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 10:05최종 업데이트 20.03.0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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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7일 오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인근에 설치된 고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원회 천막 농성장 철거를 두고 종로구청과 시민대책위가 대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부'가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약속 때문이다. 메르스, 세월호처럼 국가적 재난상황에서 국민을 구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비전, '나라다운 나라'. 그리고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정유라의 비리, 재벌과의 정경유착 등 정의롭지 못한 공동체를 바꾸겠다는 '적폐청산'. 이 두 가지 약속은 촛불의 요구이기도 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라는 대통령의 말은 문재인 정부의 약속이자 정부를 지탱하는 정당성의 근거다.

집권 4년차, 코로나19사태는 대통령의 약속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정보는 투명하게 공개되고, 매뉴얼화된 의료시스템과 방역시스템이 신속하게 돌아가고 있다. 공공병원의 부족함은 아쉬움이 남지만, 지자체의 선제적 대응과 선진적인 행정, 의료시스템은 국민들에게 나라의 효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특히 코로나19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공무원노동자, 의료종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영웅적인 스토리에 찬사만을 보내기는 힘들다.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병에 감염되기도 하고, 과로로 사망하기도 한다.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국가시스템이 있더라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2월 24일,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승마노동자 고 문중원 열사의 작은 농성장이 철거됐다. 용역 500명과 경찰병력을 동원한 종로구의 강제집행이었다. 다수가 모이는 집회를 자제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코로나19를 관리하는 촘촘한 국가권력은 권력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코로나19 때문에 화제가 되지도 못했지만, 일부 언론과 방송에서 이 농성장은 사라져야 할 바이러스 취급을 받았다.

마사회 적폐청산은 문재인 정부의 존립 근거
 

2014년 9월 인천 아시안게임에 마장마술 경기에 출전한 정유라 모습. ⓒ 연합뉴스

 
마사회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게 개인훈련을 위해 마방과 훈련장을 사용할 수 있는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고 문중원 열사가 평생을 바쳐 갖고 싶었던 그 '마방'이다. 또 마사회는 정유라를 위해 마사회 소속 승마 감독을 파견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마사회는 도쿄올림픽 메달 획득을 위한 1560억짜리 중장기 발전계획을 작성하고, 24억을 들여 정유라가 있던 국가대표 승마단을 지원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물론 계획에 그쳤지만,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마사회 조직의 본질을 보여준다. 역대 마사회장들은 뇌물수수, 비리, 국정농단에 연루되기도 했다. 비리와 범죄가 잦다는 것은 돈과 권력이 꼬인다는 것을 뜻한다.

정유라가 얽힌 마사회는, 문재인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적폐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하에서만 4명의 마필관리사와 기수가 사망했다. 일부 여권 지지자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개혁은 쉽지 않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2017년까지는 황교안 직무대행이 임명한 이양호가 마사회장이었다. 이양호는 마필관리사 2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다시 불거진 마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임기를 채우지도 않고 마사회를 나와 구미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18년 1월 드디어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 김낙순 마사회장이 경마장으로 내려온다. 철학을 전공하고, 문화예술학박사학위를 가진 그가 경마와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그는 말보다는 대통령과 친했다. 노무현, 문재인 대선캠프에서 일하며 '조직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등 출중한 인맥을 자랑했다고 전해진다.

김낙순 회장은 취임하면서 공공성과 공익성을 갖춘 마사회를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YTN 보도에 따르면, 마사회 의정부지사는 소수가 참여할 수 있는 VVIP룸을 몰래 운영하며 수천만 원의 베팅을 할 수 있게 지원한 것이 드러났다. 마사회 직원들은 VVIP들이 마음껏 도박을 할 수 있도록 투입됐다. 현행법상 베팅액에는 제한이 없으나, 마사회는 자체적으로 경마 베팅한도 금액을 10만원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밀실에서 오고가는 돈이 크면 승부조작의 유혹이, 승부조작을 위해서는 상명하복의 조직문화와 불투명한 조직운영이 전제돼야 한다. 감출 것도 숨길 것도 많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사람'은 김낙순이 아니라 문중원이 되어야 한다
 

한국마사회 고 문중원 기수 죽음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장례를 위한 협의를 위해 관련 시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1월 17일 오전 경기도 과천 경마공원 앞을 출발해 양재 시민의 숲역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 이희훈

 
문중원 기수는 승부조작을 거부했고, 윗사람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 돌아온 것은 보복 조치였고, 2019년 11월 29일 그도, 마사회의 개혁도 죽었다. 김낙순 회장 취임 이후 벌어진 두번째 죽음이었다.

광화문 농성장은 문중원 기수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거리에서 살고 있는 그의 가족들과 동료들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뼈아프다. 농성장이 철거된 자리는 2016년 겨울 촛불을 들며 우리 모두가 외친 '적폐청산'의 메아리가 울려 퍼진 공간이다. 철거된 건 작은 농성장뿐만이 아니라, '촛불의 약속'이기도 했다.

촛불은 하나 둘 흩어지고, 누구는 청와대로 누구는 여의도로 누구는 공공기관으로 갔지만, 또 어떤 누군가는 바로 그 촛불의 뜻을 잇기 위해 그 자리에 외로이 남았다. 그리고 촛불정부로부터 국난 속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존재인 양 치워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이 모두 힘을 합쳐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자고 한다. 그래서 유족과 노동조합은 100일이 다 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한 극한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집회를 취소했다. 정부가 용역 대신 '적폐청산의 약속'을 보냈다면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었다.

역사에서 확인하듯 국난 속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건 억울한 국민이 아니라 자기 이해를 위해 움직이는 권력자들이다. 여당의 핵심인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철거했어야 할 것은 자신이 내려 보낸 김낙순 마사회 회장이지, 그가 지켜야 할 국민은 아니어야 했다.

더구나 그 국민이 최순실-정유라가 얽혀있는 마사회를 고치자고 외치는 국민이라면, 그게 바로 대통령이 지키고 섬겨야 할 국민이자 국정철학이지 않은가. 농성장 철거의 잘잘못을 논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최순실-정유라의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촛불정부라 자부하는 정부의 정당성이 흔들린다. 문재인의 사람은 김낙순이 아니라 문중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마침 문중원 열사의 딸이 문재인대통령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대통령 할아버지께. 우리 아빠 추워요. 따뜻한 하늘나라로 보내주세요.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요."

우리가 코로나19로부터 지키고 싶은 나라가, 문중원의 가족들도 살아가고 싶은 나라이길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박정훈기자는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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