사했다. 또 동족인 소비자들을 위하는 마음뿐 아니라 동족인 사원들을 위하는 마음도 따뜻했다. 2017년에 <전문경영인연구> 제20권 제4호에 실린 이기은 대구대 교수의 논문 '윤리적 관점에서 유일한의 리더십 분석'은 이렇게 말한다.

"종업원에 대한 복리후생은 (유한양행에서) 일찍부터 발달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기술(교육?)·운동장·주거시설·식당 등이 지원되었으며, 1957년에는 사원 장학금 제도를 도입하였고, 1936년(논문에는 1973년으로 표기)에는 종업원지주제도를 도입하였다."

노동자를 머슴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었던 1930년대에 그는 직원들의 복지와 학업에 신경 썼을 아니라, 직원들이 주식을 갖고 경영에 참여할 기회까지 보장했다. 경제민주화의 선각자라 할 만했던 것이다.

그는 규모를 갖춘 기업인이 관심을 갖기 쉬운 정경유착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시의 기업인들이 많이 범한 조선총독부와의 유착도 그에게는 딴세상 일이었다. 정치 활동에서만 독립운동가였던 게 아니라 경영 활동에서도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정치적 탄압을 받아야 했다. 1994년에 <경영사 연구> 제9권에 실린 김신웅 청주대 교수의 논문 '유한양행과 한국 제약사업'은 "조선총독부가 유한 말살을 목적으로 꾸민 세금 탄압 등 갖가지 압박을 받아, 원료 자급책으로 철원에 농장을 개설하여 한약초를 시배(試培, 시험재배)하였고, 일본에서의 원료 확보를 위하여 동경에 주재소를 설치하는 등 불굴의 의지를 나타내 보였다"고 말한다.

정경유착 거부는 총독부가 물러간 뒤에도 계속됐다. 그래서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도 그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위의 이기은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유일한에게 탈세와 정치자금은 없었다. 유일한은 기업과 정치는 결탁하거나 그 힘을 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강조하였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에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친분이 있는 야당의 정치자금 부탁에 대해서도 응하지 않았다. 1961년 군사정권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오히려 다음해인 1962년에는 성실한 납세자로 선정되어 우량납세자 표창장을 받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이승만·박정희 같은 살벌한 정권들과 척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대단하지만, 그 정권들의 핍박을 견뎌내고 유한양행을 반석 위에 세워놓은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천부적이고 전투적인 기업인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이윤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기간에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민족독립의 열망이 항상 끓어올랐다. 결국 1938년에 동생 유명한에게 회사를 맡긴 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1941년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여해 한인국방경위대(일명 맹호군)의 창설을 주도하고, 1943년에는 미국 정부의 제안을 받고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란 비망록을 작성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했다.

1945년 1월에는 미국 동부인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스에서 열린 12개국 회의에 참가해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를 당부했다. 또 한반도 투입 작전을 위해 캘리포니아주에 설치된 한국인 부대에도 입대해 1조 책임자가 됐다. 군복을 입고 당당히 귀국해 민족의 해방을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일한 회장의 재산 사회 환원에 관해 보도한 1971년 3월 12일자 <매일경제>.
 유일한 회장의 재산 사회 환원에 관해 보도한 1971년 3월 12일자 신문.
ⓒ 매일경제신문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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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전 재산 사회 환원 

1918년 독감은 일본인 식민지배자들의 방역 역량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식민지 한국인들의 보건 상태가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잘 보여줬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유일한은 동족들에게 의약품을 공급하는 사업으로 돈을 벌고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총독부 및 일본 기업들과의 투쟁에서 살아남아 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한편, 경제민주화를 몸소 실천하는 선각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동시에, 독립운동과의 끈도 놓지 않았다.

그는 최후까지도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유언장마저 세상을 두고두고 감동시켰다. 1971년 4월 9일자 <경향신문> 기사 '고 유일한 박사 유언장... 전 재산을 사회·교육 사업에'는 이렇게 보도했다.

"고(故) 유 박사는 이 유언장에서 그가 생전에 소유했던 유한양행 주식 14만 9백 41주(시가 2억 2천 5백만원) 전부를 유한중고교 재단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증, 재산 일체를 사회교육사업에 쓰도록 밝히고, 자신의 직계가족인 아들 유일선(재미·在美)에게는 자립할 것을 강조, 한푼의 유산도 상속치 않았다.

다만, 딸 유재라 씨(43)에게만 유한중고교(오류동 소재) 안에 있는 자신의 묘지 일대 5천 평을 주어 유한동산으로 꾸며줄 것을 당부했고, 손녀 일링 양에게는 학자금 1만 달러를 물러주었을 뿐이다. 고인은 이들에게 남긴 유언장에서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가라'고 유언을 남겼다."
 

철학자 김형석은 <유일한의 생애와 사상>에서 "유일한의 일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조국에 대한 사랑과 봉사였다"면서 "그것을 제외하면 그의 생애는 지독한 일중독자라는 빈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일한이 사랑하고 봉사한 '조국'은 국가권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이자 동족이었다. 그는 자신과 집안뿐 아니라 세상과 동족을 살리고자 밤낮 없이 열심히 일한 참 기업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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