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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한 동양인이 'READERS RETREAT'이라는 간판을 달고 서점을 열었다. 왜소한 체구의 백발을 가진 서점 주인은 전직 병원의 시체실 청소부였다. 원 모양의 아케이드 건물의 중간에 자리 잡은 작은 서점 READERS RETREAT은 주인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기념관이자 가족을 위해 헌신한 가장에 대한 기념탑이기도 했다.

동네 주민들은 그 서점과 주인을 무시했다.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를 것 같은 동양인이 서점을 운영한다니 가당찮게 생각했다. 동양인이 영어로 된 책을 이해도 못 할 것이면서 팔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캐나다 현지 주민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한동안 READERS RETREAT의 문턱을 넘은 고객들이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서점 주인은 실망하지도 물러나지 않았다. 당시도 지금도 보기 힘든 마케팅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독특하고 지적인 그만의 마케팅은 본인이 직접 책을 읽고 느낀 소감을 지역 신문에 광고로 싣는 것이었다. 서점 주인이 쓴 서평 광고는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서평이 얼마나 아름답고 수려했는지 현지인들은 신문 기자가 대신 써준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서평 광고를 읽은 캐나다 사람들은 급기야 서점에 전화하기 시작했고 READERS RETREAT은 캐나다 고객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서점주인 부부는 단순히 손님이 오면 원하는 책을 파는 상인이 아니었다. 서점 주인이라면 모름지기 팔려고 하는 책들을 읽고 고객들에게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READERS RETREAT을 찾는 고객들은 언제든지 주인에게 책을 추천받을 수 있었고, 읽은 책에 관해서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서점의 안주인은 귀신같이 손님이 원하는 책을 재빨리 찾아주었고 바깥주인은 책과 서점을 찾는 고객을 탐독했다. 서점에 진열된 책만 열람한 것이 아니고 '다른 독자'들도 열람한 것이다. 

서점의 바깥양반은 책과 독자를 열람하는 것을 서점을 운영하는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다. 밴쿠버의 READERS RETREAT은 작은 서점이었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읽고 토론을 나누는 거대한 문화공간이었다. 서점을 지식인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는 문화공간으로 승화시킨 서점 주인에게는 꽤 오래된 선배가 있었다.

<19세기의 여자>를 통해서 페미니즘 운동의 원류를 만든 마거릿 풀러는 자신이 편집 책임을 맡았던 잡지 <다이얼>'로 수익이 전혀 나지 않자 1841년에 '부업'을 시작했다. 그 부업은 '대화' 모임이라는 무형의 상품을 파는 것이었다. '대화' 모임 사업은 풀러와 함께 <다이얼>을 출판한 동료 엘리자베스 피보디가 1839년에 보스턴의 웨스트 스트리트에 개업한 서점을 무대로 삼았다. 

이 서점은 당시 미국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외국 문학과 시집을 모아둔 지식인의 안식처였다. 풀러는 이 서점에 지식인들이 모여서 열 차례의 토론회를 열었고 그 상당한 액수의 입장료를 받았다(20달러로 보스턴 문화회관에서 개최된 강연료의 열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당시 이 토론 모임에 참석한 인사들을 살펴보면 자연, 신, 인간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초월주의 철학을 주창한 랠프 월도 에머슨, 서점 주인이자 유치원이 정규학교 체제로 편입되도록 노력한 피보디, 훗날 유명한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여성권 옹호주의자가 되는 캐럴라인 힐리 등이었다.

풀러의 '대화' 모임은 부업으로 시작되었지만 피보디의 서점은 보스턴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는 문화 공간으로 발전하였다. 풀러가 '대화'모임을 만든 지 140년 후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문을 연 READERS RETREAT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 밴쿠버 지식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비록 대규모 자본을 등에 업고 등장한 서점 때문에 문을 닫긴 했지만, READERS RETREAT이 남긴 사람의 향기는 오래 기억되었다.

READERS RETREAT의 주인은 1969년 고국인 한국을 떠나서 캐나다에 이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민을 한 지 5년이 된 해인 1974년 잠깐 한국에 들렀는데 그의 손에는 분실이 두려워 차마 화물로 발송하지 않고 들고 온 원고 2천 7백 장이 들려 있었다. 그 원고를 토대로 출간된 책에 <죽음의 한 연구>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밴쿠버 지식인들의 문화 공간이었던 READERS RETREAT의 주인은 박상륭 선생이었다.

죽음의 한 연구 - 하

박상륭 (지은이), 문학과지성사(1997)


죽음의 한 연구 - 상

박상륭 (지은이), 문학과지성사(1997)


태그:#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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