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 부산대와 동아대, 경남대 도서관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박정희 정권의 지역대학 강화 방침은 지방대학의 입학 정원 증가로 이어졌다. 부산대, 경북대 같은 지방 국립대학은 한 해 900명씩 입학 정원을 늘렸다. 1966년 760명이었던 부산대학교 입학 정원은 1979년 3490명으로 4.6배 늘었다. 

문제는 늘어난 학생수에 비해 교수와 재정이 늘지 않아 교육 여건이 나빠졌다는 점이다. 지역대학 강화는 학생수 증가로만 이어졌을 뿐 투자가 뒤따르지 않아 지역대학 부실화로 이어졌다. 

교육 당국은 '학풍 쇄신'을 이유로 성적과 출석 관리를 엄격히 하고, 학사경고제와 유급제를 강화했다. 졸업논문 필수 제출과 종합시험 실시를 통해 학사를 통제했다. 1971년 들어서는 10월 15일 위수령을 선포하면서 캠퍼스에 군부대를 주둔시키기도 했다. 

박정희 체제를 무너뜨린 '박정희 키즈'
 
청와대를 나서는 박정희 운구 차량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운구 차량이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이다. 청와대를 나선 박정희 운구는 중앙청 영결식장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로 향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가 ‘종신제 총통’ 개헌을 준비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불행히도 김대중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종신제로 전환한 박정희는 청와대를 ‘죽어서 나간’ 첫 대통령이다.
▲ 청와대를 나서는 박정희 운구 차량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운구 차량이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이다. 청와대를 나선 박정희 운구는 중앙청 영결식장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로 향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가 ‘종신제 총통’ 개헌을 준비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불행히도 김대중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종신제로 전환한 박정희는 청와대를 ‘죽어서 나간’ 첫 대통령이다.
ⓒ 정부기록사진집

관련사진보기

 
'사이공 최후의 날'로 알려진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하며 베트남 전쟁이 끝났다. 같은 해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도미노'처럼 공산화되었다. 군대까지 파병하며 베트남 공산화를 막으려 한 박정희는 충격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대륙에 이어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공산화되자, 박정희는 국가를 전시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학과 고등학교의 학생회를 해체하고,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을 설치했다. 4.19 혁명으로 폐지된 '학도호국단'을 1975년 6월 7일 부활시켜 학교의 병영화를 추진한 것이다. 60만 대군과 향토예비군, 민방위대 발족에, 학도호국단까지. 온 나라를 병영화한 걸 보면, 한홍구 교수의 말처럼 박정희는 조국을 '근대화'가 아닌 '군대화'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대학 병영화와 함께 캠퍼스에 중앙정보부 요원과 경찰이 상주시키고, 학생뿐 아니라 교수까지 사찰하고 도청했다. 학생회 같은 학생 자치활동은 전면 금지되었다. 서울대의 경우 1976년 2학기부터 '점심시간'을 없앴다. 점심시간에 일어나는 시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에게는 학생 동태를 파악한 '보고서'를 매월 제출하도록 강요했다. 학생 생활지도 누가기록부에는 학생이 무슨 책을 얼마나 읽는 지까지 적도록 했다. 교수재임용제 도입을 통해 지식인인 교수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유신 정권은 대학뿐 아니라 대중문화도 옥죄기 시작했다. 1975년 김민기와 신중현의 노래를 포함한 223곡의 대중가요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아침이슬'이 담겨 있는 김민기의 데뷔 음반을 포함, 신중현의 '미인', 송창식의 '고래사냥', 이장희의 '그건 너',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같은 가요가 창법 저속, 시의 부적합, 불신풍조 조장, 냉소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미인>의 가사를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꿔 불렀다. 삼선개헌에 이어 유신을 통해 계속 집권 '하고 싶어' 한 박정희 정권을 비웃은 것이다. 1960년대까지 지성계를 이끈 <사상계>는 김지하 <오적> 필화 사건으로 1970년 폐간 당했다. <사상계>의 공백을 1966년 1월 창간된 <창작과비평>과 1970년 8월 창간된 <문학과지성>이 메우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경범죄 처벌법을 강화해서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하고, 고고장 출입을 금지했다. 퇴폐향락 문화를 단속한다는 이유였다. 유신정권은 1976년부터 공연윤리위원회를 만들어 검열을 더욱 강화했다. 1970년 3.7%였던 시나리오 반려 비율은 1975년에는 80%로 크게 늘었다. 

1978년에는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청취자가 노래를 신청하는 리퀘스트와 팝송 송출을 금지했다. 청바지, 생맥주, 통기타를 즐긴 청년 세대와 머리와 치마 길이까지 통제한 유신 정권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역설적으로 박정희 시대 대학 문호 개방으로 늘어난 대학생이 유신체제의 저항세력이 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을 주도한 부산대와 동아대, 경남대 학생들은 입학정원 확대를 통해 대학에 입학한 세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줄곧 박정희 체제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박정희 키즈'였다. 

박정희는 1969년 중학교를 무시험 전형으로 바꿨고, 1974년 고등학교도 무시험 전형으로 전환했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의 진학에 맞춰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시를 뜯어 고쳤다는 속설이 돌기도 했다(관련 기사 : 강남 띄우기 위해 박정희가 옮긴 이것). 학교 진학률도 크게 늘어 부마항쟁이 터진 1979년, 중학교는 93.4%, 고등학교는 81%에 이르렀다.

부마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학생들은 이런 입시제도의 혜택을 받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차례로 진학한 세대다. 이승만의 교육 투자로 길러진 '한글 세대'가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을 무너뜨린 것처럼, '박정희 키즈'가 자라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관련 기사 : 이승만에게 도서관 이름 헌정한 대학 총장).

긴급조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긴급조치 9호는 1975년 5월 13일 발동되어 1979년 12월 8일에 해제되었다. 긴급조치 9호 세대라 불리는 73학번(1954년생)부터 79학번(1960년생)까지는 한국전쟁 직후 태어난 1차 베이비 부머 세대이기도 하다.

대학이 체제에 순응하는 '인력양성소'로 길들여지면서 대학도서관도 그에 맞게 재편되었다. '대학의 심장'인 도서관은 자유로운 학문과 연구, 토론의 장이 아닌 기능인을 양산하는 '대학의 공장'으로 바뀌었다. 학생수만큼 장서수가 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기능인 양성을 위한 '자습 공간' 확대에 주력하다 보니, '칸막이 열람실'이 대학도서관의 핵심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실험대학 운영은 대학도서관 운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979년 실험대학과 비실험대학의 운영을 평가한 자료에 따르면, 39개 실험대학(11.56)보다 41개 비실험대학(12.68)의 도서관 운영 평가 점수가 1점 이상 높게 나왔다.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시대까지 이어진 실험대학 정책이 실패한 것은 대학도서관 지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실험대학'이라는 이름의 '대학실험'은 실패한 대학정책으로 귀결되었다. 새마을운동이 농촌 개조에 실패한 것처럼. 

문제는 실패한 대학정책에 의해 한국 대학의 기본 질서가 놓였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기능인 양성소'로 전환한 대학은 시장권력에 포섭된 채 '스펙쌓기의 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학도서관도 '학문과 교육 공동체의 중심'이 아닌 '취준생의 공부방'에 머물고 있다. 

부마항쟁의 불꽃이 발화한 부산대학교 도서관
 
부산대학교 무지개문 개교 10주년을 맞아 세운 부산대학교 무지개문은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다. 높이는 12.3미터, 폭은 15.8미터다. 무지개문 옆 옛 수위실도 김중업 작품이다. 수위실은 인문관처럼 외관을 곡선으로 처리했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지었다. 무지개문 안쪽으로 독수리상과 건설관이 보인다. 건설관 자리가 바로 옛 중앙도서관이 있던 곳이다. 1970년대 무지개문과 독수리상은 부산대학교 ‘3불’로 꼽혔다.
▲ 부산대학교 무지개문 개교 10주년을 맞아 세운 부산대학교 무지개문은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다. 높이는 12.3미터, 폭은 15.8미터다. 무지개문 옆 옛 수위실도 김중업 작품이다. 수위실은 인문관처럼 외관을 곡선으로 처리했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지었다. 무지개문 안쪽으로 독수리상과 건설관이 보인다. 건설관 자리가 바로 옛 중앙도서관이 있던 곳이다. 1970년대 무지개문과 독수리상은 부산대학교 ‘3불’로 꼽혔다.
ⓒ 백창민

관련사진보기

 
다시 10.26의 도화선 역할을 한 부마민주항쟁으로 되돌아가 보자. 10월 16일 시작된 부마항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인혁당 관련자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75년 '재일동포 학원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부산대에 유학을 와 있던 김오자를 비롯한 재일동포 13명과 대학생 8명이 검거되었다. 유학생을 가장해 국내에 잠입한 북괴의 간첩 일당이라는 혐의였다.

이 사건을 '기획'한 사람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이었던 김기춘이다. '기춘대원군'이라 불리며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 때 구속된 그 김기춘 말이다. 재일동포 학원간첩단 사건 주범으로 몰려 고문과 오랜 수감생활을 거친 김오자는 2019년 8월 재심을 통해 4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일동포 학원간첩단 사건으로 부산대학교 학생운동권은 궤멸 상태에 빠졌다. 부산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집회나 시위가 없었던지, 부마항쟁 초기 진압 경찰이 방패도 챙겨 나오지 않았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였다. 여러 해 동안 캠퍼스가 잠잠하자 이화여대 학생들이 부산대학교에 '가위'를 보냈다는 얘기가 돌았다. 남자 노릇 못하니까 잘라 버리라는 뜻 아니냐는 자조와 탄식이 퍼졌다. 1979년 초 부산대에는 이런 얘기가 떠돌았다. 

"부산대에는 '3불'(不)이 있다. 부산대 상징인 독수리가 날지 않고, 후문 쪽 무지개 형상으로 조성된 자유의 종이 울리지 않으며, 유신 반대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나도 부산대 학생들은 시위를 하지 않는다."

그런 부산대학교에서 1979년 10월을 앞두고 물밑에서 '거사'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10월에 '거사'를 계획한 것은 10월 17일이 유신 체제가 선포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이진걸과 신재식은 도서관과 본관 강의실에서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을 각각 배포했다. 유신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를 위해 '도서관 앞'에서 모이자는 내용이었으나 이날 시위는 실패로 끝났다. 

전날의 실패를 발판 삼아 시위는 다시 준비되었다. 다음날인 10월 16일 경제학과 2학년 정광민은 인문사회관(지금의 제2사범관) 강의실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외쳤다.

"여러분, 우리 이제 투쟁할 때가 왔습니다. 나가서 싸웁시다!"

수십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정광민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정광민은 반년 전인 1979년 4월 19일 "4.19 19주년"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도서관 안을 한 바퀴 돌며, 도서관을 발칵 뒤집은 적이 있었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이며 시작된 시위는 삽시간에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도서관은 부산대 학생들이 수업이 없을 때면 늘 배회하는 장소였다. 더군다나 2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도서관은 많은 학생으로 북적였다. 

도서관에서 열람실을 돌며 시위를 촉구하던 정광민을 사복 경찰이 연행하려 하자 학생들은 격분했다. 난투극 끝에 경찰을 내쫓고 난 후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지금의 인문관 앞 넉넉한터)으로 향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자 시위 학생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신정문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학생들은 경찰이 페퍼포그를 앞세워 진압하자 흩어졌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본관(지금의 인문관) 유리창이 박살나기도 했다. 흩어진 학생들은 도서관 앞으로 다시 모였다.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하던 학생들은 교내를 벗어나 시내로 향하기로 했다.

부산대 초기 시위를 주도했던 정광민에 따르면, 학교 밖 진출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교내 시위조차 성공 가능성이 낮았던 시절에 학교 밖 시위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지도부 없이 비조직적으로 시작된 부산대 교내 시위가 시민항쟁 형태로 폭발할 거라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를 빠져나와 온천장과 교대 앞, 서면을 거친 시위대는 부영극장(지금의 부산극장)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 행렬에 동아대학교, 고려신학대(고신대) 학생들이 가세했다. 도서관에 있다가 부산대 시위 소식을 들은 고신대 학생 500여 명은 광복동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경찰과 대치 및 해산을 반복하면서 '게릴라식' 시위를 이어갔다. 

저녁 무렵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5만 명을 넘어섰다.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바뀐 것이다. 파출소와 경찰서, 언론사, 경남도청, 세무서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남포파출소를 비롯하여 11개 파출소가 파괴되었다.

유신 7주년, 동아대생의 10.17 시위
 
동아대학교 석당기념관 1957년 완공된 석당기념관은 1968년부터 동아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 건물이다. 1975년 증축 공사를 거쳤다. 석당기념관은 부산에 있는 근현대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석조 건물로 꼽힌다. 2012년 ‘부산광역시 근대건조물’로 지정되었다.
▲ 동아대학교 석당기념관 1957년 완공된 석당기념관은 1968년부터 동아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 건물이다. 1975년 증축 공사를 거쳤다. 석당기념관은 부산에 있는 근현대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석조 건물로 꼽힌다. 2012년 ‘부산광역시 근대건조물’로 지정되었다.
ⓒ 백창민

관련사진보기

 
다음날인 10월 17일 부산대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부산대가 막히자 이날 시위는 동아대학교에서 일어났다. '부산대에 밀리면 안 된다'는 동아대생의 결기도 작용했다. 당시 동아대학교 법학과 3학년이었던 이동관의 회고다.

"저는 용기가 없다 보니까 시위를 주도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단지 부산대학교에서 시위를 했으니까 우리가 부산대학교에 지면 안 된다 생각했습니다." 

부마항쟁 직후 부산시경이 작성한 <79 부마사태의 분석>이라는 보고서는 부마항쟁 발발의 직접 원인으로 "국립대학으로서 체면유지 데모를 해야 한다는 (부산대) 전체학생들의 잠재의식"을 언급했다. 경찰이 시위 발생의 주요 원인으로 언급할 정도로 부산대 학생들이 가진 '자괴감'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때론 부끄러움(부산대와 경남대)과 치기 어린 오기(동아대)가 역사의 물결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도서관 앞에서 '연좌'로 시작한 동아대 시위는 오후에 도서관 앞 '집회'로 이어졌다. 당시 동아대학교 도서관으로 쓰인 석당기념관은 1957년 12월 18일 지상 3층, 700여 평 규모로 완공된 건물이다. 

초기에는 도서관이 아닌 총장실, 학장실, 학숙본부, 박물관으로 쓰였다. 1968년부터 동아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쓰였고, 동아대학교 설립자인 정재환의 호를 따서 '석당도서관'이라 불렸다. 석당도서관이 부민캠퍼스로 이전하면서 2009년 9월부터 '석당기념관'으로 바뀌었다. 1층에 '석당함진재'라는 고서(古書) 도서관이 있다.

부마항쟁 이틀째인 1979년 10월 17일 동아대 학생들의 연좌 시위가 시작된 곳이 중앙도서관으로 쓰인 석당기념관 앞이다. 교내에서 집회를 하던 동아대 학생들은 구덕수원지 쪽 계곡으로 흩어져 시내로 이동했다. 유신 선포 7주년인 이날 저녁, 남포동 일대는 전날처럼 시위가 이어졌다.

10월 17일 시위는 전날보다 더 격렬해져 21개 파출소가 공격을 받았다. 이날 시위가 어찌나 격렬했던지 1500명의 여성이 일하는 동양 최대 성매매 집결지 '완월동'이 70년 만에 처음으로 문을 닫을 정도였다. 부산에서는 파출소와 함께 경남도청과 중부세무서, KBS와 MBC, 부산일보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경찰관서와 공공기관뿐 아니라 언론사가 공격받은 것은 거짓 보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탓이다. 언론사는 전날 부산을 휩쓴 시위는 전혀 보도하지 않고, 유신 7주년 소식만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시위 현장에서 '개'와 함께 '기자'가 '출입금지' 당한 것은 이미 1970년대 초부터다. 이 땅의 '기레기'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부산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던 시간,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유신 7주년 기념 만찬이 열렸다. 가수 현인, 백설희, 김정구가 나와 '신라의 달밤' 같은 옛 노래를 불렀다. 학생뿐 아니라 시민이 적극 가세해서 시위가 격렬해지자, 10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발효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수상이 국빈으로 와 있었고, 한미안보연례협의회를 위해 해럴드 브라운(Harold Brown) 미 국방장관이 내한한 상황이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1972년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지 7년 만이었다.

10월 16일 시작된 부산 시위는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부대가 진주할 때까지 3일 동안 계속됐다. 군부대 투입도 허둥지둥 이루어졌다.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휘하부대가 투입된 걸 뒤늦게 알고 부산으로 날아갔다. 해병대 7연대와 함께 부산에 투입된 3공수특전여단은 7개월 후 광주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잔혹한 살상을 벌인 부대다. 3공수여단은 12.12 쿠데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하극상을 저지른 부대이기도 하다. 

10월 18일 5500명 규모였던 계엄군은 19일 공수여단과 경찰 병력을 합해 1만900명으로 크게 늘었다. 부산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중상자가 속출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부산에서 그치지 않고, 마산으로 옮겨 붙어 '마산항쟁'으로 이어졌다.

마산으로 옮겨붙은 항쟁의 열기
 
경남대학교 국제어학관 지금은 국제어학관으로 쓰이지만 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1974년 지은 연면적 3,308m2 건물이다. 10월 18일 마산민주항쟁이 불붙은 곳이다. 오른쪽 큰 소나무 아래가 ‘노인정’이다. 나이 든 복학생이 모여 있는 곳이라 노인정이라 불렸다.
▲ 경남대학교 국제어학관 지금은 국제어학관으로 쓰이지만 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1974년 지은 연면적 3,308m2 건물이다. 10월 18일 마산민주항쟁이 불붙은 곳이다. 오른쪽 큰 소나무 아래가 ‘노인정’이다. 나이 든 복학생이 모여 있는 곳이라 노인정이라 불렸다.
ⓒ 백창민

관련사진보기

 
마산에서의 시위는 10월 18일 아침 경남대학 도서관 앞과 월영지, 학도호국단 사무실 앞에 대자보가 나붙으면서 시작됐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대학 당국은 서둘러 휴교령을 내렸다. 경남대 학생 1천여 명은 집으로 가지 않고 도서관 앞 공터에 모였다. 도서관 앞 공터는 나이 든 복학생이 많이 모여 '노인정'이라 불린 곳이다. 

당시 도서관은 지금의 국제어학관 건물이다. 1974년 지은 이 건물은 1980년 8월 지금의 중앙도서관이 완공되기 전까지 임시로 도서관으로 쓰였다. 경남대학 본관과 월영지 사이 공간이 '10.18 광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1979년 10월 18일 이곳으로부터 마산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국제개발학과 2학년 정인권이 나서 연설을 한 후 경남대학 학생은 교문으로 향했다. 부산대와 경남대 시위를 주도한 것이 모두 경제계열 학생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당시 경제 위기에 대해 누구보다 이들이 예민하게 받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교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학생들은 3.15의거기념탑에서 모이기로 하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우발적이었으나 이심전심으로 이어진 행동이었다.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으나 누구나 참여한 시위였다. 김원 교수가 부마항쟁을 '심성의 연대로 이어진 저항'이라 표현한 건 이 때문이다. 그 시절 남녘 변방의 대학도서관은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연대의 장'이었다.

오후 5시 3.15의거기념탑 주변에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이 불종거리 일대에서 시민, 노동자와 합류하면서 시위는 확산되었다. 파출소, 공화당사, 경찰서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마산은 부산보다 더욱 격렬했다. 마산항쟁은 '시위'를 넘어선 '봉기'였다는 분석도 있다. 

시위대 일부는 대통령 경호실장과 공화당 의원을 지낸 박종규 집으로 몰려가 공격을 하기도 했다. 권총의 달인이자 늘 권총을 소지해 '피스톨 박'이라 불린 그 박종규다. 1961년 5.16 혁명 직후 박정희 경호 책임자가 된 박종규는 1964년부터 10년 3개월 동안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책임을 지고 그는 경호실장에서 물러났다. 

문세광의 '피스톨' 때문에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박종규는 '총으로 흥하고 총으로 망한' 인생 행로를 살았다. 박정희가 김재규 총에 맞아 숨진 후에는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 당하기도 했다. 1970년 박종규는 삼양학원 이사장에 취임해서 마산대학을 인수한 후 경남대학을 설립했다. 

당초 부마항쟁 과정에서 사망자는 없었다고 알려졌으나, 마산 시위 과정에서 유치준 씨가 사망했다. 19일까지 이어진 마산 시위는 20일 정오부터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잦아들었다. 박구일 대령이 이끄는 해병 제7연대는 부산대에, 최세창 준장의 제3공수여단은 동아대에,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여단은 경남대에 각각 진주했다.

위수령은 우리 현대사에서 세 번 발령되었다. 1963년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 1971년 학생 시위, 1979년 부마항쟁 때로 모두 박정희 집권 때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는 탄핵 심판을 앞둔 2017년 3월, 위수령과 비상계엄 선포를 준비했다. 군을 동원해 헌정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발상도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이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충격을 주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9월 11일 국무회의를 통해 위수령을 '폐지'했다.

10월 16일 부산에서 촉발된 시위가 비상계엄을 거쳐 열흘 후 10.26으로 이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부산대학교는 1975년 이후 단 한 건의 유인물도 뿌려지지 않아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으로 불렸다. 동아대는 학문이 아닌 스포츠 명문이라는 뜻으로 '동아야구대학'이라 불렸다. 심지어 경남대학은 유신을 '찬성'하는 데모가 일어났던 곳이다. 

부마항쟁 이전까지 영남 지역 학생운동은 부산이 아닌 대구가 주도했고, 학교로 보면 경북대학교가 중심이었다. 그런 부산대와 동아대, 경남대가 유신 체제를 뒤흔든 '민주항쟁의 진원지'가 된 것이다.

유신을 끝장낸 '유신대학'들
 
마산 3.15의거기념탑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의거’를 기념해서 1962년 7월 10일 세웠다.  1979년 10월 18일 오후 학교를 빠져나온 경남대 학생들은 이곳에 집결했다. 경남대 학생과 합류한 마산 시민들은 ‘마산항쟁’을 이어갔다. 마산에서 일상 영역의 공권력을 상징하는 파출소 공격이 나타난 건 1960년 3.15와 1979년 10.18뿐만이 아니다.  1946년과 1987년에도 파출소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해방과 1987년 민주화 투쟁 국면에서도 마산 시민은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 마산 3.15의거기념탑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의거’를 기념해서 1962년 7월 10일 세웠다. 1979년 10월 18일 오후 학교를 빠져나온 경남대 학생들은 이곳에 집결했다. 경남대 학생과 합류한 마산 시민들은 ‘마산항쟁’을 이어갔다. 마산에서 일상 영역의 공권력을 상징하는 파출소 공격이 나타난 건 1960년 3.15와 1979년 10.18뿐만이 아니다. 1946년과 1987년에도 파출소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해방과 1987년 민주화 투쟁 국면에서도 마산 시민은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 백창민

관련사진보기

 
유신체제에 대해 변변한 시위를 벌이지 않았던 부산대, 동아대, 경남대에서 체제를 뒤흔든 시위가 터져나온 건 왜일까? 예외적이고 돌발적인 사건이 당대의 보편적인 정신과 정서를 잘 드러내는 사건일 수 있다. 에두아르도 그렌디(Edoardo Grendi)는 이런 현상을 '예외적 정상'(exceptional norma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억눌려 있긴 했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정서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게 아닐까. 남녘 땅 도서관 앞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시위는 학생과 시민이 얼마나 박정희 독재 체제에 염증을 갖고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10월 15일 불발된 시위부터 10월 18일까지 매일 '도서관'은 항쟁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부산과 마산 모두 '대학도서관 앞'에서 시위가 촉발된 이유는 뭘까? 서슬 퍼런 독재정권 치하에서 일상적으로 많은 학생이 모여 있는 공간이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의 도서관 유입은 정권이 부추기기도 했다. 1977년 문교부가 <4월 중 학원대책>이라는 제목으로 각 대학에 하달한 지시사항을 보자. 이중에는 '도서관'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학과별로 과제를 부여하여 수업 종료 후 도서관에서 공부토록 유도함"

"학우여"의 '학'자만 외쳐도 경찰과 정보기관원이 주변에서 달려드는 상황에서, 대학도서관은 학생이 공개적으로 모여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부마민주항쟁의 불꽃이 모두 부산대와 동아대, 경남대 도서관 앞에서 발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부산대학교 도서관은 중앙도서관이 새롭게 지어지면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도서관이 있던 곳에는 '건설관'이 지어졌다. 옛 도서관 자리에는 부마항쟁이 시작된 곳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1999년 10월 16일 세운 표지석에는 이 자리에 서린 역사적 의미가 새겨져 있다. 신영복 선생의 글씨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민주주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하다"

부산대학교 캠퍼스는 '효원벌' 또는 '새벽벌'이라 불린다. 효원(曉原)은 '아침이 먼저 동트는 곳'이라는 뜻이다.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 윤인구가 지은 이름이다. 이름 때문일까. 유신의 종말을 고하는 민주주의의 '새벽'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부산대에서 만날 수 있는 김중업의 흔적
 
부산대학교 박물관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은 도서관과 대학원, 강당 용도로 지었다.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다. 도서관으로 쓰이던 시절에는 ‘효원도서관’이라 불렸다. 도서관 전용으로 짓지는 않았지만 김중업이 지은 건축물 중 흔치 않은 도서관이다. 1958년까지 예배당으로 쓰였다는 설도 있다.
▲ 부산대학교 박물관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은 도서관과 대학원, 강당 용도로 지었다.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다. 도서관으로 쓰이던 시절에는 ‘효원도서관’이라 불렸다. 도서관 전용으로 짓지는 않았지만 김중업이 지은 건축물 중 흔치 않은 도서관이다. 1958년까지 예배당으로 쓰였다는 설도 있다.
ⓒ 백창민

관련사진보기

 
부산대학교는 1946년 5월 15일 개교했다. 개교 당시 부산대 도서관은 옛 수산대학(지금의 부경대학교)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인이 남긴 5만 권의 '적산'을 인수한 것이 부산대학교 장서의 출발점이었다. 

부산대학교는 1966년 중앙도서관을 개관하기 전까지 1956년 9월 지은 '효원도서관'을 도서관으로 사용했다. 효원도서관은 대학원과 중강당, 도서관이 함께 있는 건물이었다. 효원도서관 완공을 앞둔 1956년 4월 김규태가 초대 관장에 임명됐다.

효원도서관은 고딕 양식의 ㅁ자형 건물이다. 동쪽 위층은 대학원, 남쪽 위층은 중강당으로 썼다. 나머지 공간은 도서관으로 사용했다. 박물관으로 바뀐 이 건물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했다. 당시 열람실 좌석수는 200여 석이었다. 석재로 만든 이 건물의 돌은 부산대학교와 금정산 곳곳에 있던 암석을 채석.절단해서 썼다고 한다. 

당시 도서관 공간 중 눈에 띄는 부분은 USIS룸이다. 미국 공보원(United State Information Service) 도서관의 순회문고가 비치되는 공간이었다. 미국 공보원은 부산대 도서관에 상당량의 장서를 기증하기도 했다. 초기 한국 대학도서관 성립 과정에서 미국 공보원 도서관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관련 기사 : 밀랍인형 박물관이 품은 '반미'의 함성).

지금은 부산대 박물관으로 쓰이는 효원도서관은 건국대 언어교육원과 함께 김중업이 남긴 드문 '도서관 건축물'이다(관련 기사 : 박정희가 추방한 건축가, 그가 남긴 독특한 건물). 김중업이 남긴 작품 중 흔치 않은 고딕 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효원도서관 정초식 때 설계자 김중업과 총장 윤인구를 비롯한 참석 교수 명함을 모두 모아 건물 외벽에 넣은 후 시멘트로 봉했다고 한다. 

부산대학교에서 김중업 작품으로 유명한 건물은 '인문관'이다. 부산대학교 '본관'으로 지은 인문관은 서강대학교 본관과 함께 김중업이 설계한 대학 건물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인문관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부산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노후화 때문에 한때 철거가 검토되었으나 보존하기로 결정한 후 2005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마쳤다. 

효원도서관과 인문관 외에 부산대학교에 남아 있는 김중업의 작품은 구정문에 있는 '무지개문'이다. 무지개문은 개교 10주년을 기념하여 1957년 4월 20일 완공했다. 무지개문 옆 수위실도 김중업 작품이다. 

부산대 김재호 교수에 의하면, '목사'였던 초대 총장 윤인구는 드러나지 않는 '상징'을 부산대학교 교정에 남겼다. 인문관 중앙 출입구 캐노피 위에는 16미터 크기의 '십자가' 형상이 남아 있다. 무지개문에 달린 종 안에도 십자가가 내걸려 있다. 윤인구는 초기 부산대 캠퍼스 배치도를 예배당 '종' 모양으로 그리기도 했다. 

초대 총장 윤인구의 구상에 따라 부산대에는 3개의 종이 조성되었다. 그 자체로 거대한 종 모양인 캠퍼스에, 종의 형상으로 지은 무지개문, 그리고 무지개문에 매달린 작은 종까지. '울리지 않는 종'이었던 부산대학교는 1979년 긴 잠에서 깨어나 반도를 흔드는 자유의 종소리를 울렸다. 

부산대학교 도서관 이야기
 
부산대학교 옛 중앙도서관 1966년 개관한 부산대학교 중앙도서관 모습으로 1975년 촬영한 사진이다. 부산대학교가 독립건물로 처음 지은 도서관이다. 1979년 10월 16일 바로 이곳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부마항쟁 당시 도서관장은 국어국문학과 최동원 교수다. 부산대학교가 지은 4개의 도서관 건물 중 유일하게 철거되어 사라졌다. 사진 속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는 건설관을 새로 지었다.
▲ 부산대학교 옛 중앙도서관 1966년 개관한 부산대학교 중앙도서관 모습으로 1975년 촬영한 사진이다. 부산대학교가 독립건물로 처음 지은 도서관이다. 1979년 10월 16일 바로 이곳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부마항쟁 당시 도서관장은 국어국문학과 최동원 교수다. 부산대학교가 지은 4개의 도서관 건물 중 유일하게 철거되어 사라졌다. 사진 속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는 건설관을 새로 지었다.
ⓒ 부산대학교

관련사진보기

 
부마민주항쟁이 촉발된 '중앙도서관'은 1966년 5월 15일 부산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일을 맞아 개관한 도서관이다. 1963년 10월 13일 공사를 시작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3년 넘게 걸려 완공했다. 반지하층을 포함해 3층으로 지은 중앙도서관은 철근콘크리트조 건물이었다. 건물 면적은 1,222평, 20만 권 장서를 소장할 수 있는 서고를 갖췄다. 1층 320석, 2층 250석의 열람실을 뒀고, 공사비용은 4500만 원이 들었다.

1969년 시점에 부산대학교 도서관이 보유한 장서는 8만7807권이었다. 당시 대학설치 기준령에 명시된 학생 1인당 장서량과 학과당 보유기준을 모두 충족하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 2년 동안의 조사를 통해 작성된 <전국 고등교육기관 실태조사 연구보고서 - 행정·재정·시책>에 따르면, 국공립대학의 장서가 사립대학보다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부산대학교 도서관 장서는 1975년 11월 15만 권(15만1744권)을 넘겼고, 부마항쟁이 터진 1979년에야 20만 권(21만4206권)을 넘어섰다. 같은 해 서울대학교 도서관 장서는 1백6만6천512권이었다. 같은 국립대였지만 부산대학교 장서는 서울대 장서의 1/5 수준이었다. 1979년 부산대 입학 정원은 서울대보다 100명 더 많았다. 학생수는 더 많고 장서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부마민주항쟁 1년 후인 1980년 9월 15일 부산대학교는 새로운 도서관을 개관했다. 지금의 '새벽벌도서관'이다. 건물면적 3,200평에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이었다. 15억 1천4백만 원의 공사비용이 들었고, 열람석 수는 2,600석을 갖췄다. 좌석수 기준으로 기존 도서관보다 5배 가까이 규모가 컸다. 부마항쟁의 무대였던 기존 중앙도서관은 '구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꿨다. 

'구도서관'은 1984년 9월 1일 '과학분관'으로 재개관하면서 '과학도서관'이라 불렸다. '과학분관'은 1999년 1월부터 '자율도서관'이라는 이름의 보존서고로 쓰였다. 구도서관(과학분관)은 2008년 10월 23일 건설관을 짓기 위해 '철거'되면서 사라졌다. 지은 지 42년,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29년 만이었다. 

한편 부산대학교는 1994년 9월 9일 새로운 도서관을 개관하면서 기존 도서관은 '제2도서관'이라는 이름의 학습도서관으로 전환했다. 새롭게 지은 도서관은 '제1도서관'이라는 이름의 연구도서관으로 사용했다. 

2017년 6월 부산대학교 제1도서관은 '중앙도서관'으로, 제2도서관은 '새벽벌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부산대학교 도서관 장서는 1989년 50만 권(538,412권), 2001년 1백만 권(1,042,432권), 2012년 2백만 권(2,075,094권)을 넘겼다. 

대학도서관 개혁 운동의 진원지
 
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지금은 새벽벌도서관으로 불리는 이곳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부산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쓰였다. 6월 항쟁 후 일어난 부산대학교 ‘도서관 개혁 운동’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새벽벌도서관 앞에 ‘10.16부마항쟁기념탑’이 있다. 10.16부마항쟁기념탑은 부마항쟁 9주년인 1988년 10월 16일 세웠다.
▲ 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지금은 새벽벌도서관으로 불리는 이곳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부산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쓰였다. 6월 항쟁 후 일어난 부산대학교 ‘도서관 개혁 운동’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새벽벌도서관 앞에 ‘10.16부마항쟁기념탑’이 있다. 10.16부마항쟁기념탑은 부마항쟁 9주년인 1988년 10월 16일 세웠다.
ⓒ 백창민

관련사진보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산대학교는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대학도서관 개혁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학생들은 부산대학교 도서관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건물, 시설, 자료, 직원, 서비스로 나눠 비판했다. 이 과정을 통해 부산대학교 도서관 개혁의 전기를 마련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도서관 개혁 운동을 주도한 이가 학생을 중심으로 한 '도서관 이용자'였다는 점이다. 책, 시설과 함께 도서관의 3요소로 꼽히는 '사서'는 도서관 개혁 운동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쓴 대자보 중에는 도서관 사서의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 꽤 있다. 학생들이 쓴 대자보 제목이다. 

"사서의 '자질' 문제 있다" "대학당국이 저지른 업보는 당연히 대학당국이 져야 한다 - 도서관의 무능력 사서 처리에 대하여" "대학도서관 사서란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 "자료의 개념도 모르는 현장사서들은 자각하라!"

대학도서관 개혁 운동 당시 개혁의 대상이었던 사서는 이제 도서관 개혁의 '주체'일까, 여전히 개혁의 '대상'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존재'일까.

'대학의 맹장' 정도로 취급받던 도서관을 '대학의 심장'으로 다시 뛰게 하기 위한 운동이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갔다. 전남대, 경북대, 전북대에서도 도서관 개혁 운동이 이어졌다. 다시 박동하기 시작한 대학도서관이 '대학의 심장'으로 온전하게 자리매김한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이다.

부마항쟁의 불꽃이 일었던 그 시절의 부산대학교 도서관이 남아 있지 않은 건 아쉽다. 부산대학교가 지은 도서관 건물 4개 중 이 건물만 유일하게 철거되었다. 도서관 건물 철거가 아쉽긴 하지만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옛 도서관 자리에 지어진 건설관과 인문관, 넉넉한터, 무지개문을 둘러보면, 부산과 마산에 울려 퍼진 학생과 시민의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2005년 부산대학교는 옛 도서관 자리(건설관) 옆 대학극장을 복합 문화공간으로 단장해 '10.16기념관'으로 명명했다. 10월 16일은 부산대학교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날이다.

부마민주항쟁은 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을까
 
마산 앞바다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3.15 의거 과정에서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은 바로 이곳에서 시신으로 떠올랐다. 1960년 4월 10일 발견 당시 김주열 열사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이었다. 4월 11일 폭발한 마산 시민의 분노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지 보름만에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혁명이 시작된 곳”이라는 글이 이곳에 새겨져 있다.
▲ 마산 앞바다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3.15 의거 과정에서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은 바로 이곳에서 시신으로 떠올랐다. 1960년 4월 10일 발견 당시 김주열 열사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이었다. 4월 11일 폭발한 마산 시민의 분노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지 보름만에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혁명이 시작된 곳”이라는 글이 이곳에 새겨져 있다.
ⓒ 백창민

관련사진보기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학생과 시민이 함께 싸운 민중항쟁이었다. '박정희 시대 최후의 도시 봉기'인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진 큰 계기였다. 존 리드(John Reed)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세계를 뒤흔든 10일>(10 Days that shook the world)로 쓴 것처럼, 조갑제는 10월 16일부터 10월 26일까지를 '한국을 뒤흔든 11일간'으로 묘사한 바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을 뒤흔든 '부산'과 '마산', 두 도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마산은 부마항쟁뿐 아니라 4.19의 시발점 역할을 한 '3.15 의거'를 일으킨 도시다. 신동호 기자는 유신 시대에 "3산의 시대가 가고 3주의 시대가 온다"라는 말이 떠돈 적 있다고 언급했다. 

"3산이란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인 선산과 박종규 경호실장의 고향인 마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고향인 울산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들 3산 출신이 주도하는 유신체제의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 3주(광주-전주-진주)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진주에서 좌파 거물이 많이 나온 것이 '지리산의 망령' 때문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의 고향 내력이 간단치 않던 시절이었다."

이와 다른 의미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의 저항이 분출했던 '3산'(三山)과 '3주'(三州)가 있다. '3산'은 원산-마산-부산이며, '3주'는 공주-제주-광주다. 원산은 일제 강점기 '원산 총파업'이 폭발했던 도시이고, 마산은 3.15 의거와 부마항쟁이 일어난 곳이다. 부산 역시 부마항쟁의 무대였다.

공주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궤멸 당한 땅이고, 제주는 4.3항쟁 과정에서 수만 명의 도민이 목숨을 빼앗긴 곳이다. 광주는 5.18 민중항쟁 때 시민군이 처참하게 진압 당한 도시다. 

'3산'은 저항의 역사가 솟구친 도시이고, '3주'는 민중이 처절한 패배를 경험한 곳이다. 3산과 3주 중에 마산은 3.15 의거와 10.18 마산항쟁의 물결이 두 번이나 분출한 곳이다. 3산 중에 으뜸으로 꼽힐 도시다. 

1980년대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지낸 권숙정은 1979년 당시 청와대에서 비서실장 김계원의 보좌관을 지냈다. 권숙정은 박정희 사후 청와대 금고에 있던 9억 5천만 원의 현금과 수표를 박근혜를 비롯한 유족에게 전달한 사람이다. 권숙정은 청와대에서 '마산'으로 시위가 번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산이란 지명이 마음에 걸렸다'는 회고를 남겼다. 4월 혁명의 시발점이 바로 '마산'이기 때문이다. 

5.16쿠데타로 4.19혁명을 끝장낸 박정희는 부마항쟁으로 종말을 맞았다. 이렇게 보면 박정희 시대의 처음과 끝에 놓인 도시가 바로 '마산'이며,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모두 끝장낸 도시 또한 '마산'이다. "중앙대가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말이 있지만, 마산이 끓어오르면 세상이 뒤집혔다. 

그만큼 마산은 우리 현대사에서 특별한 도시다. 2019년  10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이 아닌 마산 경남대학교 교정에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식'을 가진 것은 마산에서 일어난 두 번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각별한 경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한국을 뒤흔든' 마산과 부산의 항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민주항쟁'이 아닌 '부마사태'로 불리며 오랫동안 잊혔다. 4월 혁명이 4.19, 광주민중항쟁이 5.18, 6월 항쟁이 6.10처럼 그 날짜가 기억되는 것과 달리, 부마민주항쟁은 10.16과 10.18이라는 날짜조차 기억되지 않는다. 

부산대학교 학생조차 5.18은 알아도 10.16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10월 16일은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40년 만인 2019년에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은 왜 잊혔을까? 박정희가 죽으면서 유신 체제는 끝났지만 신군부에 의해 군사독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광주학살은 어쩌면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졌을지 모를 학살이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이라는 변수 때문에 시간을 미루고 공간을 바꿔 일어난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하나의 국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부마항쟁은 광주항쟁을 낳았고, 광주는 6월항쟁을 낳았다."

한홍구 교수는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5.18 광주도 6월항쟁도 없었을 거라며 부마민주항쟁을 '한국 민주주의의 디딤돌'로 평가했다.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을 새 헌법에 명기하자는 의견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유신체제 몰락 후 '서울의 봄'이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한국의 봄'으로 이어졌다면, 부마항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의미로 조명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봄'을 열지 못했다고 해서 부마민주항쟁의 의미가 퇴색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정녕 피를 먹고 자랄 수밖에 없는가?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치고서야 우리는 기나긴 독재 시대를 벗어났다. 박정희를 향한 방아쇠를 당긴 건, 어쩌면 부마민주항쟁으로 폭발한, 들끓는 '민심'이었는지 모른다. 남녘 땅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분노의 '함성'은 박정희를 향한 '총성'으로 이어졌다. 

부산대학교 도서관 옛터

- 주소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로로 63번길 2(장전동) 부산대학교 건설관
- 홈페이지 : http://www.pusan.ac.kr/
- 전화 : 051-512-0311
- 운영기관 :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옛 도서관

- 주소 : 부산광역시 서구 망양로111번길 65(동대신동) 석당기념관
- 홈페이지 : http://dalis.donga.ac.kr/
- 전화 : 051-240-2940
- 운영기관 : 동아대학교 

경남대학교 옛 도서관

- 주소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경남대학교 국제어학관
- 홈페이지 : https://www.kyungnam.ac.kr/ilc/main/
- 전화 : 055-249-6356
- 운영기관 : 경남대학교

덧붙이는 글 | '부산대와 동아대, 경남대 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