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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이번 안식월에는 뭐 할 거예요?"
"글쎄... 일 끝내고 안식월 시작하는 날부터 생각해 봐야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올해가 딱 그 타이밍이었다. 장밋빛 안식월이 시작된 건 지난 설 연휴가 지나고부터였다. 후배에게 말은 못했지만, 한 달간 국내 여행을 두루두루 할 예정이었다. 제주도에서 일주일, 진주에서 일주일, 부산에도 일주일 정도 있어 볼까? 한껏 들뜬 마음은 쉽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또 표류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떠나지 못했다. 대신 코로나19로 '찐' 방콕 생활을 한 달 가까이 진행 중이다.

다니던 학원을 끊었다... "학원 못 온다는 아이들이 너무 많네요"

설 직후 코로나19 확진자 동선으로 내가 사는 지역이 거론됐을 때 모든 학원이 휴원을 결정했다(2월 3일부터 7일까지). 둘째 아이가 다니던 피아노학원과 태권도학원 역시 그랬다. 하지만 휴원이 끝난 이후에도 아이를 보내지 않았다. 내가 집에 있는데 굳이 무리해서 학원을 보낼 이유가 없어서 그랬다.

피아노학원 원장 선생님은 나를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방역업체 불러서 전체적으로 소독까지 했는데... 그래도 할 수 없죠. 그런데 못 나온다는 아이들이 너무 많네요." 나가야 할 고정 비용은 정해져 있는데, 아이들이 줄어들면 학원을 운영하는 것도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하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남은 건 태권도. 관장님에게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일요일 저녁 '카톡' 하고 알람이 울렸다.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할 텅 빈 체육관을 바라보며' 관장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짧은 동영상이었다.

요약하면 '코로나19로 아이들 걱정하는 부모님들 마음 너무 잘 안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으로 열심히 방역하고 소독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학원을 보내달라는 거였다. 지난해 새로 문을 열어 원생도 그렇게 많지 않은 곳이었다. 내용은 절절했다.

차마 미안한 마음에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개학 때까지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이때까지만 해도 개학이 일주일간 미뤄질 줄은 몰랐다). 장기간 여행을 갈 계획이라 그렇다고 했다. 그때까진 정말 짧게나마 안식월의 마지막을 남도에서 편안히 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때가 31번 확진자(대구) 이후로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눈 뜨자마자 뉴스 확인... 마스크 판매 사이트에서 새로고침만 수백 번
 
마스크는 못 사고, 불안한 마음에 한 개씩 사들인 손세정제들.
 마스크는 못 사고, 불안한 마음에 한 개씩 사들인 손세정제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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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8일 대구에서 첫 확진자가 나온 뒤로 지역사회 감염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뉴스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게 아침에 잠깐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뉴스 보기를 며칠, 불안이 일상을 잠식했다. 불안은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외부 출입이 있는 사람, 남편이 주요 타깃이었다. 출근했다 돌아오는 남편 옷, 핸드폰, 현관문 방문 손잡이 등등 남편 손이 닿는 데마다 의심의 눈초리로 소독제를 마구 뿌려댔다. 남편이 크게 재채기를 할 때마다 옷소매로 가리지 않고 했다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장 마스크를 많이 쓸 일도 없는데(확진자가 급증하기 직전에 마트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가 25매짜리 한 통을 사둔 바 있다). 지역 카페에 수시로 들어가 마스크를 싸게 살 수 있다는 사이트에 가서 진을 쳤다. 새로고침을 수백 번 해도 사이트가 먹통이 되는 바람에 마스크는 살 수도 없었다(그 와중에서 구입하는 사람들이 실로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며칠을 마스크 사기에 열을 올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책하러 나갈 때마다 대형마트에 잠깐씩 들러 마스크 판매 동정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 살 수 없는 마스크 대신 1인 1개 구입 제한으로 남아 있는 손소독제라도 사야 마음이 놓였다.

불안은 수면도 방해했다. 전처럼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남편도 마찬가지. 아침 식탁에서 마주 앉으면 우리 부부는 둘 다 심리적인 피로감을 호소했다. 이게 다 코로나19 때문이라면서. 13, 14일 출발 예정이던 여행은 17, 18일로, 다시 20일, 21일로 미뤄졌다. 그러다가 결국 포기했다.

'방학인데 아빠랑 여행도 한 번 못 가서 속상하다'는 둘째의 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남편이 하루 휴가를 낸 날. 아무것도 할 게 없었지만,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남편의 말에, 둘째가 제일 좋아하는 나라, '카르보나라' 스파게티를 먹으러 집 근처 파스타 집으로 나섰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몇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음식은 너무 늦게 나왔고, 내 신경은 온통 드나드는 사람한테 쏠려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던 한자 학습지 선생님에게도 이번 주 방문 수업은 쉬겠다고 말해둔 터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불안이 이렇게 컸나 싶어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심리적 불안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뉴스를 보고 나서야, 이게 나만의 문제는 아니구나 싶었다. 안도와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쓸데없는 두려움이 내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깨달은 건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에게 일상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다
 
유튜브에 시간을 탕진하고 난 뒤. 너무너무 심심해서 책을 보게 되는 기적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 역시 불안해서 책을 봤다. 불안해 하는 것보다 백배쯤 좋았다.
 유튜브에 시간을 탕진하고 난 뒤. 너무너무 심심해서 책을 보게 되는 기적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 역시 불안해서 책을 봤다. 불안해 하는 것보다 백배쯤 좋았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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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내가 사는 지역은 아직 확진자도 나오지 않았다. 일하지 못해 수입이 줄어들어 피해를 본 것도 없고, 갑자기 방치된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전전긍긍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불안하기만 한 쪽이었는데도 이랬다.

신기한 건 아이들이었다. 내가 내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동안 아이들은 잘 지냈다. 둘 다 집순이들이라 그런지 적당한 시간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하루 할당된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게임, 유튜브, 티브이 시청 시간을 모두 포함하여 하루 2시간 반)을 유튜브에 탕진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는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살던 둘째도 매일 인형 옷을 만드는 등 점점 나름대로 제가 할 일을 찾아 했다(심심하게 두면 알아서 논다는 말은 진짜였다). 별다른 학원에 가지 않아 아예 처음부터 걱정을 덜어준 예비 중학생 딸도 조용히 제 할 일에 몰두했다. 남편도 내가 집에 있는 시간 동안은 사무실에 남아 늦게까지 일한 뒤 퇴근했다.

나만 방황하고 있었다. 불안이란 놈에게 내 황금 같은 시간을 더 이상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다. 대청소를 시작했다. 하루는 작은방, 하루는 주방, 하루는 책방... '이게 다 뭐야... 여태껏 쓰레기를 짊어지고 살고 있었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눌 건 나누고, 버길 건 버리면서 속이 다 후련했다. 진작 이럴 걸.

일부러라도 신나게 지내려고 아이들과 시답잖은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뉴스보다 그동안 못 봤던 책을 더 많이 보려고 노력했고, 그도 안 될 때는 차라리 글을 썼다. 다 불안을 이기려는 노력이었다. 불안해서 온종일 뉴스를 보거나, 마스크 판매 사이트, 지역 카페를 전전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이러고 나니 덜 불안했다. 내 일상 중에 사소한 무엇이라도 이전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마스크를 벗고 잠깐 마음껏 숨 쉬는 일조차도.

불안에 지지 않기
 
방콕하며 책 읽기 딱 좋을 때지 말입니다. 읽었거나, 읽고 있거나, 읽을 책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불안을 이기는 한 방법이 됩니다.
 방콕하며 책 읽기 딱 좋을 때지 말입니다. 읽었거나, 읽고 있거나, 읽을 책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불안을 이기는 한 방법이 됩니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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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애들 점심을 챙겨주고 산책도 할 겸 잠시 걸었다. 언 땅이 말랑말랑했다. 폭신폭신 밟혔다.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있었다. 2월 27일부터 3월 8일까지 전국 어린이집이 휴원이라더니, 답답해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엄마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집 안에서 불안하기만 했던 나와 달리 오랜만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없던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답답하더라도 이렇게 일상을 견디는 것,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내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아이들 모습에서 배웠다.

우리가 이웃과 더불어 산다고 느끼는 건 큰 게 아니라 작은 것에서 생겨난다고 믿는다. 몇 개의 마스크라도 나누는 누군가에게, 간식이나 의료용품을 의료진에게 보내는 누군가에게, 손님이 없어 부담스러운 임대료를 줄이거나 면해주는 누군가의 행동에 우리가 감동하는 건 그들이 대단해서는 아닐 거다.

그보다는 내가 먼저 나서서 하지 못한 일을 그들이 일단 '시작'한 데서 오는 감동일 거다. 또 누군가는 그걸 보며 우리 사회가 아직은 살 만하다고 느끼게 되는 거고. 그런 선한 영향력이 돌고 돌다보면 내가, 우리가, 사회가 다시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

전염병으로 불안을 호되게 겪으면서 나는 이렇게 코로나19와 함께 하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하나씩 늘려가고 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일을 시작한다. 안식월 한 달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코로나19도,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태그:#마스크, #코로나19, #불안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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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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