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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아직은 겨울에 가까운 풍경이지만 풀과 나무를 살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답니다. 일찍 꽃을 피운 풀꽃들이나, 이른 봄꽃이 피는 나무들의 꽃망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순이나 새싹들의 변화도 볼 수 있고요. 그래서 설레기 일쑤인데, 2020년 올해는 '코로나19'로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하루빨리 종식되어 봄을 만끽할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텃밭에도 눈이 자주 가곤 합니다. 부추나 쪽파 등 겨울을 이겨낸 채소들을 볼 수 있거든요. "봄 부추는 딸네도 주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봄이런가 싶게 돋아 자란 부추나 쪽파, 대파 등. 이런 채소들은 달큰 맛있는데, 겨울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당분을 늘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을에 싹을 틔워 로제트로 겨울을 나는 냉이가 달큰하고 맛있는 것도 같은 이유라지요.

그래서 몇 년째 가을이면 봄에 먹을 요량으로 쪽파와 대파를 조금씩 남겨 뒀다가 봄날에 뽑아 먹곤 했습니다. 시금치도 밭에서 겨울을 날 수 있는 채소입니다. 그러니 '시금치도 가을에 씨 뿌려 봄에 먹어보자' 싶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쉽지 않더군요.

어느 해엔 씨앗을 미처 준비하지 않아서, 또 어느 해엔 유독 바빠 주말에도 잠깐의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뿌리지 못하며 언제 뿌릴까? 헤아려 보는 틈에 어느새 찬 바람 불고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가까이 와 있곤 했습니다. 뭣보다 농부가 아니다 보니 씨앗이나 거름 등을 미리 준비해 두는데 인식이 부족해서였습니다.
 
입춘을 지나며 눈에 띄게 자란 봄 시금치.
 입춘을 지나며 눈에 띄게 자란 봄 시금치.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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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릴 무렵인 11월 초에 싹 틔워 겨우내 자란 시금치.
 서리가 내릴 무렵인 11월 초에 싹 틔워 겨우내 자란 시금치.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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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 볼일을 보고 오던 중 씨앗 가게를 발견했고 사 와서 뿌렸습니다. 다행히 며칠 지나지 않아 싹을 틔웠고 그리 오래지 않아 찾아온 된서리에도 얼어 죽지 않았습니다. 미처 뽑지 못한 배추와 무가 서리를 하얗게 뒤집어쓰며 얼어버렸고 풀들 대부분 주저앉았는데, 어른 새끼손톱만큼 작고 여린 잎으로 된서리에도 짱짱한 시금치가 대견스럽고 신기했습니다.

"일주일만 일찍 뿌렸어도 좋았을 걸. 아직 뿌리도 다 못 내렸을 것 같아. 이렇게 작아서 겨울이나 날 수 있겠어? 시금치는 김장거리 심을 때 뿌려 솎아 먹고 남겨 겨울을 나게 해야 해. 그래야 뿌리가 짱짱해 겨울을 날 수 있지! 추위에 강하다지만 작아도 너무 작아."

사실 씨앗을 뿌리기로 한 주말이 되기까지 3일간 망설여졌습니다. 낼모레가 11월. 과연 싹이 돋아 겨울을 날 수 있을까? 자신 없었거든요. 어차피 뜯어 먹을 거라지만 기껏 싹 돋게 해놓고 자라지도 못하게 얼려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도 좀 있었고요.

그럼에도 뿌렸던 것은 "시금치는 어지간해선 얼어 죽지 않으니 경험 삼아 한번 뿌려봐라"는 평생 농부였던 친정엄마의 조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오래 텃밭을 일궈온 이웃들의 부정적인 말에 노심초사, 봄에 뿌릴 걸 괜히 뿌렸나 후회되었습니다. 친정엄마가 살고 계신 전라도보다 추운 곳인 만큼 어쩌면 이웃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면서.

지난겨울이 이례적으로 따뜻했던 덕분일까요? 아니면 친정엄마 말대로 어지간하면 얼어 죽지 않는 시금치이기 때문일까요? 자라는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땅에 바짝 붙은 듯 겨우내 미세하게 자라던 시금치는 입춘을 지나며 눈에 띄도록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2월 23일, 작지만 먹을 만큼은 되는 시금치를 솎아 무쳐 먹어보는 달큰하며 소소한 행복을 갖기도 했습니다. 3월 2일에도 한 소쿠리 솎아 먹었고요.

시금치를 솎으며 보니 고라니가 뜯어 먹은 흔적이 조금 보이더군요. 이웃들 말대로 작아도 너무 작아 어설프긴 했나 봅니다. 한겨울, 위험을 무릅쓰고 먹을 것을 찾아 동네로 내려왔을 고라니도 아마도 뜯어 먹지 못하고 포기했던 것을 보면요.

겨우내 걸핏하면 시금치가 자라는 밭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처음엔 얼어 죽으면 어쩌나? 무엇이라도 덮어 줘야 하나? 노심초사와 염려로 들여다 봤습니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작디작은 이파리로 겨울을 견디는 시금치가 주는 생명의 경이로움으로 들여다보게 되더군요.

그러다 보니 그동안 겨우내 잊고 살던 텃밭도 살피게 되고, 덕분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도 보게 되었습니다. 1월에도 꽃을 피우고 홀씨주머니를 만들어낸 민들레도 만났고요. 그리고 알았습니다. 시금치처럼 겨울을 나는 식물이 자라는 땅은 그렇지 않은 땅과 달리 크게 얼지 않는다는 것을. 아마도 시금치 뿌리의 생명력 때문이겠지요.
 
시금치 뿌리에는 황산화물질인 안토시아닌을 비롯해 엽산과 철분, 비타민C가 많다고 한다.
 시금치 뿌리에는 황산화물질인 안토시아닌을 비롯해 엽산과 철분, 비타민C가 많다고 한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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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처럼 뿌리째 뽑아 데친 후 마른새우를 갈아 넣고 무쳤다. 달큰하고 감칠맛이 좋다.
 냉이처럼 뿌리째 뽑아 데친 후 마른새우를 갈아 넣고 무쳤다. 달큰하고 감칠맛이 좋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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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자주 들여다보고 많은 생각을 하며 얻은 시금치라서인지 실뿌리 한 가닥도 소중해 뿌리까지 쏙쏙 뽑았습니다. 너무나 작아 어설프기만 했던 시금치들이 겨울을 견디자고 제 몸보다 뿌리를 길게 내린 것이 작은 감동으로 와 닿고 있습니다.

시금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지난겨울이 따뜻했던 덕분이겠거니, 이런 요행 바라지 말고 올 가을에는 씨앗과 거름을 미리 준비해 좀 더 일찍 뿌리는 노력을 해 얻어야 한다는, 매사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하고요.

텃밭을 일군 지 6년쯤, 알게 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던 것들을 실감할 수 있음이 매번 소중하게 여겨지는데요. 농사는 그 어떤 일보다 자연을 알고 존중해야 수확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당연하게, 그리고 손쉽게 사 먹는 농작물들은 농부들의 수많은 노심초사 덕분에 가능하다는 것을 지난겨울 시금치 덕분에 톡톡히 실감했습니다.

베타카로틴이나 비타민A, 엽산 등 몸에 좋은 성분들이 많아 세계 10대 식품에 선정되었다는 시금치. 이런 시금치뿌리가 붉은 계열의 색을 띠는 이유는 몸속 활성 산소를 제거하는 항산화 물질인 안토시아닌 때문이라죠. 시금치 뿌리에는 임산부나 성장기 어린이에게 꼭 필요한 엽산도 많고, 철분과 철분 흡수를 돕는 비타민C도 많다고 해요. 자주 먹으면 결석이 생긴다며 시금치를 꺼리는 사람들도 있던데, 뿌리에 있는 망간과 아연이 결석을 예방해 준다고 하네요.

안토시아닌과 엽산은 치매 예방(기억력향상)과 뇌졸중 예방은 물론 면역력 증강 등 우리 몸에 두루두루 도움 된다고 하지요. 그러니 뿌리째 먹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새우와 함께 먹을 것을 추천합니다. 새우에 풍부한 아스타잔틴 성분이 염증을 완화하고 점막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고로 위장 점막을 튼튼하게 하는 데 도움 된다니까요.

소비자 권리 관련 어떤 책에서 "좋은 제품은 현명한 소비자가 만든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아쉽게도 현재 우리는 뿌리가 거의 제거된 시금치만 사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영양이 많은 시금치 뿌리인데 말이지요. 소비자인 우리가 뿌리가 온전하게 달린 시금치를 원한다면 뿌리째로 생산하는 농부들도 생겨나겠지요. 그래서입니다.

태그:#시금치뿌리 효능, #텃밭(도시농부), #면역력 도움식품, #시금치무침, #코로나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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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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